제23화
초왕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늘 떳떳하게 행동했거늘 뒤에서 수상한 행동을 한다니?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은 왕비가 아니오? 말해 보시오. 어찌 이곳에 숨어 무술을 연습한단 말이오?”
“저는 숨어서 하지 않았습니다. 공기도 맑고 경치도 좋은 이곳에서 무술을 연습하면 안 된다는 규율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린 계집이 말주변도 좋았다. 초왕은 이를 갈며 조금씩 침착함을 찾았다.
“대체 무술을 연마하는 의도가 무엇이오? 또 가동은 어찌 꼬드겼길래 그 애가 당신의 사부를 하겠다고 한 것이오?”
깜짝 놀란 백천범이 말을 잇지 못하더니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왕야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온갖 떼를 써 그저 한두 번 알려 주려 한 게 다입니다. 가동 호위무사님은 제 사부가 되길 원치 않았으니 죄를 묻지 말아 주십시오, 왕야.”
“본왕의 사람은 본왕이 알아서 할 것이오.”
묵용감이 태연하게 말했다.
“가동은 본업 외에 사적으로 무술을 전수하여 규율을 어겼소. 어제 이미 채찍질을 당했으니 당분간 올 수 없을 것이오. 왕비의 무술 수업도 이제 끝났소.”
백천범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후다닥 일어났다.
“가동 호위무사님이 채찍질을 당했다고요? 괜찮은 것입니까?”
“아주 관심이 많구려.”
“사부는 부모님과도 같은 존재니까요.”
초왕이 버럭 호통을 쳤다.
“가동이 왕비의 부모님이면 본왕에게는…….”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무서웠다. 평소였으면 백천범이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겠지만, 그녀 또한 잔뜩 화가 났기 때문에 무서운 것도 잊어버렸다. 그저 초왕야는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가동이 그녀에게 무술을 가르쳐 준 게 그에게 무슨 폐를 끼쳤다고 채찍질을 내린단 말인가?
가동이 걱정된 백천범은 묵용감과 계속 말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경멸하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이내 눈썹을 치켜뜨고 입술을 삐죽이더니 유유히 자리를 떴다.
묵용감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 아직 왕이 말도 끝내지 않았는데 겁도 없이 가 버리다니? 감히 초왕을 병풍 취급한단 말인가!
백천범은 자신을 나쁘게 대하는 사람에겐 무관심으로 대응하고, 잘 대해 주는 사람에겐 갑절로 더 잘하는 사람이었다.
초왕의 저택에서는 기홍과 가동이 그녀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이었고, 그런 가동이 자신 때문에 벌로 채찍질을 당했다 생각하니 애가 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보러 가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보물 상자를 뒤적거려 작은 병에 담긴 상처 연고를 찾아 소매에 넣었다. 몇 개 남지 않은 과자도 손수건에 잘 감싼 뒤 서둘러 회림각으로 향했다. 묵용감이 아직 조정에서 돌아오지 않은 틈을 타 가동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복도를 걸어가던 백천범이 유모 제씨와 마주쳤다. 빗어 넘긴 그녀의 머리는 윤기가 좔좔 넘쳐흘렀다. 손에 쥔 해바라기 씨를 여유롭게 까먹으며 백천범을 향해 그녀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왕비 마마, 어디를 가십니까?”
백천범은 급히 문을 나서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뒤에서 콧방귀를 뀌는 늙은 요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체면을 세워 줘도 거절하다니, 서둘러 황천길이라도 가는 것인가?”
백천범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모 제씨에게 예의를 차렸지만 당분간 무관심으로 일관하기로 했다. 벌써 두 명이나 죽었으니 언젠간 그들과 끝장을 봐야 했고, 그러려면 유모 제씨의 약점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씨 부인이 유모들 뒤를 봐주고 있으니 섣불리 행동했다간 빠져나갈 구멍만 만들어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 아예 상대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회림각에 온 백천범은 우선 기홍의 방으로 향했다. 초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기홍과 녹하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녹하는 우아하게 간식을 먹고 있었고, 기홍은 고개를 숙인 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백천범이 방에 들자 기홍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올렸다.
“왕비 마마 오셨습니까?”
백천범이 웃으며 기홍을 나무랐다.
“언니도 참, 매번 저한테 이리 남처럼 대하다니요. 저는 가짜 왕비인데 유일하게 언니만 절 진짜 왕비처럼 대한다고요.”
녹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왕비 마마, 제가 왕비 마마께 잘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녹하의 말에는 늘 뼈가 있었지만 이미 익숙했다. 백천범은 그녀의 기분을 맞추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어찌 그리하겠어요. 녹하 언니야말로 진실된 마음을 지닌 거죠. 저는 그저 허울일 뿐이니 누군가 예의를 차려 대해 주는 게 더 불편해요. 녹하 언니처럼 해 주는 게 제일 좋은걸요.”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어쩜 이리도 달콤한 말씀을 잘하십니까? 미움 살 일은 절대 없겠습니다, 마마.”
녹하가 백천범 쪽에 접시를 내밀었다.
“드십시오. 왕야께서 남기신 녹두병綠豆餠입니다. 왕비 마마의 언니, 기홍이가 만든 것이지요.”
작고 둥근 녹두전이 새하얀 도자기 접시에 놓여 있었다. 어찌나 소담스럽게 담겼는지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뻤다.
백천범은 사양하지 않고 그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부드럽고 맛이 진한 게 녹두의 향이 입 안을 가득 메워 왔다. 백천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정말 맛있어요!”
기홍은 늘 맛있다고 치켜세워 주는 그녀의 칭찬이 익숙해질 정도였다.
“맛있으시면 갈 때 챙겨 드릴 테니 천천히 드시어요.”
“아!”
기홍의 말에 백천범이 환하게 웃더니 조심스레 소매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매듭을 풀자 과자 네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녹하가 놀라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가져가신 과자를 아직도 드십니까? 배탈이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아직 그렇게 덥진 않으니까 괜찮아요. 게다가 도자기에 넣어 침대 밑에 두었으니 찬기가 올라와서 상하진 않을 거예요.”
기홍이 백천범에게 물었다.
“이 과자가 맛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까?”
“다 먹어 버리기 아까워서요.”
녹두전을 하나씩 포개어 담던 백천범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손수건을 꺼내 과자를 옮겨 담았다.
“너무 오래되었으니 다른 이에게 주지 말고 제가 먹어야겠어요.”
기홍은 마음이 조금 저릿했다. 정말로 바보 같은 아이였다. 왕야가 회림각 출입을 허락하셨지만, 자신에게 민폐를 끼칠까 자주 오지도 못한 것이다. 게다가 오래전에 만든 과자를 아껴 먹고 있었다.
백천범의 말에 녹하가 물었다.
“누구에게 주려고 하셨는데요?”
백천범은 그제야 자신이 온 이유를 털어놓았다.
“가동 호위무사님이 채찍을 맞으셨다던데, 제가 가서 좀 보려고요. 저 때문에 그리되셨으니 죄송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헌데 아무것도 가져갈 게 없어서 기홍 언니 손 좀 빌리려고 온 것이에요.”
가동이 채찍질을 당한 사실과 벌을 받게 된 사건의 경위는 기홍과 녹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녹하가 왕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가동에게 정말 반하신 것입니까?”
백천범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백천범이 신경질을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녹하는 조금 멋쩍었다. 기홍이 눈을 부릅뜨며 녹하에게 말했다.
“혼나도 싸다, 싸!”
백천범이 말을 이었다.
“가동 호위무사님은 그저 제게 무술을 알려 주신 거예요. 저의 스승님이라고요. 왕야께서 왜 벌을 내리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설마 제가 무술을 배워 왕야께 맞설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
녹하는 백천범의 말을 비꼬았다.
“마마의 사부도 왕야의 적수가 되지 않거늘 마마께서 그리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런 말씀은 실력을 잘 헤아리신 다음에나 하십시오.”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도 백천범은 마음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문병을 갈 시간이 지체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녹두병을 잘 싸서 소매에 넣었다. 과자가 담긴 손수건은 탁자 위에 그대로 두었다.
“가동 사부님을 만나고 와서 다시 먹을게요. 언니, 가동 사부님 방은 어디에요? 길 좀 알려 주세요.”
녹하는 재빨리 기홍에게 길을 알려 주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왕비 때문에 채찍까지 맞았는데 만약 왕야께서 또 아시기라도 했다간 목숨이 더욱 위태로워질 게 뻔했다.
기홍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마마께서 다른 남정네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 될 일입니다. 다음에 제가 대신 가 보겠습니다.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백천범은 기홍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언니는 아가씨잖아요. 아가씨가 남정네의 방에 가는 건 안 될 일이지만, 저는 아직 사춘기도 오지 않았으니 아무 문제없어요.”
아직 사춘기도 오지 않은 어린아이라 해도 그는 이미 초왕에게 시집을 온 엄연한 초왕비였다.
녹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만약 왕야께서 아시기라도 한다면 가동은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마마께서도 화를 입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백천범은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왕야께서 안 계실 때 가는 거예요. 언니들만 얘기 안 하면 누가 알겠어요?”
짧지 않은 시간을 겪었으니 기홍도 고집이 센 백천범의 성향을 알고 있었다. 생각한 일은 꼭 하고 마는 백천범과 입씨름을 벌이는 것보단 빨리 다녀오라고 하는 게 더 나았다.
“좋습니다. 제가 왕비 마마를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지만 얼굴만 잠시 보고 바로 나오셔야 합니다.”
“당연하죠.”
백천범이 그제야 인상을 펴고 미소를 지었다.
“번거롭지만 언니가 한 번만 데려다주셔요.”
녹하가 계속 막아서려 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다들 엄중한 일인 줄도 모르고… 일이 터진 뒤엔 이미 늦을 텐데.”
* * *
기홍은 백천범을 호위무사의 처소에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동쪽 두 번째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동은 저 방에 묵으니 들어가 보시지요. 서둘러 나오셔야 합니다. 소인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언니는 돌아가도 돼요. 이미 길을 외워 둔걸요.”
기홍은 서둘러 들어가라고만 재촉했다. 백천범도 꾸물거릴 수 없어 복도를 따라 잽싸게 방으로 들어갔다.
가동은 등에 채찍을 맞았기 때문에 침상에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문에서 소리가 들리자 영구일 거란 생각에 그가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말했다.
“영구야, 형님 좀 주물러 줘. 상처가 간지러워.”
백천범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이불을 걷어 올린 뒤 보들보들한 작은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가동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