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22)화 (21/1,192)

제22화

명을 받은 영구가 곧장 후원으로 향했고, 탁자 앞에 앉은 묵용감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의 안색이 좋지 않자 기홍이 따뜻한 차를 올리며 상냥하게 말했다.

“왕야, 따뜻한 차 좀 드시옵소서.”

묵용감이 눈을 치켜뜨며 기홍을 바라봤다. 분명 그의 사람인데 어찌 백여름의 여식에게 하나둘 마음을 뺏긴단 말인가?

가홍은 워낙 마음씨가 선량하니 그렇다 쳐도 가동은 그의 곁에 있으면서 여인에게 눈길을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아이였다. 헌데 어린 계집아이에게, 그것도 얼굴이며 몸매며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아이에게 반했단 말인가?

분노가 밀려온 그는 손에 닿은 차를 휙 내쳤다. 깜짝 놀란 기홍은 수건을 들고 서둘러 쏟아진 차를 닦아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구가 가동을 데려왔다. 가동도 대충 눈치를 챈 듯 아무 말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묵용감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감추지 않고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혼삿날 내 너에게 왕비가 맘에 들거든 당장 쫓아내어 상으로 내리겠다고 했다. 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했고. 헌데 왕비가 이곳에 오고 나니 남몰래 정을 나누는구나. 내 아무리 왕비와 진실된 부부가 아니라 한들 네가 왕비와 사통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가동이 잔뜩 기겁한 채 고개를 들었다.

왕야의 분부를 받고 영구가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은 분명 왕비에게 무술을 가르친 것이 발각되었을 것이라 예상했던 그였다. 하지만 묵용감이 이렇게 오해를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동이 잔뜩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왕야, 억울하옵니다. 소인 늘 왕야께 충심을 다할 뿐이옵니다. 믿어 주시옵소서. 설사 소인의 목숨이 열 개라 한들 왕야의 본처이신 왕비 마마께 흑심을 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왕비 마마께서는 아직 어리시지 않습니까?”

묵용감이 크게 호통을 치며 말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흑심을 품을 수 있단 말이냐?”

“소인,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절대 아니란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것입니다. 소인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왕야께서 소인께 왕비 마마를 지켜보라 명하신 첫날부터 임무에 실패하였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워낙 경계심이 강하신 탓에 금방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미행 중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술을 알려드린다는 소리를 한 것이옵니다.”

“무술을 가르쳐 준다 했으면 무술만 가르쳐 줄 것이지, 어찌 집적거리기까지 한 것이냐?”

놀란 가동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

“왕야, 믿어 주시옵소서. 소인 절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본왕이 직접 본 것이거늘 어찌 계속 발뺌을 하는 것이냐?”

가동의 얼굴은 땀으로 흥건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왕비 마마의 땀을 닦아 주는 모습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흠칫 놀라 얼버무리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아직 어리시니까, 또 제게 사부라 불러 주시니 소인 그저 잘 대해 준다는 것이, 그저, 그리한다는 것이…….”

묵용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만약 네가 진정 왕비를 맘에 들어 하는 것이면 왕비를 폐한 뒤 네게 상으로 내리겠다.”

가동이 있는 힘껏 머리를 내리찧으며 말했다.

“왕야, 소인 정말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왕야의 정처이시니 그저 공경을 다하려는 마음밖엔 없사옵니다.”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은 묵용감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왕이 가장 증오하는 것이 배신이다. 채찍 서른 대의 형을 내릴 것이니 형벌 집행은 영구가 하거라. 대신 사사로운 정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네가 채찍질을 견뎌 낸다면 상처가 회복되는 대로 다시 일을 수행하라.”

영구는 냉담한 표정으로 재빨리 명을 받들었다.

“예, 왕야. 소인 정에 얽매이지 않고 형을 집행하겠습니다.”

가동은 잔뜩 풀이 죽은 채 영구와 방을 나섰다. 무서워서 벌벌 떠는 기홍의 모습이 묵용감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달래 줄까도 생각했지만 입을 열기 귀찮아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다들 나가거라.”

기홍과 녹하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녹하가 가슴을 탁탁 치며 심호흡을 시작했다.

“세상에나,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채찍 서른 대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구가 집행을 하면 맞아 죽는 거 아니야?”

겁에 질린 기홍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께 어찌 하실지 모르겠네…….”

녹하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네 앞길이나 걱정해. 방금 왕야께서 널 보시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 왕비 마마와 가깝게 지내서 좋을 게 없다니까. 가동도 봐, 그래도 그 애는 호위 무사니까 그나마 견딜지도 모르지만 너였어 봐라. 서른 대는커녕 세 대도 견디지 못할걸.”

기홍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도 자신과 백천범은 인연이 깊다고 여기던 그녀였다. 백천범이 귀엽게 언니라 부를 때마다 기홍도 백천범이 친동생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왕야가 이리도 화를 내시니 어찌 초조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 기홍이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묵용감은 백천범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적당한 명분이 없었다. 위엄 있는 초왕이 한낱 계집아이를 괴롭힌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한동안 남들의 입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 그렇기에 이 일은 그만 덮어 두기로 한 것이었다.

가동마저도 백천범의 뒤를 밟는 데 실패하는 걸 보니 백씨 집안의 다섯째 딸은 역시 보통내기가 아닌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가동의 말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묵용감은 자신이 직접 그녀의 속셈을 캐기로 했다.

다음날, 조정에서 돌아온 그는 옷을 갈아입고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 백천범은 가동이 벌을 받은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아직 후원에서 무술을 연습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는 조심스레 나무 뒤에 몸을 숨겨 호숫가 주변을 바라봤다. 역시나 작은 체구가 잔뜩 기합을 넣으며 주먹을 뻗고 발차기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꽤나 힘이 실린 모습이었다.

그날은 화가 치밀어 오는 탓에 가동과 백천범이 주고받는 시선만 눈에 들어왔었다. 정을 나누는 그 둘을 잡아들일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백천범이 홀로 연습하는 모습을 보니 꽤나 진지한 얼굴이 가소로웠다.

확실히 백천범은 참 웃긴 아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무렇지 않게 여우 신선인 척을 하질 않나, 바지에 실수까지 하고, 얼마 전엔 그 때문에 놀라 온 방을 더럽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바보스런 모습 안에 아직 드러내지 않은 본 모습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백여름이 그에게 백천범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초식 연습을 마친 백천범은 기마 자세를 시작했다. 그녀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땀에 젖은 잔머리가 얼굴에 마구 달라붙었다. 그녀가 머리카락 한 움큼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자 삐뚤어진 쪽머리에 붙어 더욱 기괴하고 우스운 모습이 되어 버렸다.

묵용감은 품 안에서 서양 시계를 꺼내 시간을 쟀다. 일각이 가까워지자 조금 버거운 듯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곧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녀는 계속 참고 견뎠다. 어찌나 힘들어하는지 얼굴이 다 일그러질 정도였지만 그녀는 피워 놓은 향이 꺼질 때까지 버텼다. 향이 꺼지고 나서야 천천히 일어나 힘껏 다리를 굴렀다.

다리가 심하게 저려 올 것이란 건 묵용감도 알고 있었다. 저리 세게 발을 굴리면 저린 기운을 가시게 할 순 있겠지만 꽤 통증이 느껴질 것이다.

묵용감은 그녀의 모습이 조금은 의외였다. 마냥 약골처럼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추측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역시 백천범은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마 자세까지 마치자 백천범은 머리를 다시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빠른 걸음으로 꽃밭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묵용감은 서둘러 그녀 뒤를 밟았다. 작게 난 길을 따라가니 각양각색의 화려한 봄꽃이 물결처럼 일렁였고, 이름 모를 꽃들이 생기 넘치는 모습을 자랑했다.

묵용감은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온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리도 아름다운 경치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다만… 어째서 작은 체구가 보이질 않는단 말인가?

묵용감은 흠칫 놀라 두 눈을 비볐다. 그의 앞을 걸어가던 백천범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그는 재빨리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앞쪽은 풀이 우거지지 않은 공터였지만 여전히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기이했다. 머슴도 가동도 도중에 놓쳤다 하더니 이번엔 그의 차례란 말인가?

정말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이도 아니고 명성이 자자한 동월국의 군신, 초왕야였다. 천하제일의 고수가 작은 계집아이를 눈앞에서 놓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나무 위까지 올라가 주변을 살폈지만 백천범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래, 잘도 숨었겠다. 그는 냉소를 지으며 나무에서 뛰어 내려왔다. 그가 착지를 하려는 순간 귀신이라도 본 듯 숨이 턱 막혀 왔다. 게다가 발을 잘못 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백천범이 가만히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까맣고 커다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왕야, 어째서 자꾸 저를 따라오시는 겁니까?”

난처해진 묵용감이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누가 따라갔다는 것이오? 본왕이 따라가는 걸 보기라도 했소?”

백천범이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처음엔 무술을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더니 그다음엔 저를 따라오셨습니다.”

무술 훈련을 할 때부터 백천범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치미를 떼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 그에게 혼란을 준 것이었다.

하지만 초왕의 체면을 더 구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는 계속 아니라고 우겼다.

“내가 뭣 하러 훈련하는 모습을 훔쳐본단 말이오? 대충 시늉만 하는 모습이 뭐 볼 게 있다고. 그리고 여긴 나의 정원이오. 내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내 공간이란 말이오. 왕비가 무슨 권한으로 본왕에게 따져 묻는단 말이오?”

백천범은 그가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다. 분명히 그녀 뒤를 몰래 따라오는 걸 봤기 때문이다.

백천범도 겁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곳은 왕야의 저택이니 왕야께서 어딜 가시든 상관없지요. 물론 제가 참견할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왜 자꾸 제게 사람을 붙이시는 것입니까?

처음엔 머슴을, 나중엔 호위무사를 보내시더니 이번엔 왕야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제게 직접 물어보시면 될 것을 어찌 뒤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신단 말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