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그럼 얼른 시작해요, 사부님. 어제 배운 초식은 이미 다 외웠으니까 오늘은 새로운 걸 알려 주세요.”
가동이 큰 소리로 웃으며 어색함을 달랬다.
“오늘은 왕야를 수행하는 일이 없어 왕비 마마를 찾아왔습니다. 참으로 성실하십니다, 왕비 마마. 어제 가르쳐 드린 초식을 제게 한 번 보여 주시지요.”
백천범이 소매를 걷어 올리자 가느다란 팔이 드러났다. 자세를 취한 그녀의 작은 얼굴에는 늠름함이 묻어났고,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녀는 꽤 그럴듯하게 기합을 넣더니 힘차게 주먹을 뻗었고, 이내 자세를 바꾸며 손바닥을 내보였다.
가동은 동작을 멈춰 세우고 다시 한번 그녀에게 시범을 보였다.
“손바닥은 빠른 속도로 있는 힘껏 뻗어야 합니다. 손가락을 쫙 펴되 장심을 최대한 앞으로 밀어내야 살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백천범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동작을 해 보였다. 이번에는 훨씬 더 나았다. 비록 힘은 부족했지만 기합 소리만큼은 남을 놀라게 하는데 충분했다.
“좋습니다.”
가동은 왕비를 칭찬하며 훈련을 이어 갔다.
“발을 찰 땐 아래쪽 중심이 안정적이어야 합니다. 허리의 힘으로 다시 발을 가져오십시오. 예, 맞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낮춘 다음 팔꿈치를 위쪽으로 들어 올려 있는 힘껏 주먹을 뻗으십시오.”
꽤 용맹하게 주먹을 뻗는 백천범의 모습에 가동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백천범이 무술에 뛰어난 자질이 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꽤나 총명하고 진지했다. 가동도 처음엔 미행하는 사실을 숨기려 살짝만 알려 주려 했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백천범의 모습에 감동하여 결국 진지한 태도로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초식을 가르쳐 주긴 했지만, 백천범의 기초 체력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가동은 기마 자세부터 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동의 지시에 백천범이 곧장 기마 자세를 취하려 했지만 속치마의 폭이 너무 좁아 무릎을 제대로 구부릴 수 없었다.
가동은 그제야 백천범이 아가씨라는 걸 깨달았다.
“기마 자세를 하시기 불편하실 테니 소인이 다른 걸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백천범이 치마를 살짝 걷어 올렸다.
“다 방법이 있지요.”
말을 마친 백천범은 몸을 돌려 꽃밭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해하던 찰나 무언가를 북북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번 더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곤 환하게 웃으며 제대로 된 기마자세를 취했다.
가동은 백천범이 치맛단을 찢기 위해 꽃밭에 들어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왕비가 무술을 연마하겠다고 멀쩡한 치마까지 찢어 버리다니, 가동은 퍽 난감했다.
* * *
해가 점점 높게 솟았다. 백천범의 등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했고, 호흡은 거칠었다. 작은 얼굴이 온통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여전히 기마자세를 유지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으로 얼굴이 간질거리자 눈을 찡긋찡긋하는 그녀의 표정이 익살스러웠다.
가동은 왕비를 좋게 타일렀다.
“왕비 마마, 조금 쉬시지요. 본디 무공은 빨리 익히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수련해야 하는 것이랍니다.”
백천범은 원하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잘 해내야만 하는 성격이었다. 더구나 무술은 사부님을 어렵게 구한 데다가 왕야에게 들키기는 날엔 그마저도 잃게 되니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해야 했다. 하찮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그녀는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만 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땀을 닦고 천천히 무릎을 폈다. 다리가 저릿한 게 꼭 개미 떼에게 물린 듯 따끔거렸다. 몇 차례 발을 세게 구른 뒤에야 조금 나아졌다.
가동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집안의 다른 시녀들은 다리가 저리면 앓는 소리를 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주물러 달라고 난리인데, 왕비는 털털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가동은 왕비에게 더욱 호감이 생겼다.
“왕비 마마, 앞으로 훈련하실 땐 여유를 가지셔야 합니다. 힘이 부족하시니 내일 제가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매일 한 시진씩 이곳에서 모래주머니를 치십시오. 꾸준히 하시면 분명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던 백천범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가동은 급히 그녀는 일으켰다.
“왕비 마마, 소인께 이리 고개를 숙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저는 사부님의 제자니까 응당 이리해야지요.”
헤헤 웃던 백천범이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사부님께 제대로 절을 올리지 못했네요.”
“절대 그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가동이 급히 그녀를 말렸다.
“왕비 마마처럼 고귀하신 분이 제게 절을 하시면 소인의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존경하는 사부님께 당연히 절을 올려야지요.”
백천범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무릎을 꿇었다. 이내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절 받으십시오.”
가동은 왕비가 절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계집아이의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왕비의 머리는 이미 땅에 닿아 있었다.
백천범은 꾀를 부리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에 이마가 땅에 다 닿을 때까지 머리를 숙여 절했다. 가동이 일으켰을 땐 이미 이마가 먼지로 뒤덮이고, 바닥 돌에 새겨진 꽃무늬까지 찍힌 뒤였다.
가동은 갑작스레 마음이 아려 왔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진실된 모습의 그녀는 아무리 봐도 악랄한 행동을 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동은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백천범의 이마를 깨끗이 닦아 주었다.
“왕비 마마, 앞으로 절대 다른 이에게 절을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왕비 마마처럼 고귀하신 분께서는 다른 사람의 절을 받기만 하셔야 합니다.”
백천범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부님이니까 절을 올린 것이에요. 아! 맞다, 사부님께 돈도 드려야 하는데!”
그녀는 전낭을 꺼내 부서진 은자를 탈탈 털어내며 말했다.
“오늘은 가진 게 이만큼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음번에 드릴게요.”
가동이 급히 거절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 절까지 받았는데 돈은 정말 필요 없습니다.”
“안 됩니다. 절은 절이고 돈은 돈이지요. 아무리 형제지간이라도 계산은 명확히 하라 하였습니다.”
백천범이 부서진 은자를 억지로 그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많진 않지만 처에게 꽃 정도는 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동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저는 아직 처가 없습니다.”
“사부님은 어떤 여인을 좋아하는데요? 제자한테 말씀해 보셔요. 지금은 후원이 적막하지만 왕야께서 더 많은 부인을 맞이하시면 이곳도 곧 북적거리겠지요. 그럼 여인들도 많아질 테니 제가 사부님 대신 눈여겨봤다가 알려 드릴게요.”
가동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엄연히 왕비였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자신을 대해 주다니. 그는 앞으로 최선을 다해 그녀를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 * *
가동은 매일 아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남월각을 찾았다. 백천범은 매번 환하게 웃는 얼굴로 ‘사부님’하고 부르며 그를 맞이했다.
가동도 어쩔 수 없이 그에 응했다. 전장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의 명성이 백천범 앞에서 철저히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일급 호위무사가 어린 계집아이의 뒤도 제대로 밟지 못하다니. 이 소식이 밖으로 알려진다면 그의 체면이 크게 깎일 터였다.
다행히 백천범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가 일부러 그녀를 찾아온 것이라 여기는 듯 감격스러워했다.
가동은 약속대로 나뭇가지에 모래주머니를 걸어 주었다. 백천범은 매일 초식을 연습한 후, 한 시진 동안 모래주머니를 치는 훈련을 했다.
있는 힘껏 치느라 흰색 모래주머니가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해졌다. 가동도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진정으로 무술을 연마하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백천범의 노력에 감탄하여 진심을 다해 그녀를 가르쳤다. 가르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늘 재잘대던 가동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묵용감도 그의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그가 가동에게 물었다.
“고민이라도 있는 듯한 모습이구나. 왕비에게서 뭐라도 알아낸 것이더냐?”
“아니옵니다.”
가동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매일 후원에서 무술을 연마하십니다. 연습이 끝나면 이곳저곳 돌아다니시다 저녁이 되어서야 남월각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십니다.”
“여전히 겉만 번지르르한 무술을 연습하더냐?”
“…거의 그렇습니다.”
“왕비가 널 발견한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계속 감시하거라. 분명 그 계집아이가 정체를 드러낼 날이 올 것이다.”
가동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멈추자 묵용감이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
“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소인이 보기에 남월각의 시녀와 유모들이 왕비에게 소홀한 듯 보였습니다.”
“그들은 왕비와 함께 온 자들이 아니더냐? 소홀하든 않든 그들 집안의 일일 뿐이니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가동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인사를 올린 뒤 방을 나왔다.
* * *
다음 날은 휴일이었기 때문에 묵용감은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인시에 일어나 뜰에서 검술을 훈련했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그는 목욕간에서 몸을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후원으로 향했다.
백천범이 매일 후원에서 무술을 연마한다니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본 그의 얼굴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형형색색의 꽃이 핀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그의 호위무사 가동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백천범의 동작을 교정해 주고 있었다. 뒤를 밟으라 했더니 도리어 그녀의 사부가 된 것이었다. 왕비가 무술을 연마한다며 보고해 대던 가동이 직접 무술을 가르치다니!
가만히 지켜보니 나뭇가지에 모래주머니까지 걸려 있었다. 보나 마나 가동이 한 짓이었다. 묵용감은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 둘의 모습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백천범이 권법 연습을 마치자 가동은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직접 땀을 닦아 주었다. 백천범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묵용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사통私通’이라는 두 글자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는 가동이 백천범에게 나쁜 마음을 먹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이제 보니 어젯밤 그에게 한 말도 시녀들이 왕비를 괴롭힐까 노파심에 꺼냈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잠시 더 바라보다가 이내 회림각으로 돌아와 영구에게 분부를 내렸다.
“후원으로 가서 가동을 불러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