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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0)화 (19/1,192)

제20화

백천범은 평상시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는 너무 크게 놀란 데다 속을 비워 내는 바람에 입맛이 없었다.

게다가 군신과 함께 저녁을 먹긴 싫었기에 초왕의 초대를 완곡히 거절했고, 덕분에 배가 텅 비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일찍 눈이 떠진 것이다.

정신을 집중해 주변의 소리를 들어 보니 사방이 조용한 게 아직 시녀와 유모들은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갑자기 슬픔이 밀려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두 명이나 죽었다. 그녀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모두 자신과 연관된 일이었다. 자신이 죽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딱히 어찌할 방법도 없었다. 유모 제씨와 유씨는 이씨 부인의 가장 뛰어난 수하였다. 음모를 저지른다면 완벽하고 치밀하게 계획할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여섯째 부인이 회임했을 때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유모 제씨가 여섯째 부인에게 다녀간 뒤, 이틀도 지나지 않아 아이가 바로 유산됐다.

아이 소식에 기뻐했던 아버지는 하늘만 바라보며 내리 한숨을 쉬었고, 여섯째 부인은 서럽게 통곡했다. 다른 부인들도 겉으로는 위로를 보내왔지만 그들 사이에서 추악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는 사실은 백천범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무감각해진 사람처럼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스스로를 지키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토록 무서운 유모들이 지금은 그녀를 해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초왕이 그녀를 내버려 둔다 한들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그녀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유모를 백 승상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가장 좋은 해법이었다. 나머지 시녀들은 이곳에 남는다 해도 수장이 없으니 그녀가 살갑게 대하다 보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엔 참아 볼 생각이었지만, 배가 계속 고파 오니 참기 어려웠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지난번 회림각에서 가져온 과자를 꺼내 들었다.

먹기 전, 은바늘로 속을 찔러 보았다. 색이 검게 변하지 않았으니 먹어도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까운 마음에 야금거리며 조금씩 과자를 베어 물었다. 다 먹어 버리면 나중에 배가 고플 때 요기할 만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두 개를 먹은 뒤에 다시 과자를 통 안에 넣고 조심스럽게 침대 밑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밖으로 나가 물을 길어 세수를 했다. 날씨가 더워져 찬물로 씻어도 춥지 않았다. 씻고 나니 날이 환하게 밝았지만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안주인인 이곳 남월각에서 그녀만 주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빗어 올렸다. 서툰 솜씨에 느슨하게 묶였지만 다시 빗기 귀찮아 그대로 두었다. 어차피 아무도 봐 주는 이 없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있는 물건을 확인한 뒤, 밖으로 향했다. 평온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여유롭게 남월각 대문을 나섰다.

* * *

가동은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어 이른 아침부터 남월각을 찾았다.

정원 밖 큰 나무 위에서 안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당당한 모습으로 대문을 나서는 백천범을 발견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내딛는 발걸음에 삐뚤어진 머리가 흔들거리는 남다른 맵시였다.

그녀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가동은 더 이상 이 일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초왕의 곁을 지킬 때보다 더 재미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명호 근처로 향하는 백천범의 뒤를 밟았다. 호수 주변은 탁 트여 있었기 때문에 혹여 들킬까 가까이 따라갈 수는 없었다.

긴 다리를 건너 호수 정자에 도착한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붉은 기둥 앞에 서 있는 백천범의 모습이 다른 날보다 더욱 야위어 보였다. 가동은 괜스레 불쌍한 마음이 느껴졌다.

호위무사인 가동은 칼에 피를 묻히는 사람이었다. 생사가 갈리는 모습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던 그였지만 연약한 체구의 백천범을 보고 있자니 가여운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났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말대로 정말 화살받이를 하러 온 듯했다. 어제 저녁, 왕야 때문에 놀라 구토를 한 것도 모자라 비틀거리며 돌아갔다는 소문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백천범은 한참을 서 있다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돌아갔다. 어찌나 빨리 걷는지 순식간에 앞뜰로 향했다.

* * *

후원이 적막한 편이라면 앞뜰은 꽤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늘 소란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채소와 과일을 대는 사람, 땔감을 해 오는 사람, 물을 길어 오는 사람 등 오고 가는 이가 많을 땐 제법 떠들썩했다.

가장 시끌벅적한 곳은 부엌이었다. 초왕의 저택에서 가장 큰 부엌이 있는 이곳은 저택의 모든 이들이 먹는 음식을 관리했다.

초왕은 기홍이 만든 음식을 먹었지만, 회림각의 나머지 사람들은 이 부엌에서 음식을 가져다 먹었다. 각 처소의 시녀와 무수리들은 음식을 담을 찬합을 가져와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안에서 한 명씩 호명하면 들어가 음식을 담아 오는 식이었다.

아직 남월각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일찍 오면 줄을 서야 하니 차라리 조금 더 자는 게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천범은 시녀들이 오지 않는 틈을 타 서둘러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은 그녀는 찐빵 두 개면 충분했다.

그녀는 줄을 서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아래에 앉았다. 예전에 줄을 기다렸다가 찐빵 두 개만 달라고 했더니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하인이 남월각에서 온 시녀로 착각해 한바탕 꾸짖었기 때문이다.

달라는 대로 가져갔다간 전체 배식이 엉망이 되니 아침밥을 전부 담아가든지 아예 가져가지 말든지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는 것이었다.

이미 좌절을 겪어 본 백천범은 줄을 서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가길 기다렸다. 그런 뒤, 배식이 모두 끝난 후에 살금살금 부엌으로 다가갔다.

태연한 척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장작 한 묶음을 안아 들었다. 그것을 부엌 벽에 옮겨 두는 척하더니 아무도 안 볼 때 잔뜩 쪼그린 자세로 찜통에서 찐빵 하나를 꺼내 들었다. 훔치는 데 재능이라도 있는 듯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 틈을 타 찐빵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소매에 찐빵을 숨겨 조심스레 문 앞으로 왔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엌을 빠져나왔다.

백천범은 걸어가면서 자신의 손바닥을 후후 불었다. 찜통에서 꺼낸 찐빵이 너무 뜨거워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참을 만한 수준이라 다행이었다. 더 뜨거워서 손이라도 털었다간 금세 발각되었을 것이다.

부엌까지 따라 들어갈 수 없었던 가동은 그녀가 아침밥을 가지러 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 장작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빈손으로 나온 것도 모자라 데이기라도 한 듯 손을 후후 불어 대는 모습만 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백천범의 모습에 마음이 답답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그녀를 따라 후원으로 돌아갔다.

백천범은 곧장 후원의 꽃밭으로 향했다. 정자에 앉은 그녀는 손수건을 탁자에 깐 뒤 찐빵을 올려놓고는 여유롭게 꽃을 감상하며 먹기 시작했다.

가동은 부엌에서 일어난 백천범의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그의 추측대로라면 그녀가 그 찐빵을 몰래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초왕의 왕비였다. 왕비가 아무리 많은 찐빵을 먹는다 한들 전혀 문제 될 게 없는데 어째서 훔쳐 왔단 말인가?

설마 왕비가 도벽이 있는 게 아닐까?

꽃밭 사이에 숨어 있던 가동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작은 왕비를 주시했다. 하늘거리는 작은 체구와는 달리 먹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던 커다란 찐빵 두 개를 먹어 치운 그녀는 손수건에 흘린 부스러기까지 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걸 확인한 뒤에야 손수건을 소매에 넣은 백천범이 자그마한 도자기 물병을 꺼내 마셨다. 물을 마시는 것 같았다.

가동은 조금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귀한 집 규수가 물을 들고 다니면서 마시는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백천범이 남월각을 나선 후 지금까지 계속 홀로 있었다는 점이다.

시녀 한 명도 없이 홀로 아침을 먹고 물을 마시며 모든 걸 전부 그녀 스스로 해결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꽤나 능숙해 보이는 게 줄곧 이렇게 해 온 사람 같았다.

저택 안의 하인들이 왕비를 무시하는 건 그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 이곳으로 온 유모와 시녀들까지도 왕비를 모시지 않다니…….

잠시 생각에 잠긴 가동이 다시 왕비 쪽으로 시선을 옮기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정자에 있던 왕비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역시 왕비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다. 지난번에 그녀를 놓쳤던 것도 단순한 실수는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순간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란 가동은 온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왕야가 했던 말처럼 왕비를 얕잡아 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설마 왕비가 자신을 발견하고 깊은 곳에 숨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는 왕비와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조금의 허점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쉽게 발각되지 않는 기술에 능한 그였다.

가동은 그렇다고 쉽게 몸을 드러내 보일 수도 없었다. 백천범도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발견한다면 난감한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어제는 어찌저찌 넘어갔지만, 오늘은 미행한 걸 단번에 눈치챌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이도 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꽃길 안쪽으로 향했다. 일급 호위무사로서 왕야의 명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본분이었고, 자존심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눈 깜짝할 새에 백천범을 두 번이나 놓칠 수는 없었다.

그때, 멀리서 한 무더기의 작은 꽃들이 유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꽃잎 사이로 옅은 홍색 옷자락이 반짝였다. 그는 곧장 나무 뒤로 숨은 뒤 앞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찾았으니 그래도 체면은 지킨 것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옷자락이 금세 다시 사라져 버렸다. 백천범의 행적을 또 놓친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었다.

가동은 가만히 눈을 감고 모든 신경을 집중해 주변의 소리를 들었다. 새가 지저귀는 맑은 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 나뭇잎이 호수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곧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백천범이 조용히 걷는 듯했다. 까치발로 살금살금 꽃 사이사이를 가로질러… 분명 그의 앞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라?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가동이 재빨리 눈을 뜨자 백천범의 삐뚤어진 머리가 눈앞에 보였다. 그녀는 놀란 토끼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사부님, 절 찾아오신 거예요?”

“…하핫.”

백천범은 저 좋을 대로만 생각하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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