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9)화 (18/1,192)

제19화

녹하는 왕비가 안고 있는 찬합을 보며 물었다.

“왕비 마마, 들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기홍 언니가 준 찬합이에요. 녹하 언니, 저녁은 드셨어요? 안 드셨으면 같이 먹어요.”

녹하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음식은 왕야를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왕야께서 아직 드시기도 전에 왕비 마마께 먼저 드리다니요. 왕야께서 아시면 곤장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백천범은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음식을 한시라도 빨리 먹고 싶은 그녀였지만 기홍이 곤장을 맞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담 왕야께서 다 드시고 난 후에 먹을게요.”

백천범이 녹하에게 찬합을 주며 말했다.

“녹하 언니, 다시 부엌으로 가져가세요. 저는 왕야께서 남긴 음식을 먹으면 돼요.”

백천범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녹하는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기홍을 진심으로 보호하려는 모습은 참으로 기특했다. 녹하는 더 이상 백천범을 난처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

“됐습니다. 소인 말하지 않을 테니 왕야께서 아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서 들어가셔요.”

백천범이 녹하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녹하 언니, 정말 감사합니다.”

왕비가 이리도 진지하게 예를 갖춰 인사하니 조금 부끄러워진 녹하는 헛기침을 한두 번 한 뒤,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음식을 담고 있던 기홍을 보고 그녀는 일부러 더 심하게 몰아세웠다.

“안 그래도 저녁이 늦었는데 왕야께 올리기도 전에 먼저 음식을 드리다니! 기홍이 너, 우리가 모시는 분이 누구인지 잊은 거 아니야? 남월각에 가서 왕비 마마를 모시기만 바라는 거 아니냐고!”

기홍은 깨끗한 천으로 접시 둘레를 닦은 뒤 조심스레 뚜껑을 덮었다.

“왕비 마마와 마주친 거야?”

“그래, 네가 왕비 마마께 먼저 음식을 드렸으니 왕야께서 곤장을 내리실 거라 했지. 놀라서 나에게 찬합을 주는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기홍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녹하야, 아무리 그래도 왕비 마마이신데, 너무 심하게 굴지 마.”

녹하는 기홍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너만 왕비 마마라 생각하지, 다들 놀림거리쯤으로 여기는데 뭐 어때서.”

* * *

가동은 백천범을 회림각에 들여보낸 후 재빨리 곁을 빠져나왔다. 묵용감에게 들킬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들켰다간 미행을 시켰더니 나란히 거니는 수준이라며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가동은 재빨리 숨으려 했지만 늘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왕야 앞에선 특히 더 그랬다. 그는 담장에서 자신 쪽으로 걸어오던 묵용감과 마주쳤다. 피할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왕야.”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어찌 여기 있는 것이냐? 왕비의 뒤를 밟으라 하지 않았더냐?”

가동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회림각에 계십니다.”

묵용감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먹보 백천범이 이 시간에 회림각을 찾은 것은 십중팔구 밥을 얻어먹으러 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묵용감은 알겠다고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가동에게 물었다.

“왕비는 오늘 무엇을 했느냐?”

“그저 밖을 돌아다니시는 것 말고는 별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묵용감은 일전에 학평관에게서 들었던 것과 같은 답이 나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정예 병사를 출전시킨 것은 좀 더 다른 성과를 얻기 위함이었다.

“돌아다니는 것 말고 다른 것은? 누구를 만났고 어떤 말을 했으며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 말이다. 먹고 자는 모든 것들을 상세히 보고하라.”

묵용감의 성난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가동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대답했다.

“다른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왕비 마마께서 후원 꽃밭에서 무술 연습하시는 걸 보았습니다.”

“하!”

그의 대답이 묵용감의 흥미를 끌었다.

“왕비가 무술을 한다? 어느 문파의 무술을 연습하더냐? 스승은 누구이고? 무슨 속셈인지 감이 오더냐?”

“…….”

왕비의 사부는 자신이었기 때문에 가동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동은 잠시 고민한 끝에 말을 이었다.

“어떤 속셈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그저 수준 낮은 초식을 연습하시는 걸로 보아 백 승상 댁 형제들이 훈련하는 걸 몰래 따라 배우신 듯합니다.”

힘이라곤 쓰지도 못해 보일 만큼 마른 계집아이가 무술을 배우다니! 대체 누구를 치려고……. 묵용감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냉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으니 계속 뒤를 밟거라. 무슨 일을 하든 본왕에게 낱낱이 보고해야 할 것이다.”

“예, 왕야.”

묵용감은 정원에서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지만 생각을 바꿔 처소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지 않았다. 기홍의 방 앞으로 향한 그는 창살 틈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백천범이 홀로 팔선상 앞에 앉아 커다란 밥그릇을 들고 신나게 밥을 먹고 있었다. 식탁 가운데엔 몇 가지 음식이 담긴 작은 접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가짓수는 많고 양은 적은 것이 만들어 놓은 음식에서 조금씩 덜어 놓은 것 같았다.

물론 그 음식은 그의 저녁밥이었을 터.

묵용감은 분노가 치밀었다. 왕야가 수저를 들지도 않았는데, 백천범이 먼저 그의 밥을 먹다니.

그는 힘껏 문발을 걷어 올리며 잔뜩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왕비에게 밥을 먹으라 했단 말이오?”

백천범은 왕야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혼비백산할 지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반응은 재빨랐다. 접시를 든 채 음식을 모조리 입에 쑤셔 넣은 것이다.

식사를 한 증거가 없다면 왕야의 음식에서 덜어 낸 것인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맞아 죽을지언정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묵용감은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리도 빨리 먹어 치우다니. 음식 중에는 뼈가 붙어 있는 고기도 있어 목에 걸리는데도 백천범은 손으로 가슴을 퍽퍽 치며 삼켜 넘기려 했다.

죽기 살기로 입 안에 욱여넣어 접시 하나를 몽땅 비워 낸 그녀는 곧장 또 다른 접시를 들어 자그마한 입이 울퉁불퉁해질 때까지 모조리 털어 넣었다.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백천범이 정신없이 먹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묵용감은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백천범은 그저 어린 계집아이에 불과했다. 작은 입과 같이 분명 식도도 좁을 터, 뼈까지 들어 있는 고기를 어찌 다 넘길 수 있었겠는가? 너무 과하게 막혀 있으면 필히 역으로 흘러넘치는 법이었다. 그녀가 웩 하는 순간 모든 것이 쏟아졌다. 상이며 바닥이며 전부 뿜어져 나온 것들로 가득 찬 것이다.

불쾌함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묵용감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백천범 또한 극도로 견디기 힘든 눈치였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가슴을 내리치며 기침과 함께 계속해서 속을 비워 냈다. 자그마한 몸집이 새우처럼 둥글게 굽어진 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하고 또 가여웠다.

“빼앗으려는 사람도 없거늘, 어찌 그리 급히 먹어 치운단 말이오? 그러니 이 사달이 나지.”

묵용감은 결국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뎌 그녀에게 물을 따라 주었다.

“물 좀 마시고 진정하시오. 수건으로 얼굴도 좀 닦고. 봐 주기 어려울 지경이오. 나까지 구역질이 나려 할 정도니, 원.”

백천범이 힘겹게 기침을 멈추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코를 팽하고 푼 뒤 잔을 들어 물을 마시자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 했다. 고개를 드니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묵용감에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망극하옵니다. 왕야.”

묵용감은 내심 조금 미안했다. 백천범이 싫었지만 그녀와 겨룬다 해도 정정당당히 싸우고 싶었던 그였다. 그녀를 이렇게 놀라게 하는 건 그의 본심이 아니었다. 물 한 잔은 사실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했다.

그는 소리를 높여 하인을 불렀다.

“여봐라, 방으로 들어 깨끗이 정리하거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수리 두 명이 곧장 방으로 들어와 재빨리 바닥을 청소했다.

백천범은 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생을 하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냄새까지 나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착한 기홍 언니야 별말 없겠지만, 녹하 언니는 화를 내는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 자신이 다시 오는 걸 언짢아할 게 틀림없었다.

백천범이 멋쩍게 웅얼거리며 말했다.

“냄새가 나는 듯한데 향을 좀 피우는 게 어떨까요?”

참 나, 이 와중에도 참견이 끊이질 않았다. 묵용감이 무수리에게 분부를 내렸다.

“방에 향을 피워 냄새를 없애도록 하라.”

백천범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묵용감에게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묵용감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소. 깔끔한 성격인 기홍과 녹하의 방이라 그런 것이니. 왕비가 말하지 않아도 향을 피우라 명할 참이었소.”

백천범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께서는 시녀들을 따뜻하게 굽어살피시는 좋은 분이시군요.”

묵용감이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말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백여름의 딸이 한 말인지라 퍽 우스웠다.

“방금 속을 다 게웠으니 배가 고프지 않소? 음식을 가져오라 하겠소.”

“아닙니다. 다 게워 낸 것은 아니옵니다.”

백천범은 방금 저지른 일을 언급하자 다시 부끄러워졌다. 그가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기홍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왕야, 방금 제가 먹은 음식은 사실…….”

잠시 말을 멈춘 그녀의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간 떨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던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긴장되었다. 아무래도 초왕야 앞이라 심리적으로 두려움이 느껴지는 듯했다.

묵용감은 말을 끊지 않고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실은 남월각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기홍 언니가 준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묵용감은 가소로웠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을, 뻔한 거짓말을 하다니. 하지만 그는 방금 백천범이 왜 그런 행동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었다.

만약 기홍에게 책임을 물을까 봐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했다면 그의 예상을 빗나가는 것이었다. 다른 이에게 악랄한 짓을 저지르는 백천범이 기홍에게만큼은 진심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 크게 화를 냈던 그였지만 돌이켜 보니 별일 아니었다. 그는 군영에서 더 자주 생활했기 때문에 이런 시시콜콜한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음식은 그저 독만 타지 않으면 될 뿐 먼저 먹든 나중에 먹든 상관없었다.

“회림각에서 식사를 주지 않을까 봐?”

그가 백천범을 쏘아보며 말했다.

“굳이 남월각에서 싸 왔단 말이오?”

“그것이 아니오라…….”

백천범이 얼버무리며 말했다.

“제가 너무 일찍 오는 바람에 회림각에서 아직 식사를 차리지 않았을 것 같아 그리 한 것입니다.”

“아, 그렇군. 왕비가 아직 한창 클 시기라는 걸 내가 잠시 잊었소.”

묵용감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왕 이리 된 거 많이 드시오. 본왕과 함께 들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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