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석양이 호숫가를 붉게 물들였고 초록빛 연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끊임없이 일렁였다. 백천범은 호숫가에 잠시 서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게 풍경을 감상하는 듯했다. 가동은 나무 뒤에 숨어 조용히 그녀를 관찰했다.
갑자기 그녀가 빠른 속도로 산기슭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은 숨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가동은 자신의 모습이 노출될까 걱정이 되었다. 결국 가동은 그녀가 숲속으로 완전히 들어선 뒤에야 다시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런데 산기슭을 오르고 나니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가동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초왕의 호위무사였다. 무술 실력이 가장 뛰어난 무사라고 할 수는 없어도 민첩성이나 관찰력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는 어린아이를 미행하라는 왕야의 명이 큰 재목을 썩히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줄곧 얕잡아 보던 그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산기슭은 나무가 빽빽이 심어진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눈에 주변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가동이 눈을 가늘게 뜨며 샅샅이 주위를 살펴보았다. 백천범은 이곳에 없는 게 분명했다.
산기슭에는 다른 정원으로 통하는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건물이 있는 곳이었다. 원래는 부인들의 처소였다.
그러나 황보주아皇甫珠兒가 죽은 후, 이곳은 줄곧 비어 있었다. 황보주아가 죽은 후 왕야 역시 부인을 맞지 않고 있었다. 얼마 전에야 어린 왕비와 혼인을 치른 것이었다.
이렇게 비어 있는 정원이 여러 곳 있었다. 설마 왕비가 그곳을 간 건 아닐까?
어둠이 내려앉자 숲속은 희뿌연 공기로 가득 찼다. 가동은 조심스럽게 오솔길을 따라갔다. 아무도 살지 않는 정원이었기 때문에 등불 따위는 당연히 없었고 굳게 잠긴 대문 너머로 적막함만 밀려왔다. 누군가 들어간 흔적 또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어린 왕비는 어디를 갔단 말인가? 설마 산 중턱에서 굴러떨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가동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 왕비가 길을 잘못 들어 미끄러지기라도 했다면 정말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왕비가 사라진 것은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는 발길을 돌려 숲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역시 왕비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미행 첫날부터 순조롭지 않은 탓에 가동은 기분이 영 찝찝했고, 좌절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그 순간 뒤에서 가늘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 절 찾으시는 거예요?”
깜짝 놀란 가동이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백천범이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어느새 자신의 뒤로 다가온 왕비는 손에 쥔 찐빵을 뜯어 먹고 있었다.
가동은 깜짝 놀라 말문이 막혔다.
“…왕비 마마, 어디에서 오시는 것인지요?”
“딱히 어디를 갔던 것이 아니라 그냥 돌아다니는 거예요.”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등불을 드는 시녀 하나 없이 홀로 다니시다니요.”
“저는 시력이 좋아 등불이 없어도 괜찮아요. 등불을 들면 번거롭기만 한걸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간절함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혹, 기홍 언니가 사부님한테 절 찾아 달라 부탁한 거예요?”
가동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홍 아가씨가… 오늘 맛있는 걸 아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는 핑계거리를 찾지 못해 그녀의 말을 되받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백천범은 가동의 말을 듣자마자 기뻐 날뛰다가 금세 웃음기를 가라앉히고 물었다.
“왕야께서도 계시나요?”
“계십니다.”
백천범은 조금 난감했다. 초왕과 함께 밥을 먹긴 싫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밥을 먹으면 즐겁지도 않을뿐더러 언제든 벌을 받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홍의 상냥한 얼굴과 식탁 가득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면 정말인지 참기 어려웠다.
백천범은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기홍이 보고 싶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손에 쥔 찐빵 반쪽을 가동에게 떠밀며 그녀가 말했다.
“사부님도 배고프시죠? 이거 드세요.”
가동은 그녀가 억지로 쥐여 주는 찐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그가 꺼려하는 듯한 느낌에 덧붙여 설명했다.
“입을 대고 먹은 게 아니라 손으로 뜯어 먹은 거예요. 침은 안 묻었으니 걱정 마세요.”
감히 주인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던 가동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망극하옵니다, 왕비 마마.”
멋쩍은 백천범이 손을 가로저었다.
“망극이라니요. 오후 내내 무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분명 배가 고프시겠지요. 우선 요기부터 하고 돌아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시어요.”
배가 고플까 마음을 써 주었다는 말에 가동은 감동이 밀려왔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만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왕비 마마께서 마침 급시우及時雨 같은 음식을 주셨습니다.”
“급시우는 송강宋江이지요.”
가동은 의외의 답이 조금 놀라웠다.
“왕비 마마께서도 수호전을 보셨습니까?”
“몰래 몇 번 보았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나자 백천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다른 건 모두 떳떳한 그녀였지만 이 문제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은 꼭 가지고 싶어 했다. 귀중한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둘째 오빠의 그림책은 몰래 몇 권 훔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녀가 책 한 권을 몰래 들고 왔는데, 하필 둘째 오빠가 아직 다 읽지 않은 책이었다. 둘째 오빠는 온 집안을 뒤지며 책을 찾기 시작했다. 시녀들을 혼내며 떠들썩하게도 만들었다. 그녀는 한쪽 구석에 숨어 두려움에 떨었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백천범을 의심한 둘째 오빠는 그녀의 두 팔을 있는 힘껏 뒤로 꺾어 버렸다. 온몸에 땀이 쏟아질 정도로 아팠지만 그녀는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을 하는 순간 더 세게 맞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고 나면 자신의 책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겪는 것이었다. 백천범은 그만큼 그 책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가동은 왕비에게 앞서 걸으시라고 청하는 손짓만 내보였다. 왕비의 회림각 출입이 허용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그는 정말 어찌 답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백천범은 회림각으로 향하면서 초왕을 마주치지 않길 바랐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빨리 가면 저녁 수라를 올리기 전 기홍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초조한 그녀의 발걸음이 잽싸게 움직였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가동은 순간 그녀와 자신의 격차가 벌어진 것을 깨달았다. 가동은 어린 왕비의 빠른 발걸음에 적잖이 당황했다. 일반 양반집 규수들과는 참으로 다른 모양새였다. 하늘하늘한 고운 자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 * *
백천범의 추측이 딱 들어맞았다. 기홍은 저녁상에 올릴 마지막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아궁이 근처에서 바삐 일하던 기홍은 껑충껑충 뛰어 부엌에 들어오는 왕비를 발견했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
“왕비 마마, 왕야와 함께 식사를 드시러 오신 것입니까?”
요즘 들어 기홍이 부쩍 가깝게 느껴졌던 백천범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정하게 언니라 부르더니 이내 어리광을 피웠다.
“특별히 언니를 만나러 온 거라고요.”
기홍은 솥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에 왕비가 데일까 걱정이었다.
“왕비 마마, 솥에서 멀리 계셔요. 김이 뜨겁습니다.”
“괜찮아요, 냄새가 좋은걸요.”
백천범은 부엌 한쪽에서 기홍이 요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맛있는 냄새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그녀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먹고 싶은 걸 꾹꾹 참았다.
이 모습을 본 기홍은 아이 같이 입맛을 다시는 왕비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솥에서 닭고기 한 조각을 건져 후후 입김을 불어 식힌 뒤, 왕비의 입에 갖다 대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소인 대신 간을 좀 봐 주시어요.”
“우와, 네!”
백천범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손가락으로 닭고기를 뜯어 조심스럽게 입에 넣고 맛을 음미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참으로 맛있어요. 간도 딱 좋아요. 연한 닭고기에 간이 잘 밴 데다가 향긋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워요! 여기서 더 맛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어요. 역시 언니 손맛은 금성대로에 주막을 열어도 될 정도라니까요.”
그저 흔히 먹을 수 있는 닭고기 볶음이었지만, 왕비가 이리도 칭찬을 하니 기홍은 조금 부끄러웠다. 기홍은 작은 접시에 닭고기를 담아 왕비에게 주면서 말했다.
“왕비 마마, 왕야와 함께 드시려는 게 아니면 소인의 방으로 가서 드십시오.”
기홍은 마치 백천범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는 듯했다. 역시 기홍은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언니였다.
기홍은 다른 음식들도 찬합에 담았다. 갓 지은 쌀밥까지 담은 찬합을 백천범의 손에 쥐여 주며 그녀가 말했다.
“왕비 마마, 들어가서 드셔요. 허기지시면 아니 됩니다. 한창 크실 시기이지 않습니까?”
그녀는 본디 먼저 장난을 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백천범을 만난 뒤로 전염이라도 된 듯 장난스런 말을 종종 먼저 꺼냈다.
백천범은 찬합을 품에 안고 헤헤 웃으며 말했다.
“기다렸다 언니가 돌아오면 같이 먹을래요.”
“저는 이미 일찌감치 먹었습니다. 어서 가서 드셔요. 식으면 맛이 없습니다.”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찬합을 들고 방으로 향했다. 마침 부엌 쪽으로 오고 있는 녹하를 만나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녹하 언니, 안녕하세요.”
녹하는 일부러 눈을 가늘게 흘겨 뜬 채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말했다.
“어머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비 마마께서 소인에게 안부를 물으시다니요. 왕야께서 들으시기라도 한다면 보잘것없는 목숨 부지하지 못 하겠습니다.”
백천범은 녹하가 조금 무서웠기 때문에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녹하 언니, 절 너무 미워하지 마셔요. 왕비는 그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허울일 뿐이니까요. 왕야께서 저를 싫어하시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녹하 언니는 저보다 언니니깐 예의를 갖춰 언니라 부르는 거지 다른 뜻은 없어요. 게다가 왕야처럼 고귀하신 분께서 부엌에 오실 리 없으니 마음 놓으셔요. 아무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녹하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뒤 말을 이었다.
“하마터면 왕비 마마의 입에 꿀이 묻었다 착각할 뻔했습니다.”
그녀는 백천범을 진짜 왕비라 여기지 않았다. 비록 왕비라 칭하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골려 주고 싶은 대상에 불과했다. 매번 백천범을 볼 때마다 놀리고 싶은 마음에 그녀의 입이 근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