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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7)화 (16/1,192)

제17화

“어딜 가셨소?”

“왕비 마마께서는 워낙 돌아다니시는 걸 좋아하시니 어딜 가셨다고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남월각에는 안 계신 것이오?”

“소인 계속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왕비 마마께서 나가시는 것만 보았고 돌아오시는 것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안 계시니 가동은 들어가 보지 않기로 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평소에 어딜 자주 가시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어린 계집이 대답했다.

“소인, 왕비 마마께서 명호 근처에서 돌아오시는 걸 몇 차례나 보았습니다. 아마 그곳에 자주 가시는 것 같습니다.”

가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명호 주변을 한 바퀴나 돌았지만 백천범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왕비 마마의 뒤를 밟으라는 명을 받았건만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어찌 뒤를 밟는단 말인가?

오후의 햇살이 밝게 빛났다. 바람에 향긋한 꽃내음이 실려 왔다. 가동이 무심코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화원에 와 있었다. 아씨들은 대부분 꽃이나 풀 따위를 좋아하니 왕비 마마 또한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발걸음이 내키는 대로 걸어갔다. 봄꽃이 어우러져 제법 운치가 있었다.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기라도 하듯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안쪽 깊숙이 들어갈수록 더 짙은 향이 풍겼다. 꽃은 많았지만 나무가 적어 시야에 막힘이 없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왕비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백천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예 발걸음을 멈추고 살랑대는 바람을 맞으며 꽃을 감상했다. 평소라면 계속 왕야의 곁을 지킬 시간이었다.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가동이었다.

사방의 아름다운 경치 덕에 그의 기분도 좋아졌다. 풍경에 심취한 가동은 흥이 올라 검무를 추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 *

백천범은 나무 뒤에 숨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연못가에 서 있는 남자를 관찰했다.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칼자루가 그의 손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마치 흔들거리는 뱀처럼 칼을 휘둘러 눈부시게 빛나는 꽃보라를 일으켰다. 위아래, 좌우 할 것 없이 뛰어난 솜씨를 자랑했다. 큰오빠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였다.

백천범은 흥미진진하게 가동의 검무를 바라봤다. 두 눈엔 부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협녀가 되고 싶었다. 그녀를 업신여기던 사람들을 눈물 쏙 빠지게 혼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동을 한동안 몰래 따라다닌 그녀는 그가 후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무엇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초왕의 호위무사인 가동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늘 웃어 주었기에 더욱 친근해 보였다. 하지만 영구는 아니었다. 꼭 모든 사람이 그에게 빚을 지기라도 한 것처럼 항상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가동의 근사한 모습을 보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동은 몸을 돌려 칼을 겨누었다. 하지만 왕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곧장 미소를 머금었다.

“소인,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백천범은 유독 웃는 얼굴에 약했다. 가동에 대한 그녀의 호감은 한층 더 커졌고, 껑충껑충 뛰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검무를 정말 잘 추시네요.”

“과찬이십니다, 왕비 마마.”

“다른 무술도 할 줄 아십니까?”

“어떤 무술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가벼운 무술이요, 권법같이.”

“소인, 대부분의 무술은 조금씩 할 줄 압니다.”

“한 분의 사부님에게 배운 것인지요?”

가동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옵니다. 여러 사부님 밑에서 수련하였습니다.”

“와!”

백천범이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여러 사부님이라니. 찾으려 해도 쉽지 않던데, 다들 어디에 살고 계신 거예요?”

가동이 깜짝 놀라 물었다.

“왕비 마마, 그런 건 어찌하여 물으시는 것이옵니까?”

백천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상에 골똘히 빠져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천천히 숨을 들이켜는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가동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에 근심 어린 표정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웃음기만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저의 사부가 되어 주시면 안 될까요?”

가동은 그녀의 생각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막 자신의 사부에 대해 묻더니 돌연 그녀의 사부가 되어 달라니?

“왕비 마마, 그게… 소인 아직 기예가 많이 부족하여 아마…….”

“하기 싫으신 거예요?”

그녀가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로 가동을 올려다보았다. 간절히 바라는 눈빛이었다.

“수업료는 드릴게요. 얼마가 적당할지 말해 주세요.”

가동은 난처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왕야께서 아시기라도 하시면…….”

“그럼 왕야께는 비밀로 해요. 무사님은 돈을 받고 기예를 전수하고, 저는 돈을 내고 기예를 전수받고, 어때요?”

잠시 고민하던 가동이 그녀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어찌 무술을 배우려고 하시는 것인지요? 건강 때문이옵니까?”

“스스로를 지키려고요.”

백천범이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백씨 집안 사람이니까 왕야께서 절 싫어하시잖아요. 어느 날 제가 눈에 거슬려 죽이려 하실 수도 있는데, 그때 무술을 할 줄 알면 맞서 싸우거나 도망갈 방법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가동은 크게 놀랐다. 그녀가 한 말 때문이 아니라 납득할 수 없는 행동 때문이다. 백천범은 어째서 이런 비밀을 그에게 터놓는단 말인가? 그것도 왕야의 측근인 호위무사에게 말이다.

그가 백천범을 살짝 떠보며 물었다.

“제가 왕야께 이런 얘기를 고할까 두렵지 않으신지요?”

“왕야께 말씀드리든 말든, 왕야께서는 조만간 저를 해하려 하실 거예요. 왕야는 엄청난 사람이고, 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니 조금은 공평하고 싶어요. 너무 쉽게 죽진 않을 정도로요.”

가동은 그녀의 말에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닥쳐 올 위험을 입에 담는 것치곤 그녀가 정말 태연해 보인 탓이었다.

* * *

나무 아래에서 백천범이 열심히 초식을 연습하고 있었다. 힘을 실을 때마다 쪽찐 머리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다시 올라오는 게 꼭 오뚝이 같았다. 웃음을 참기 힘들었던 가동은 연습을 마친 백천범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 머리는 누가 빗어 준 것입니까? 유모가 빗어 준 것입니까?”

백천범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고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가 한 거예요. 나름 괜찮죠?”

가동은 원래 유모나 시녀의 솜씨를 놀려 주려 했으나 그녀가 직접 빗었다 하니 말을 멈추었다. 그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백천범이 더욱 의기양양해 하며 말했다.

“그렇죠? 저는 뭐든지 잘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요.”

가동도 아부를 떨며 대꾸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왕야께 시집을 오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 말하니 백천범은 조금 우울해졌다.

“그렇담 더 이상 대단한 사람 안 할래요.”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다시 연습해야겠어요. 사부님, 틀린 부분이 있으면 꼭 알려 주셔야 해요.”

가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왕비 마마, 정말 열심히 하십니다.”

자신이 알려 준 초식을 왕비가 열심히 따라 하자 가동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왕비 뒤를 밟아야 할 사람이 도리어 왕비의 사부가 되다니. 왕야가 물으면 어찌 답해야 한단 말인가? 오후 내내 자신에게 무술을 배웠다고 아뢴단 말인가?

넋 나간 가동의 모습을 본 백천범은 연습을 멈추고 불만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잘 좀 봐 주세요. 다시 한 번 해 볼게요.”

가동이 하소연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 무술은 그리 금방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천천히 익히는 것이지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십시오. 왕비 마마께서도 바쁘실 텐데 소인은 이만 회림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백천범은 그제야 물으려 했던 말이 생각났다.

“헌데 후원에는 어찌 오신 것이어요?”

가동이 답했다.

“…그러니까, 후원에는… 요즘 후원이 시끄러우니 왕야께서 순시를 돌라 하셨습니다.”

“매일 오시는 거예요?”

“…제가 어찌 그리 여유가 많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백천범이 말했다.

“좋아요. 사부님이 못 오시면 제가 회림각으로 갈게요.”

흠칫 놀란 가동이 말했다.

“왕비 마마, 아니 되옵니다. 왕야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소인이 호되게 혼이 날 것입니다.”

“그럼 어떡해요?”

백천범은 크게 상심했다. 무술을 가르쳐 줄 사람을 힘들게 찾았는데, 이렇게 쉽게 끝낼 수는 없었다.

가동이 왕비를 달래며 말했다.

“왕비 마마, 소인을 찾아 회림각에 오시는 건 절대 아니 될 일이옵니다. 나중에 소인이 다시 왕비 마마를 찾아오겠습니다. 괜찮으시지요?”

백천범도 자신이 무술을 배운다는 사실을 초왕이 알게 될까 두려웠다. 가동이 벌이라도 받으면 자신의 사부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말했다.

“좋아요. 얼른 오셔야 해요, 사부님. 시간 날 때마다 가르쳐 주셔요.”

가동이 물었다.

“왕비 마마, 안 들어가십니까?”

“오늘 배운 거 더 연습하려고요. 잊어버리지 않게요.”

가동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인사를 올렸다. 후원을 나온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나무에 올라갔다.

그가 자리를 잡은 곳에서는 백천범이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이 눈에 잘 보였다. 한 동작 한 동작 제법 그럴싸했지만, 힘이 너무 약해 겉만 번지르르해 보였다.

한동안 지켜보고 있으니 어느새 해가 기울어져 갔다. 하지만 작은 몸집은 지치는 줄도 모르고 연습을 이어 갔다. 적극적인 그녀의 모습은 조금 감동적이었다. 왕야의 추측대로 악랄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진지한 노력은 정말 값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변이 황혼 빛으로 물들자 백천범이 그제야 수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손에 월계화 몇 송이를 든 채 꽃향기를 맡으며 걸어갔다. 잔뜩 삐뚤어진 쪽머리가 그녀의 발길이 움직이는 대로 한들한들 거리는 게 익살스러웠다.

가동은 그녀가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나무에서 내려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 * *

백천범이 남월각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있던 계집은 보필할 생각은커녕 왕비 마마라고 짧게 부르는 게 끝이었다.

가동은 소리 없이 벽을 타고 올라갔다. 복도를 가로질러 행랑채로 들어가는 왕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행랑채에서 나온 그녀의 손에는 줄곧 들고 있던 꽃 대신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바삐 남월각을 나와 회림각으로 향했다.

예상을 빗나간 왕비의 행동에 가동은 조금 당황했다. 기홍의 음식을 좋아하는 왕비가 밥을 얻어먹으려 회림각으로 향하는 것인가?

하지만 왕비는 회림각 입구에서 멈춰 섰다.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문 앞을 서성거리던 그녀는 결국 발길을 돌렸고, 가동 또한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명호 주변에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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