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6)화 (15/1,192)

제16화

그가 서재를 나서자 녹하는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기홍은 여전히 눈썹을 찡그린 채 걱정에 잠겨 있었다.

“다 나 때문이야. 왕비 마마께 미리 당부 사항을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왕야의 심기를 건드리신 거야.”

녹하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이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원하는 걸 가져오려다 왕비 마마께서 체통을 지키지 않으신 거지. 게다가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고민도 하지 않고 무작정 왕야께 사람을 달라 하시다니? 왕야께서 중시하는 사람인 것도 다 아시면서 말이야.

작년에 예왕禮王께서 저택에 오셨을 때도 그랬잖아. 네가 마음에 들어 데려가고 싶다고 말하셨다가 왕야께서 크게 노하셨었지.”

“그때랑은 다르지. 남월각에 간다 해도 저택을 떠나는 건 아니잖아.”

“내 말 못 들었니? 너는 왕야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왕야께서 아끼시는 귀염둥…….”

얼굴이 붉어진 기홍이 그녀를 찰싹 때렸다.

“이 못된 계집애,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소릴 하는 거야? 왕야께서 듣기라도 하시면 벌을 내리실 거라고.”

녹하는 가뿐하게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라니. 지난번 예왕께서 널 데려가려 하셨을 때도 왕야께서 크게 노하시고, 이번에 왕비 마마께서 데려가신다 하시니 또 화를 내셨는데 이래도 아니라는 거야? 왕비 마마께서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셨어도 과연 승낙을 안 해 주셨을까?”

* * *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며 떠드는 사이 묵용감은 이미 반월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는 정자에서 백천범과 묵용택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

발걸음을 멈춘 그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자마자 백천범은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겉으로만 그의 말에 따를 뿐, 뒤에서는 남몰래 허튼수작을 부리는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을 존중하는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묵용택은 지금까지 성숙하고 아리따운 여인들만 사귀어 왔다. 어린 계집아이에게도 흥미가 있다는 소리는 들은 바 없었거늘 활짝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대화가 아주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백천범과 묵용택은 꽤 길게 이야기를 나누는 통에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가까이 다가가 묵직한 기침 소리를 내었다. 이를 들은 두 사람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묵용택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백천범은 고양이를 맞닥뜨린 쥐처럼 쿵 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너무 급하게 박은 데다 딱딱한 바닥이었기 때문에 무릎이 유독 더 세게 바닥에 부딪혔다. 지켜보던 묵용택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오히려 백천범은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젊은 아녀자 같은 모양새로 앉아 있었다.

묵용감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어나시오. 지금 꿇어 무엇 하겠소. 진왕이 내가 늘 모질게 대한다고 여기겠구려.”

백천범은 식탁을 잡고 일어났다. 묵용감이 너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몸이 먼저 앞서 나갔다. 세게 박은 탓인지 무릎이 참으로 아팠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서 있는 그녀를 보자 묵용감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우두커니 서서 뭐 하는 것이오? 가던 길 가시오!”

흠칫 놀란 백천범은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갔다. 두어 걸음쯤 걷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쭈뼛대며 묵용감을 바라봤다.

“왕야, 방금 하신 말씀 진심이시지요?”

묵용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본왕은 일언이 중천금이거늘, 언제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있소?”

두려워하던 그녀의 표정이 금세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바뀌었고, 반달 모양이 된 큰 눈으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감사하옵니다, 왕야.”

어찌나 잽싸게 돌아가는지 작은 그림자가 복도의 기둥 사이를 날아다니는 듯했다. 백천범이 점점 더 재미있게 느껴진 묵용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형수님, 천천히 가십시오. 넘어지십니다.”

형수님이라는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 깜짝 놀란 백천범은 발을 삐끗해 비틀거렸다. 뒤쪽에서 묵용택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부끄러우면서도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 눈을 한 번 부릅뜨고는 다시 더 빨리 뛰어갔다. 두 개의 차갑고 음침한 눈동자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묵용택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셋째 형님, 형수님께서 참으로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형님께서 정말 쫓아낼 생각이 있으시거든 미리 저에게 언질이라도 해 주십시오. 저희 집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묵용감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반하기라도 한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백 승상의 다섯째 딸이니 친구만 가능하겠지요. 게다가 저리 몸집이 작으니 다 큰 다음에야 여인으로 보일 것입니다.”

“친구?”

묵용감이 그를 비웃었다.

“백여름의 딸과 친구를 하겠다?”

“셋째 형님, 저리도 어린 계집아이가 어찌 백여름을 돕겠습니까? 방금 저 애가 제게 뭐라 하였는지 아십니까? 자신의 아비와 형님의 사이가 나쁘니 자신은 화살받이를 하러 온 희생양일 뿐이랍니다.”

묵용감이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말했다.

“그 애에게 속지 말거라. 약한 참새인 줄 알았더니 어린 매였다. 저 애가 이곳에 온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두 명이나 연이어 목숨을 잃었다.”

“예?”

깜짝 놀란 묵용택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 애가 한 짓이랍니까?”

“아직 증거를 찾진 못했지만 거의 틀림없다. 그 애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라 해도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런 재간둥이 같으니라고.”

묵용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군요. 누가 죽었습니까?”

“둘 다 저 애가 데리고 있던 시녀였다.”

묵용택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데리고 있던 시녀는 뭣 하러 죽인답니까?”

“백 승상의 본처와 저 애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다. 헌데 함께 온 시녀와 유모들은 본처가 보낸 자들이라 하더구나. 아마 집안싸움이겠지. 아니면 시녀들이 저 애의 비밀을 알아채 입을 막으려는 것일 수도 있고.”

묵용택이 감탄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한집에 살면서도 마음은 다 다른 곳을 향해 있군요. 저자가 나를 해하려 하고, 나는 다른 이를 해하려 하고……. 황실뿐만 아니라 관료의 집도 모두 마찬가지겠지요. 어찌 보면 일반 백성들의 생활이 더 맘 편하겠습니다. 배부르고 따뜻하면 그것으로도 충분할 테니까요.”

묵용감은 정원의 복숭아나무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특히 황실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늘 그랬다. 죽은 둘째 형이 떠오르자 그의 마음이 아려 왔다.

“셋째 형님, 이제 어찌 할 계획이십니까?”

묵용택이 물었다.

묵용감의 눈이 일순간 번쩍이며 날카로운 시선을 내비쳤다.

“저 애는 백 승상의 딸이니 저 애를 이용해 명분을 찾을 생각이다. 증거만 찾으면 일이 쉬워질 테지. 저 애뿐만 아니라 저 애의 아비와 외숙부라는 사람까지 함께 칠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묵용택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 형님, 백여름 그 작자가 그리 쉽게 당하진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황제 폐하의 총신입니다. 형님과 분쟁이 있을 때마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간 몇 번씩이나 승상의 역성을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조정 또한 바람 잘 날 없으니 이 일은 천천히 의논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묵용감이 한쪽 입술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또 다시 그의 역성을 드시면 나 또한 백여름을 죽여 주아의 복수를 할 것이다.”

* * *

청수의 사건은 암암리에 계속 조사가 진행되었다. 영구가 처리하는 일이었기에 묵용감은 마음을 놓았다.

이틀이 지나자 역시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택 중문을 지키는 한 머슴과 청수가 몇 차례 만났다는 것이었다.

오며 가며 서로에게 마음이 끌린 두 사람은 석가산에서 몇 차례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석가산은 높은 데다 어두워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둘은 겹겹이 쌓아 올려진 바위 사이에서 포옹과 입맞춤을 나누며 사랑의 감정을 쌓아 갔다.

그날 밤에도 두 사람은 석가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머슴이 석가산에 가니 청수는 보이지 않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자 머슴도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후 사달이 났고, 감히 이 사실을 고할 수 없던 머슴은 홀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영구의 수사망이 좁혀 오자 청수와의 관계가 탄로 날까 두려워 스스로 입을 연 것이었다.

영구는 그를 의심하여 협박에 고문까지 했지만 끝끝내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원통하다는 말과 함께 억울한 죽임을 당한 청수를 위해 왕야께서 진상을 밝혀 주길 청했다.

영구의 말을 들은 묵용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탁자만 툭툭 튕기고 있었다.

청수가 스스로 석가산에 올라간 것이라면 백천범은 청수와 머슴의 사이를 분명 먼저 알고 있었을 터. 미리 기회를 엿보았다가 청수를 아래로 밀쳐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한참 망설이던 그는 가동을 불렀다.

“오늘부터 너는 왕비 뒤를 밟을 것이다. 매일 왕비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아라.”

가동은 조금 억울했다.

“왕야, 이런 일은 머슴을 시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제 본분은 왕야를 보위하는 것인데, 왕비 마마 뒤를 밟으라니요?”

묵용감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왕비를 만만히 보지 말거라. 머슴이 할 수 있었다면 내 어찌 네게 이런 일을 맡기겠느냐?”

요 며칠 백천범이 회림각을 드나드는 걸 가동도 본 적 있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씨 같았는데 시녀를 죽였다 하니 정말 불가사의할 따름이었다.

가동은 왕야의 명령에 불만을 표하긴 했지만 복종할 수밖에 없었기에 곧장 남월각으로 향했다.

* * *

요 며칠 조사가 한창인지라 남월각 사람들의 행실도 신중해졌다. 해바라기 씨를 먹으며 수다를 떨거나 노름을 벌이는 일은 없었고, 대부분 쉬거나 잠을 청했다.

또 매일 남월각 입구에 사람을 세워 망을 보게 했다. 왕야의 사람이 오면 큰 소리로 신호를 보내게 했다. 그 소리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급히 제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척 할 수 있었다.

가동이 남월각에 들어갈 때도 갑자기 계집아이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예를 갖추며 목청이 찢어질 듯 소리쳤다.

“가동 호위무사님 오셨습니까!”

귀청이 따가울 정도의 인사를 받은 가동은 닭살이 돋을 만큼 소름이 끼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왕비 마마 계시오?”

“그게…….”

계집아이는 두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왕비 마마께서는 지금 자리를 비우신 듯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