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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5)화 (14/1,192)

제15화

“무엄하다!”

묵용감이 식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충격으로 식탁 위에 놓인 그릇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초왕이 크게 노하자 안팎의 노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깜짝 놀란 백천범도 입을 떡 벌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묵용감은 더 크게 화가 났다. 잘못도 인정하지 않고 감히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다니!

그는 손가락으로 백천범을 가리키고는 잇새에서 억눌려 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천범, 감히 기홍을 데려가려 하다니! 저 애는 본왕의 사람이다!”

백천범은 그제야 자신이 크게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기홍은 그의 첩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찌 자신이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데려간다 할 수 있었을까!

역시 세상일은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는 달콤한 꿈에 젖어 있었다. 기홍을 남월각에 데려가 매일 함께 지내면서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자며 기홍에게 친언니 대접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다 기홍이 시집을 갈 때가 되면 혼수도 잔뜩 사 보내 기홍이 있는 곳에서 함께 살고 싶었다. 집안에 남자가 있으면 의지할 곳이 생기니 몇 년 뒤 그녀가 어른이 되면 좋은 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고 자식도 낳아 더 각별한 사이로 지내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기홍에게는 낭군이 있었고, 그 낭군은 다름 아닌 왕야였다. 그러니 그가 이리도 화를 내는 것이다.

백천범은 괴롭고 두려웠다. 그녀 또한 무릎을 꿇었다.

“왕야,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제가 말실수를 한 것이옵니다. 기홍은 왕야의 사람이온데 어찌 제가 감히 데려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잠시 밥을 너무 많이 먹어 머리가 멈추었나 봅니다. 제가 방금 드린 말씀은 그저 헛소리라 여겨 주시고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왕야.”

묵용감이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 또한 자신이 왜 이리도 크게 성을 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웃고 넘어가면 그만인 일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끓어올라 억누를 방법이 없었다. 회림각 출입을 윤허하자마자 때를 놓치지 않고 백천범이 자신의 사람을 데려가려고 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본 묵용감은 크게 한숨을 쉬며 화를 누그러뜨렸다.

“모두 일어나라.”

녹하와 기홍이 일어나자 백천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묵용감이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꿇어라. 내 아직 그쪽에겐 일어나라 하지 않았으니.”

기홍이 왕야께 용서해 달라 청하려 했지만 녹하가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눈짓과 함께 그녀의 팔을 슬쩍 꼬집으며 저지했다.

묵용감의 성질은 그녀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화가 하늘을 찌를 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묵용감은 소매를 한 번 걷어 올리고는 서재로 돌아갔다. 하인들도 모두 그를 따라갔다. 그 탓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백천범만 홀로 남겨졌다.

그녀의 앞쪽에는 작은 초원이 있었다. 초록빛 풀이 빽빽이 자란 풀밭 양옆에는 복숭아나무가 심겨 있었다. 복숭아꽃은 가지에 듬성듬성 빈약하게 피어 있었고, 나머지는 바닥에 층을 이뤄 쌓여 있었다. 꼭 분홍색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했다.

꽃이 만개하면 만개한 대로 예뻤고, 빈약하니 또 빈약한 대로 색다른 멋이 있었다. 그윽하게 펼쳐진 풀밭의 경치가 꽤나 아름다웠다. 때마침 아무도 없겠다, 백천범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풍경을 감상했다.

몇 년 새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점점 더 좋아졌다. 보잘것없는 목숨이라 해도 부지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 *

한편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오던 묵용택은 화원 정자에 아무도 없는 걸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화원 정자에 초왕께서 점심식사를 하고 계실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감히 자신에게 거짓을 고하다니, 벌을 받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게 틀림없었다.

그가 막 몸을 돌려 돌아가려는 찰나 작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몸집의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앞을 보고 있었다.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묵용택은 가만히 서서 상황을 더 지켜봤다. 잘못을 저지른 시녀인 듯했다. 무릎을 꿇고 벌을 받으면서 왜 저리 웃고 있단 말인가?

그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어린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울퉁불퉁 빗어 넘긴 머리 위에 삐뚤게 쪽을 지고 있었다. 반면 아주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어 어딘가 모르게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어린아이긴 해도 경계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재빠르게 시선을 쏘아붙였다. 옅은 두 눈썹과 촉촉한 살구빛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크고 까만 눈으로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묵용택은 여인들과 교제하는 데 능숙한 인물이었다. 그는 곧장 눈동자를 반짝이고, 큰 보조개가 움푹 팰 만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어린 계집아이가 빙그레 웃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공자께서는 참으로 예쁘게 생기셨습니다.”

“…….”

이 말은 보통 그가 여인들에게 먼저 꺼내는 인사였지만 오늘은 그녀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묵용택은 정해진 격식대로 행동하는 초왕의 다른 하인들과 달리 독단적인 계집아이의 모습이 재미있게 느껴져 더 알고 싶어졌다.

“어찌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오?”

백천범이 약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도 마셔요. 초왕께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백천범이 그를 빤히 살펴보다 물었다.

“누구시죠?”

장난기가 점점 더 심해진 묵용택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는 초왕과 가까운 사람이라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소. 그러니 말해 보시오. 그대를 용서해 달라고 내가 청을 드려 보겠소.”

백천범의 눈이 반짝였다가 금방 다시 암울해졌다.

“아닙니다. 왕야께서 또 크게 화를 내실 거예요. 기분이 자주 바뀌는 변덕스러운 분이시거든요.”

자신이 내뱉은 말에 깜짝 놀란 백천범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생각이 짧은 행동이었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다니. 만약 이 자가 초왕에게 고하기라도 한다면…….

걱정하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자 묵용택은 더 즐거워하며 말했다.

“걱정 마시오. 초왕께 고하지 않을 터이니. 사실 변덕이 조금 심하긴 하시니 그대 말이 맞소.”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백천범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왕손이나 귀족인 듯했다. 얼굴 생김새는 말할 것도 없는 데다 상냥하기까지 하니 초왕보다 훨씬 나았다. 그녀는 그에게 호감이 생겨 벌을 받게 된 이유를 알려 주었다.

“왕야의 시녀 기홍을 데려가겠다고 말해서 왕야께서 크게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제게 무릎을 꿇고 있으라는 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묵용택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보고 또 봐도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머리엔 달랑 화잠만 꽂고 있을 뿐 왕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듯한 작은 체구에 셋째 형님의 사람까지 갖겠다고 한 걸 보면 분명 얼마 전 시집온 셋째 형수가 틀림없었다.

묵용택은 이 상황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분명 왕비가 너무 어려 싸울 가치도 없으니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던 셋째 형님인데. 금세 태도를 바꿔 무릎을 꿇고 있으라는 벌까지 내리시다니.

사실 그는 백천범에 대한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퍽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순수하게 웃는 모습이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짧게 탄식을 내뱉으며 백천범을 일으켜 세웠다.

“셋째 형님도, 참. 형수님께 무릎을 꿇으라는 벌을 내리시다니요. 시녀를 보내 달라 했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랍니까? 어서 일어나시지요, 형수님.”

백천범은 갑작스런 그의 환대에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공자께선……?”

“저는 묵용택이라고 합니다. 여섯째이지요. 부르실 땐 편히 여섯째 동생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형수님.”

묵용택의 장점은 마음만 맞으면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백천범은 백 승상의 딸이었지만 아비는 아비, 딸은 딸일 뿐이니 각자 다르게 대할 수 있었다.

백천범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불러야 하는 게 맞지만 스무 살 남짓 된 젊은 청년에게 동생이라 부르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묵용택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황실에서는 이런 경우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황제의 막내아들을 숙부라 부르는 일도 있었다.

백천범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진왕야.”

“형수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저는 형수님의 아랫사람인데 저에게 이리 예의를 차리시다니요.”

그 또한 왕비에게 절을 올렸다.

“여섯째가 셋째 형수를 뵈옵니다.”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얘기했다.

“셋째 형수라고 부르지 마시어요. 얼마나 있게 될지도 모르는걸요. 초왕과 제 아버지께서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시니, 저부터 본보기로 손을 대려 하시겠지요. 저는 그저 화살받이로 보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묵용택은 그녀가 말하는 것이 재미있어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이 서로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묵용감이었다.

* * *

묵용감은 욱하는 성질이 있기도 했지만, 그만큼 빨리 화가 누그러지기도 하는 성격이었다.

서재로 돌아온 그는 마음이 금세 평온해졌다. 그는 의자에 앉아 녹하가 내어 준 따뜻한 차를 받아 들고는 찻잔 뚜껑으로 찻잎을 걷어 냈다. 조금 전 자신이 화를 낸 일을 생각해 보니 조금은 우스웠다.

그는 이 일을 제쳐 둔 채 책을 한 권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기홍이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을 피웠다. 은으로 연꽃잎을 새겨 넣은 향로에서 옅은 연기가 한 줄기 한 줄기 끊임없이 피어올랐고, 그윽한 향이 어느새 온 방을 가득 채웠다.

고개를 들어 몇 차례 묵용감의 눈치를 살피던 기홍은 그가 독서에 집중하자 입을 떼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왕비가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말씀을 드려 보려 했지만 왕야의 화를 더 돋우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 것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녹하에게 도움을 청했다. 녹하는 애원하는 기홍의 시선을 이겨 내지 못해 결국 묵용감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왕야, 날이 아직 찬데 어린 왕비 마마께서 오래 무릎을 꿇고 계시면 혹 병환이 나시지 않을까 걱정이 되옵니다. 하여…….”

묵용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더니 이내 책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짐을 진 채 밖으로 걸어 나가며 그가 말했다.

“왕비가 반성을 하고 있는지 본왕이 직접 가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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