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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4)화 (13/1,192)

제14화

차씨는 기쁜 마음에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때, 누군가 차씨의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백천범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왕비 마마,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십니까?”

학평관이 이리도 예를 갖춰 반기자 백천범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관리인 어르신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학평관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저 자신의 추측일 뿐이니 왕야께서 왕비가 회림각에 드시길 바란다고 직설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일을 그르쳐 왕야의 체면이라도 구긴다면 벌로 채찍을 맞을지도 몰랐다.

그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왕비 마마, 점심은 드셨사옵니까?”

“아직 안 먹었습니다.”

백천범은 반짝이는 두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백천범은 그를 보자 회림각과 그곳에 있는 기홍, 그리고 여러 맛있는 음식이 떠올랐다. 기홍에게 찾아가 정식으로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다면 더 바랄 일이 없을 성싶었다.

학평관이 말을 이었다.

“기홍 양이 원래 왕비 마마께 점심까지 만들어 드리려 했었다 하옵니다. 헌데 왕비 마마께서 아침 일찍 가시는 바람에……. 오리 백숙을 하려고 했다더군요.”

“정말요?”

백천범의 눈이 금세 반짝이더니 이내 다시 풀이 죽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왕야께서 돌아오셨으니…….”

학평관은 곧장 하고 싶었던 말을 덧붙였다.

“오늘 왕비 마마께서 회림각에 오신 일을 왕야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왕야께서 매우 기뻐하시면서 왕비 마마는 외부인이 아니니 절대 출입을 막지 말라 하셨습니다.”

“정말입니까?”

백천범이 기름기 번지르르한 소매를 펄럭이며 물었다.

“그럼 기다릴 게 뭐 있겠습니까? 갑시다. 오리 백숙은 다 만든 것입니까?”

백천범이 물었다.

“…그럴 것이옵니다. 노비가 왕비 마마를 모실 것입니다. 소인은 다른 일이 급하여…….”

“알겠으니 관리인께서는 일 보십시오.”

백천범은 특유의 뛰어난 붙임성으로 차씨를 부르며 말했다.

“배고파 죽겠으니 어서 가요.”

* * *

기홍은 화원에서 묵용감의 점심 수발을 드는 중이었다.

어린 무수리가 문발 근처에서 기홍에게 눈짓을 보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를 먼저 알아챈 묵용감이 무수리에게 말했다.

“고할 일이 있거든 들어와서 말하거라.”

무수리는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학평관이 회림각을 나서기 전, 앞으로 왕비의 출입이 가능하다는 걸 알려 주었기 때문에 눈치를 살피지 않고 사실대로 고했다.

“왕야께 아룁니다. 왕비 마마께서 오셔서 기홍 언니를 찾으시옵니다.”

묵용감의 미간이 한순간에 찌푸려졌다. 때마침 잘 왔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찾아오다니. 나이는 어려도 하는 짓은 참으로 영악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분부를 내렸다.

“왕비에게 이리로 들라 전하라.”

무수리는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나섰다. 기홍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녹하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바랐지만 녹하는 힐끗 곁눈질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기홍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기홍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왕야가 왕비를 이곳으로 부르는 것은 좋은 일은 아니었다. 가엾은 어린 왕비…….

백천범은 금방 도착했다. 그녀는 늘 왕야 앞에서 주눅이 든 모양새였다. 묵용감에게 절을 올린 그녀가 가냘프면서도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왕야, 저를 찾으셨사옵니까?”

묵용감이 대답했다.

“왕비가 날 찾아온 것이 아니오?”

백천범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저는 왕야를 찾아뵈려 한 것이 아니라 기홍 언니를 찾아온 것이옵니다.”

“기홍이는 뭣 하러 찾소?”

“그게… 오리 백숙을 했다 하길래…….”

그녀는 말을 하면서 식탁 위의 음식을 곁눈질로 살펴봤다. 식탁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사기그릇에 윤기가 좔좔 흐르고 육질이 연해 보이는 오리고기가 담겨 있었다.

갈라진 고기 배 속에는 불룩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다양한 재료가 가득 차 있었다. 멀찍이 서 있어도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러 왔고, 그녀의 굶주린 배를 자극했다.

백천범의 모습을 본 묵용감은 냉소를 참을 수 없었다. 또 연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백 승상의 딸이라면 못 먹어 본 음식이 없을 것이거늘. 오리 한 마리가 뭐라고 저런 표정을 연기한단 말인가.

“왕비가 오리고기를 좋아하나 보군. 기홍아, 왕비께 수저와 그릇을 내드리거라. 왕비와 함께 점심을 들겠다.”

백천범은 묵용감이 이리 말해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와, 왕야. 아, 아닙니다. 저는 먹는 모습이 못나 왕야께서 입맛이 떨어지실 것이옵니다.”

“왕비는 외부인이 아니질 않소. 게다가 첫날밤에 한 침대에서 묵기까지 한 왕비를 내 어찌 싫어할 수 있겠소.”

이 말까지 그가 알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한 백천범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인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경이었다.

수저와 그릇을 챙겨 온 기홍이 온화한 목소리로 왕비를 불렀다.

“왕비 마마, 어서 앉으시어요. 소인, 음식을 덜어 드리겠사옵니다.”

백천범은 왠지 함정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자 녹하가 왕비를 묵용감 맞은편 자리에 앉혔다.

기홍이 그녀에게 음식을 덜어 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오리고기를 좋아하시니 소인이 다리를 덜어 드리겠습니다. 고기 속에 넣은 재료도 좀 담아 드릴까요? 밤, 죽순, 올방개, 대추, 표고버섯, 완두콩, 절인 돼지고기, 당근 같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걸 드시겠습니까?”

의자에 앉고 보니 식탁 한가득 맛있는 음식이 넘쳐났다. 백천범은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잠시 걱정은 떨쳐내기로 했다.

“전부 다, 다 맛볼래요.”

녹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어린 왕비의 위가 참 크기도 했다.

기홍은 작은 그릇에 갖은 재료를 덜어 왕비에게 주었다. 백천범은 먼저 맨 위에 놓인 오리 다리를 은젓가락으로 집어 한 가닥씩 찢어 먹었다. 이에 감질이 난 백천범은 아예 손으로 집어 들어 고기를 뜯어 먹으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고기는 역시 손에 쥐고 뜯어야 맛있는 법이지요.”

그녀의 입은 온통 기름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한쪽 소매도 마찬가지였다. 꼬질꼬질한 모습에 묵용감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아이가 진정 백 승상 집에서 온 대갓집 규수란 말인가?

기홍과 녹하도 넋을 놓고 바라보긴 마찬가지였다. 부잣집 아가씨임에도 밥을 먹는 모습은 형편없었다.

입 벌리지 않기, 이 보이지 않기, 말 아끼기, 술을 마실 때 옷소매로 얼굴 가리기, 단정함과 우아함 유지하기 등 흔히 알고 있던 규수의 품행은 온데간데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고봉밥을 앞에 두고 한 손에는 오리 다리를, 다른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식탐을 부렸다. 각종 속 재료를 집어 입안에 구겨 넣으며 우걱우걱 먹는 모습이 족히 800년은 굶은 걸신 같아 보일 정도였다.

백천범은 눈 깜짝할 새에 큼직한 오리 다리를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때마침 기홍이 젖은 수건을 가져다주어 수건에 손을 닦았다. 음식이 어찌나 맛있던지 트림이 절로 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위축되어 불안해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경직되었던 눈매가 편안해지자 꼭 사탕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즐거워 보였다.

묵용감은 마치 자신의 병사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행군을 할 때 종종 들짐승을 사냥해 장작불에 구워 먹곤 했는데, 그때 팔을 마구 휘두르며 고기를 뜯어먹는 사병들이 꼭 이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백천범에게 말했다.

“왕비의 식욕이 참으로 왕성하구려.”

백천범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저는 키가 크고 있는 중이니 다른 사람보다 약간 더 먹는 것이 정상이옵니다.”

그랬다. 매우 충분한 이유였다. 이리 작은 몸이 더 자라지 않으면 어찌 어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백천범은 밥그릇을 손에 든 채 쌀밥을 입에 마구 쓸어 넣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맛을 음미하다가 이내 자잘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기홍에게 물었다.

“밥도 언니가 만든 것이어요?”

밥을 짓는 건 딱히 비결이랄 것이 없었다. 진상된 남쪽 지방 쌀로 밥을 지어 부드럽고 차진 게 특징이었다. 또 밥을 안치는 물은 특별히 옥천玉泉 지역에서 길어 왔다.

이 물로 차를 끓이면 시원하고 맛이 좋았기 때문에 왕야가 드시는 밥도 이 찻물을 넣어 만든 것이었다.

기홍이 답을 하기 전에 묵용감이 말을 꺼냈다.

“왕비만 괜찮다면 종종 회림각에서 식사를 해도 좋소. 온 집안을 통틀어 요리만큼은 기홍을 견줄 자가 없소.”

“정말이시옵니까?”

행복은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이었다. 백천범은 믿기지 않아 본능적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내보였다. 지난번에는 분명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누명을 씌우더니 어찌 갑자기 태도를 바꾼단 말인가?

이 모습을 본 묵용감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린 계집아이의 경계심이 이리도 강하니 다음번엔 또 이유를 물을 테지?’

“왕야, 어찌 저에게 이리도 잘해 주시는 것입니까?”

묵용감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역시…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 왕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본왕의 마음이 편치 않았소. 아직 성장기인 왕비가 어찌 사람을 죽일 수 있었겠소. 게다가 크게 놀란 나머지 바지…….”

“왕야!”

백천범이 큰 소리로 말을 잘랐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백천범이 묵용감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찬 기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그녀는 곧장 다시 온순한 모습으로 웅얼거렸다.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다 알고 있사옵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불이라도 난 듯 새빨개졌다.

바지에 실수한 일까지 다시 꺼내려 하다니… 아직 나이는 어렸지만 그녀도 체면은 있었다. 아무리 왕야가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 한들 그녀는 백 승상의 딸이었다. 대체 뭘 믿고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단 말인가?

묵용감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어린 계집의 목청이 엄청났다. 그는 놀란 나머지 젓가락으로 집고 있던 음식마저 떨어뜨렸다.

두 사람 모두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적막한 분위기만 흘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조차 백천범의 식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찌푸렸던 미간을 금세 펼치고는 식탁 위의 음식을 다시 훑어보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방금 있었던 일은 그녀의 뇌리에서 금방 사라진 듯했다.

기홍은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일이 익숙했기 때문에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면 곧장 그 음식을 덜어 주었다. 식사 시간 내내 왕비의 접시는 줄곧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많이 먹을수록 묵용감은 먹을 게 없어졌다. 그의 미간이 좁혀지더니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왕비의 남월각에서는 먹을 걸 올리지 않소?”

신나게 족발을 뜯고 있던 백천범은 그의 말을 듣고 순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식탁에 자신이 뱉어 놓은 뼛조각을 보고 있자니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올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없는 것이옵니다.”

“본왕이 말한 대로 왕비가 오고 싶을 땐 언제든 회림각에서 식사를 해도 좋소.”

백천범은 묵용감의 눈을 바라본 뒤 쭈뼛대며 대답했다.

“매번 왕야께 와 밥을 얻어먹으면 저도 매우 부끄럽사옵니다. 사실 더 좋은 방법이 있긴 한데…….”

“좋소, 말해 보시오.”

“그러니깐…….”

그녀가 슬쩍 기홍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기홍을 남월각에 보내 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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