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노한 왕의 얼굴을 본 기홍은 머리를 더욱 조아리며 대꾸했다.
“소인, 왕야의 시녀이옵니다. 그저 왕비 마마께서 가엽다는 생각에…….”
“왕비가 회림각에 온 것은 별일 아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낮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네가 본왕의 일정을 다른 이에게 알려 주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 것이다.”
“소인,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곤장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왕야.”
묵용감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거라. 곤장은 면할 것이다. 네가 맞아 죽기라도 하면 충원할 인원을 찾아야 하니 더욱 성가시게 될 것이 아니냐? 다만 벌로 이번 달 급료를 제할 것이다.”
그의 한숨 소리는 이 사달이 끝난 것임을 의미했기에 기홍은 곧장 절을 올리며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야.”
묵용감은 기홍을 잘 알고 있었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 사리 분별을 못한 것이었다. 악인만 아니라면 세상 모든 이에게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일 성격이었다. 어젯밤 백천범이 바지에 실수하는 불쌍한 모습을 보이자 분명 측은지심이 생겼을 것이다.
“왕비가 좋더냐?”
심장이 또다시 벌렁거리기 시작한 기홍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왕비 마마께서는 연세가 아직 어리시니, 소인이, 소인은 그저, 잘 보살펴 드리려 한 것이옵니다.”
“그래. 왕비와 왕래하는 것은 상관없다.”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묵용감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
녹하는 그나마 배짱이 나은 편이었지만, 기홍은 달랐다. 그렇기에 그는 이제껏 기홍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리도 선량한 마음을 가진 여인에게 상처를 주면 분명 상처도 오래갈 것이 분명했다.
“됐다. 나의 일과는 집안의 모든 이들이 다 아는 것이니 딱히 비밀이라 할 수도 없다.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학평관을 들라 하라.”
비밀이 아니었기에 기홍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왕야의 말을 듣고 보니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우물쭈물대다 예를 갖추어 절을 올린 다음 방을 나섰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학평관은 기홍이 풀이 죽어 울상으로 나오는 모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왕야가 자신을 부르라 명하는 소리를 들은 그였기에 마음이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기홍은 정말 미안해하며 말했다.
“어르신, 정말 송구합니다. 왕비 마마께서 오늘 이곳에 오신 걸 왕야께서도 다 알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학평관은 자신의 다리를 세게 쳤다. 세상에나, 그의 오른쪽 눈 밑이 파르르 떨려 왔다. 이 일이 탄로 나다니.
그는 머슴을 대문 밖에 세워 놓고 왕야의 모습이 보이거든 재빨리 소식을 전하라고 분부까지 했었다. 충분히 손을 써 놓았다 생각했지만 결국 발각되어 버리다니…….
학평관은 문턱을 넘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고 왕야께 아뢰었다.
“왕야, 소인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먼저 자백하는 것이 왕야에게 들춰지는 것보다 더 나았다.
묵용감이 차가운 시선으로 물었다.
“어디 한번 말해 보아라. 무슨 죄를 지었더냐?”
묵용감의 쌀쌀한 말투에 학평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혼삿날 회림각에 잘못 발을 들인 왕비 때문에 곤장을 맞은 그였건만, 이번에도 벌을 면할 방법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조아린 채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께 아뢰옵니다. 오늘 왕비 마마께서 화전을 만드는 기홍과 녹하를 돕기 위해 회림각에 다녀가셨습니다.”
묵용감은 곁눈질로 탁자 위의 화전을 훑어봤다. 그렇다면 왕비도 이 화전을 만들었단 말인가? 적이 만들어 준 화전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더 이상 화전에 대해 따지진 않기로 했다.
“왕비는 규율을 잘 모르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총 관리인인 자네의 행동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학평관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소인, 왕비 마마께 설명을 드렸으나, 왕비 마마께서…….”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재빨리 묵용감의 안색을 살핀 뒤 억지로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께서 자신은 외부인이 아닌 왕야의 정실이고, 이미 첫날밤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셨다고 하셔서…….”
마침 차를 들이켜던 묵용감은 풉 하고 찻물을 입 밖으로 뿜어내고 말았다. 학평관의 얼굴에도 찻물이 튀었지만 감히 닦아 낼 수 없었다.
묵용감은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백천범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둘은 분명 한 침상에서 함께 첫날밤을 보냈다. 그날 일은 뇌리 깊숙이 박혀 생각날 때마다 웃음이 터지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외부인이 아니라니… 나 원 참!
그는 잠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내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리면서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왕비가 이왕 그리 말했다 하니, 앞으로는 오고 싶을 때마다 오게 하거라.”
학평관이 크게 놀랐다. 왕비를 마음껏 회림각에 들이라니? 다른 곳은 그렇다 쳐도 서재는?
왕야의 서재는 집안에서도 출입이 가장 금기시되는 곳이었다. 호위무사 두 명과 시녀 둘, 왕야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어찌 됐든 그녀는 명백히 백 승상의 사람이었다.
그는 주저하며 물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회림각을 마음대로 왕래하셔도 좋단 말씀이신지요?”
“그래.”
“이곳 서재를 포함해 어느 곳이든 가능한 것이옵니까?”
묵용감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왕비가 자신은 외부인이 아니라 했다지 않느냐? 본왕은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을 것이다.”
묵용감이 웃는 모습을 본 학평관은 조금은 누그러지는 그의 표정에 마음을 놓았다. 묵용감은 그를 살짝 떠보며 물었다.
“왕야께서 분부하실 다른 사항이 없으시면 소인 곤장을 맞으러 가 보겠사옵니다.”
왕비의 회림각 출입은 허했지만, 그게 학평관의 벌을 면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역시나 묵용감은 짧게 그러라고 답하고는 붓을 들어 상주서를 쓰기 시작했다.
한껏 절망한 학평관은 인사를 올리고 조용히 문 앞에 섰다. 막 방을 나서려는데 묵용감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다시 즉각 고하지 않는 일이 있거든 그땐 총 관리인의 자리도 내놔야 할 걸세.”
학평관은 자신이 벌을 받는 진짜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왕야를 속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약간의 운이 따라 줬다고 해도 안 될 일이었으니, 달게 벌을 받는 수밖엔 없었다.
학평관이 방을 떠나자 묵용감은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한 무더기의 문서 사이에서 밀서 한 통을 꺼내 들었다. 백 승상의 처남 이강이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점령한 사실을 고발하는 탄원서였다.
이강이 관아에 탄원을 넣지 못하게 백성들을 억압하자 백 승상과 묵용감이 서로 앙숙인 점을 이용해 그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백성들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지만, 이강에게는 그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귀비의 외숙부이자 승상의 처남, 정2품의 고관인 아버지를 둔 자에게 감히 누가 덤빌 수 있단 말인가?
예전에는 이러한 내용의 상소문이 황제에게까지 전달되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 또한 일개 서민의 일로 실권을 장악한 백 승상을 당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겉으로만 처남을 엄격히 가르치라며 백 승상을 문책하는 게 다였다.
지금 이 탄원서가 설령 황제에게 전달된다 한들 또 비슷한 일만 되풀이될 게 뻔했다. 왕자라고 해도 법을 어기면 백성과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고 황제는 말했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묵용감은 쓴웃음을 지으며 붓을 들고는 탄원서 제일 윗부분에 몇 글자를 적어 넣었다.
「잠시 보류」
그가 이 일을 들췄을 때, 황제에게 저지당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곤란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강부터 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을 셈이었다. 그리고 백천범이 바로 그 실마리였다.
아무 까닭도 없이 회림각에 왔다는 것은 분명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막을 알고 있는 시녀 둘을 살해하더니, 이번엔 그의 목숨을 곧장 앗아 가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계략을 역으로 이용해 공격하는 편이 나았다.
왕족인 왕야를 음해하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했다. 설사 황제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인다고 한들 수많은 왕족들과 조정의 문무백관의 인정까지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바로 이때 백 승상을 해치우고 이강을 처리하면 손쉽게 끝날 일이었다.
그는 백천범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어린 계집아이가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녀가 회림각에 오고 싶어 한다면 그는 대문을 활짝 열어 두고 그녀를 반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음해하길 기다릴 생각이었다.
* * *
곤장을 맞으러 가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학평관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왕야의 말투를 봐선 왕비를 회림각에 정말 들이려는 것 같았다. 하룻밤을 같이 묵었다 하여 설마 눈이라도 맞은 것인가? 하지만 그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왕비의 체격은 어느 사내라도 눈길을 주지 않을 만큼 작고 가냘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자신의 추측에 확신이 생겼다. 왕야를 곁에서 20년이나 모신 그였다. 분명 그의 직감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왕비가 또다시 회림각에 갈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왕야가 특별히 출입을 허용하였으니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왕야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먼 길을 돌아 남월각에 들렀다. 하지만 시녀와 유모들 모두 백천범의 행적을 아는 이가 없었다.
왕비가 번개처럼 나타났다 구름처럼 사라지는 것은 그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머슴이 그녀의 뒤를 밟았을 때도, 자신이 감시했을 때도 홀연히 사라진 그녀였기에 사람을 붙이는 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남월각을 나와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에 그의 시종 차씨가 방도를 내놨다.
“어르신, 이곳에서 계속 기다려 보는 건 어떻습니까요? 정오가 다 되어 가니 왕비 마마께서도 점심을 드시러 오시겠지요.”
학평관은 왕비가 화전 몇 장을 집어 들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음식을 가지고 계시니 배고프실 일은 없을 게다.”
차씨는 눈을 한 번 굴리더니 또다시 의견을 내놓았다.
“기홍 아씨가 화전에 참기름을 넣어 향이 진하니 정원을 돌아다니면서 찾다 보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지 않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학평관이 이내 분부를 내렸다.
“나는 이곳을 지킬 테니 너는 가서 왕비 마마를 찾아보거라.”
차씨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큰 보폭으로 정원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몇 발짝도 떼지 않았는데, 앞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에 작은 몸집이 한낮의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마치 쑥쑥 자라나는 싱그러운 새싹처럼 생기발랄한 모습의 백천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