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12)화 (954/1,192)

제12화

기홍이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이리 드시고 싶어 하시니 빠르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기홍도 그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묵용감이 돌아오기 전에 왕비를 보내야 했다. 그녀 또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재료 준비를 시작했다.

백천범은 화전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었지만, 그 열정만큼은 대단했다. 그녀는 기홍의 뒤에 바짝 붙어 이것저것 가져다주고 옮겨 주며 열심히 도왔다.

학평관도 어찌할 도리가 없자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왔다.

화전을 만드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신선한 회화나무 꽃을 따 물에 데친 뒤, 밀가루와 옥수수가루, 계란 두 알을 섞어 만든 반죽에 올려 부치기만 하면 끝이었다.

백천범은 다른 일은 몰라도 나무 위에 올라가 꽃을 따는 건 자신 있었다. 작은 몸집으로 꼭 원숭이처럼 잽싸게 나무 위로 올라갔다. 활짝 핀 꽃으로만 골라 따는 그녀 밑으로 기홍이 바구니를 받쳐 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바구니에 꽃잎이 소복이 쌓였다.

“왕비 마마, 이만하면 충분하옵니다. 어서 내려오시어요. 떨어지시면 큰일이옵니다.”

녹하가 한마디 거들었다.

“떨어질 일은 없어 보이는데, 뭐. 보아하니 매일같이 나무를 타시는 것 같은데? 지체 높으신 백 승상 댁 따님이 나무를 잘 탄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백 승상께서 꽤나 낯부끄러워 하시겠지.”

백천범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신나게 꽃잎을 따며 말했다.

“녹하 언니 말이 맞아요. 집에서 저만 나무 타는 걸 좋아했어요. 나머지 언니들은 명실상부한 ‘백 승상 댁 따님들’이었는데 말이에요.”

녹하가 말했다.

“그게 바로 우리 왕비 마마께서 정말 남다르다는 뜻이지요!”

그녀의 말에는 뼈가 있었지만, 백천범은 개의치 않고 헤헤 웃었다. 백 승상 집의 악독한 시녀들과 비교해 보면 이마저도 친절한 편에 속했다.

바구니 절반가량 꽃잎을 채운 뒤, 백천범은 다시 기홍과 녹하의 방으로 돌아왔다.

기홍은 꽃잎을 씻어 다듬은 뒤, 탁자에 앉아 예쁜 꽃잎만 골라냈다. 녹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다간 왕야가 돌아올 때까지도 만들지 못할 것 같았다.

녹하는 애초 이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옆에 앉아 일손을 돕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백천범은 자진해서 물을 끓이러 갔다. 부뚜막에 쌓인 땔감을 옮겨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됐다.

그녀는 아궁이 근처에 쪼그려 앉아 조심스레 나뭇가지를 쌓아 올린 뒤, 후후 입김을 불어 넣었다.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까만 자국이 생겼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작은 불씨가 점점 크게 타오르는 모습만 지켜봤다.

불이 잘 타오르자 신이 난 그녀는 솥을 닦아 물을 받아 놓고는 끓기만을 기다렸다.

백 승상 집에서는 몰래 부엌에 들어가 밥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음식만 익혀 먹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기에 불을 피우는 것만큼은 능숙했다. 언제 불을 피울지 몰라 늘 허리춤에 부시를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기홍이 손질을 마친 꽃을 들고 부엌에 들어왔다. 얼룩 고양이처럼 더러워진 왕비의 얼굴을 본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손수건을 꺼내 얼룩을 닦아 주었다.

“왕비 마마께서 이리 힘든 일을 하시다니요. 어서 방으로 드시어요.”

백천범은 방에 있고 싶지 않았다. 기홍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녹하와 단둘이 있긴 무서웠다. 녹하가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하면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녀가 들어가지 않자 기홍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무게를 잡지 않는 왕비의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기홍은 왕비가 하고 싶은 대로 두기로 했다.

그녀는 꽃을 물에 데친 뒤, 밀가루 위에 계란을 깨트려 젓가락으로 빠르게 섞었다. 백천범이 음식을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진지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도 배우고 싶으십니까? 나중에 왕야께 직접 만들어 드려 보시어요.”

백천범이 입을 실쭉거리며 말했다.

“왕야께서 제가 만든 전을 드시겠어요? 배워서 언니에게 해 줄 거예요.”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소인은 그저 황송할 따름이지요.”

열 개 남짓의 화전이 노릇하게 익어 갔다. 바라만 보아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기홍의 손을 거치면 무엇이든 다 맛있어지는 듯했다.

완성된 화전을 방으로 가져가려는데, 학평관이 가쁜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왕비 마마, 얼른 돌아가셔야 합니다. 왕야께서 곧 대문 앞에 도착하십니다.”

백천범은 얼굴이 하얗게 질릴 만큼 깜짝 놀랐지만, 기홍보다는 과감하게 행동했다.

일단 화전을 몇 장 집어 소매 안으로 쑤셔 넣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기홍은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왕비가 도망치는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학평관이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토끼가 따로 없군그래. 어찌 저리도 빨리 달리신단 말인가?”

녹하는 방에서 나와 웃으며 말했다.

“빨리 도망치셔야 왕야께 들키지 않겠죠. 그래도 오늘 일은 어르신께서 왕야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예요.”

학평관은 자신이 녹하의 말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총 관리인인 자신이 왕야의 처소를 잘 살피지 않아 백 승상의 딸이 마음대로 회림각에 들어왔으니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곧장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 뿐, 소문을 내선 안 될 것이네. 녹하 양과 기홍 양이 난처해질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말게.”

그는 초왕을 모시는 두 시녀에게만큼은 예의를 차렸다. 비록 자신보다 더 늦게 이곳에 왔지만, 왕의 신임이 두터운 시녀들이었기 때문이다. 두 시녀의 생필품과 급료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수준이었으며 언제든 왕야와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한편 녹하는 아무리 조심한다고 한들 소문은 조금씩 퍼질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왕야께 미리 사실을 고해 왕비와 가깝게 지낸다는 오해를 미연에 방지할 생각이었다.

* * *

묵용감이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관 출신이었기 때문에 채찍질하며 말을 타는 게 맘이 더 편했다.

그가 대문을 들어오는 순간 그의 눈에 치맛자락을 잡고 뛰어가는 누군가가 보였다. 바람만큼이나 빨리 뛰어가는 자는 분명 회림각에서 나와 도망가는 모습이었다.

비록 먼 거리에서 빠르게 뛰어가는 모습이었지만, 그는 한눈에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천범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백천범이 자신의 처소에서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니 그다지 좋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입구에서 왕야를 기다리던 학평관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야, 오늘은 조금 일찍 돌아오셨군요.”

“그렇네.”

묵용감은 그가 백천범 얘기를 꺼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가식적인 미소만 지을 뿐 백천범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학평관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기억해 두었다가 조만간 그가 직접 해결해야 할 듯했다.

후원에 들자 기홍과 녹하가 그의 세안 수발을 들기 위해 물을 긷고 있었다. 세안 후 옷을 갈아입은 그는 서재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그때, 기홍이 화전을 내어 와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왕야, 방금 만든 화전이오니 한입 들어 보시지요. 몸의 열을 가라앉히는 데 아주 좋은 음식이옵니다.”

두 시녀를 아끼는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한나절이 지나 시장하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구나.”

기홍은 재빨리 젓가락을 올렸다. 부채꼴 모양의 노릇노릇한 화전이 접시 가득 쌓여 있는 게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간식거리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기홍은 음식을 놓는 것마저 세심히 신경 썼다. 그녀의 정성 덕에 음식을 먹기도 전에 눈요기가 되었다. 초왕은 한 조각을 입에 넣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훌륭하다. 달콤한 맛이 아주 좋구나.”

기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소인, 왕야께서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시는 데다 조금씩 더워지는 날씨에 공사다망하시니 화전이 몸에 좋을 거라 생각하였습니다. 소인을 보셔서라도 조금 더 드시지요.”

묵용감이 두 시녀를 아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온순한 데다 사리 분별이 뛰어나고 충성심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성가시게 한 적이 없었고, 늘 자신의 말을 잘 따랐다.

그는 군영에 가 있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신의 하인들에게도 엄격하게 대했지만, 여린 두 시녀들에게만큼은 정을 아끼지 않았다. 기홍과 녹하는 다른 집 시녀들과 비교했을 때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었다.

그만큼 그들을 신임하는 묵용감은 황제께서 하사하신 선물이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옷감, 작은 장신구 등을 대부분 그들에게 주었다. 지극정성을 다해 시중을 드는 일이 헛된 일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기홍의 말대로 한 조각을 더 집어 들었다.

“올해 회화나무 꽃이 일찍 피었구나. 이리 빠른 절기에 화전을 먹다니. 갓 딴 꽃으로 만든 것이더냐?”

“예, 아침 이슬이 맺혔을 때 딴 싱싱한 꽃으로 만들었사옵니다.”

“꽃을 딸 땐 조심하거라. 떨어지지 말고.”

“그럼요, 왕비 마마께서…….”

자신도 모르게 말실수를 해 버린 기홍은 깜짝 놀라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녹하만큼 노련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크지 않았다. 특히 묵용감에게 더욱 그런 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어떤 일도 숨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일은 왕비를 보호하고자 어쩔 수 없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허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탓에 도리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묵용감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왕비가 왜? 설마 왕비가 꽃을 딴 것이냐?”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기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나무에 올라가 따신 꽃이옵니다.”

그녀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

“왕야, 소인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녹하는 이 일과 관련이 없으니 저만 벌하여 주시옵소서, 왕야.”

묵용감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떤 죄를 범하였더냐?”

“소인이 왕비 마마를 회림각으로 모셔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왕비를 오라 한 것이냐?”

“소인, 어제 화전을 만들어 드리겠다 말을 꺼내는 바람에 왕비 마마께서 기대가 크셨습니다. 하여 소인께 왕야의 일정을 물으시고는 오늘 아침 왕야께서 출타하시자마자 이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 일정까지 알아봤겠다. 그의 낯빛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너는 나의 시녀인가, 왕비의 시녀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