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마침 묵용감의 침상 정리를 마치고 나온 기홍은 방 앞에서 백천범이 녹하에게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깜짝 놀라 다급히 왕비를 불렀다.
“왕비 마마, 일찍 오셨군요.”
백천범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이 실처럼 가느다래질 만큼 함박웃음을 지었고, 다정하게 기홍의 손을 잡았다.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은 드셨어요?”
기홍이 대답했다.
“왕야께서 방금 막 출타하시어 아직 먹지 못했사옵니다. 왕비 마마께서는요?”
“오늘 특별히 언니와 아침을 먹으려고요.”
백천범은 기홍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제 주신 옷은 아직 빨지 못했으니 깨끗이 빨아서 다시 가져다 드릴게요.”
“이곳에 오고 싶으시면 가져다주셔도 좋고, 사람을 시켜 보내 주셔도 좋습니다. 마마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녹하는 그들의 대화가 우스웠다.
“기홍아, 회림각에 외부인을 들여선 안 된다는 규율을 잊은 거야? 학평관 어르신께서 보시면 큰일 날 테니 빨리 왕비 마마를 보내 드리는 게 좋을 거야.”
기홍도 조금은 난처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왕야가 알게 되어 왕비에게 해를 입힐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른 아침부터 달려온 백천범의 얼굴에는 기대가 가득 차 있었기에 그녀는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백천범은 자신이 내린 결정을 꿋꿋이 따르는 편이었다. 물론 묵용감이 무섭긴 했지만, 지금은 집에 없으니 그리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회림각에 눌어붙어 있겠다고 한들 명목상 왕비였으니 아랫사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녹하 언니, 저는 왕야께 시집온 정실인데, 부군의 처소에 오면 안 되는 것이어요?”
정실이라는 말은 어젯밤 녹하가 꺼낸 표현이었다. 그녀는 백천범이 이 말로 자신의 입을 닫게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만일 자신이 했던 말이 왕야 귀에 들어간다면, 그녀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여운 계집아이인 줄 알았더니 심보가 고약했다.
분위기가 굳어지자 기홍이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를 해야 하니 그만들 하셔요. 왕비 마마, 어서 방 안으로 드시지요.”
그 자리에 선 채 꼼짝 않는 녹하에게 기홍이 충고했다.
“너도, 참. 어린 왕비 마마와 왜 그리 싸우려 드니? 엄연히 왕야의 정비이신데 체면 좀 세워 드려.”
녹하는 늘 선량하기만 한 기홍의 태도가 답답했다.
“다 널 위해서지. 왕야께서 아시는 날엔 정말 큰코다칠 거야.”
“나도 네가 날 위해서 그러는 거 알아. 그렇지만 이번 한 번만, 응?”
기홍은 녹하를 달래며 억지로 방으로 끌어당겼다. 결국 못 이기는 척 백천범의 뒤를 총총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기홍은 왕비에게 쌀죽과 짠지, 찐만두 등으로 차린 아침상을 내어 드렸다. 그녀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마마, 소인이 평소 먹는 대로 차려 온 것이니 부디 노여워 마시옵소서.”
노여워하다니! 이미 충분히 진수성찬이었다. 백천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따뜻한 음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훌륭했다. 음식에선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고,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분히 훌륭해요. 전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어요.”
그녀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만두 하나를 집어 곧장 입에 갖다 댔다.
그녀는 이렇게 뜨거운 음식을 먹는 게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입이 데일 수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을 정도로 말이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자 만두에서 뜨거운 육즙이 흘러나왔다. 어찌나 뜨거운지 그녀가 꽥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기홍이 그녀에게 찬물을 건네주었다.
“얼른 뱉으시고 찬물을 입에 머금고 계시어요, 마마.”
그 말에도 백천범은 만두를 뱉지 않았다. 향긋한 고기소를 먹지 말고 뱉으라니. 그녀는 입안의 김을 내보내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아이어요, 담깐이면 다 식을 거여여.”
허둥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녹하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혀가 데다 못해 익겠습니다. 차라리 얼른 씹어 삼키시지요!”
기홍이 그녀를 한 대 때리며 말했다.
“너 정말! 안타까워하지는 못할망정 왕비 마마를 비꼬는 말이나 하다니.”
백천범이 후후 거리며 입김을 몇 번 더 내보내자 조금씩 괜찮아졌다. 하지만 혀가 약간 마비된 듯했다. 둔한 느낌에 말을 빨리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아예 말을 하지 않고 먹는 데만 전념했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기홍의 음식 솜씨에 감탄했다.
백천범이 실없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자 기홍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왕비 마마, 어찌 계속 소인을 보시는 것이옵니까?”
“언니가 예뻐더요. 데가 남다였다면 언니한테 장가들었쓸 거예여.”
그녀가 작은 입으로 잔망스러운 말을 늘어놓자 녹하는 기홍의 몸에 부딪혀 가며 더욱 크게 웃었다. 녹하가 작은 소리로 기홍에게 말했다.
“우리 왕야께서 꽤나 괜찮은 혼인을 하셨네. 데리고 장난치시기에 아주 좋으시겠는걸.”
그 말에 기홍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허튼소리 그만해. 왕비 마마께 장난이라니.”
녹하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너한테나 왕비시겠지. 이 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니?”
백천범은 급하게 먹다가 점차 먹는 속도를 늦췄다. 여유를 가지고 즐기려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그녀가 입맛을 다시면서 끝 맛을 음미했다. 짠지조차도 유난히 맛있었다. 그녀가 기홍에게 물었다.
“언니, 이 짠지도 언니가 만든 것이어요?”
“예, 왕야께서 좋아하셔서 매년 만들고 있습니다.”
“다음에 저도 좀 가르쳐 주셔요. 반찬이 없을 때 참으로 좋을 것 같아요.”
기홍은 반찬이 없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백 승상가의 따님, 지체 높으신 왕비 마마께서 아무리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해도 음식과 옷이 부족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왕비 마마께서 드시고 싶다면 소인이 챙겨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자주 하는 음식이니까요.”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느라 녹하가 밖으로 나가는 것도 보질 못했다. 녹하가 문 앞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학평관 어르신 오셨습니까?”
깜짝 놀란 기홍은 순간적으로 백천범을 쳐다봤다. 어린 왕비는 오히려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짠지를 입에 넣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녹하가 발을 걷어 올리자 학평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백천범이 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그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명색이 왕비 마마였기에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비 마마, 밤새 평안하셨사옵니까?”
돌아가지 않기로 작정한 그녀는 이참에 제대로 왕비 행세를 하려 했다.
“네, 식사는 하셨습니까?”
녹하가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만나는 사람마다 밥 먹었냐고 물어볼 작정이람?
“소인, 방금 전에 먹었사옵니다.”
학평관은 고개를 들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기홍을 쳐다봤다.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회림각이었고, 백천범은 명백히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백천범은 자신 때문에 기홍이 난처해질까 봐 급히 입을 뗐다.
“기홍을 쳐다본다고 한들 소용없습니다. 만두 찌는 냄새에 제 발로 찾아온 것이지, 언니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만두가 아주 맛이 좋으니 관리인께서도 한번 맛보시지요?”
학평관은 텅텅 빈 접시를 보며 생각했다.
‘먹을 게 있어야 맛을 보든 말든 하지…….’
옆에 서 있던 녹하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어머나, 우리 왕비 마마께서 아주 용한 코를 가지셨습니다. 제아무리 혈통이 좋은 개라 한들 냄새를 그리 잘 맡지는 못할 터인데…….”
기홍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백천범도 녹하가 자신을 개에 비유해 체면을 깎아내리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개의치 않고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학평관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분명 지난번 저택의 규율을 왕비에게 설명하였고, 그 덕에 그동안 무탈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슨 계략이란 말인가? 왕비가 혹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왕야의 입장에서 생각하다 보니 백천범이 비밀스런 목적을 가지고 시집을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 회림각에서 소란이 벌어지는 날엔 곤장으로 끝날 리 없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왕비 마마, 소인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이곳 회림각은…….”
“회림각이 왕야의 처소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야께서는 지금 안 계시질 않습니까? 회림각이 비어 있을 때 둘러보는 것도 안 될 일입니까?”
“그게… 저택에는 지켜야 할 규율이 있는 법이지요. 외부인은 회림각에 드실 수 없사옵니다…….”
“내가 외부인이란 말입니까?”
백천범은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왕야께 시집온 정실입니다. 이미 첫날밤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지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 방 안의 세 사람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왕비가 어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이런 말을 뱉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남녀 사이의 정에 대해 하나도 아는 바가 없어 말뜻에 담긴 부끄러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쨌든 그녀의 말에 반박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왕비였고,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외부인이라고 하는 것 또한 좋게 들릴 리 없었다. 매우 난처함을 느끼던 학평관은 눈을 내리깐 채 방법을 생각했다.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하자 백천범은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초왕의 저택은 하인들도 그 위력이 대단할 줄 알았는데, 백 승상의 집과 비교해 보면 견줄 수도 없을 만큼 아무것도 아니었다.
백 승상의 하인들은 초왕의 저택과는 달리 인사치레조차 없었다. 화를 내거나 음모를 꾸민 적도 몇 차례나 있었다. 하지만 초왕의 하인들은 마음속으로는 백천범을 반기지 않을지언정 겉으로는 늘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잠시 뒤에 언니들이 화전을 만든다던데, 학 관리인도 함께 만드는 게 어떻습니까? 맛이 아주 좋을 것입니다.”
그녀는 똑똑히 ‘언니들’이라는 표현을 써 녹하를 ‘언니’에 포함시켰다. 만약 누군가 추궁을 한다 하더라도, 기홍 혼자 책임을 지진 않을 것이다.
그녀의 의도를 모를 리 없던 녹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린 계집아이가 자신을 공범으로 몰아갔지만, 자신 또한 기홍과 절친한 사이이니 죄를 뒤집어쓴다 한들 할 말은 없었다.
학평관은 더욱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린 왕비가 재빨리 돌아갈 생각은커녕 화전까지 기다리고 있다니…….
그는 창밖을 한 번 바라본 뒤 말했다.
“아직 시기가 일러 꽃이 피지 않았사옵니다. 왕비 마마, 화전은 무리일 듯하옵니다.”
“피었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보이던 나무마다 하얀 꽃이 만개했던걸요. 향기가 아주 좋더군요.”
보아하니 왕비는 화전에 온 정신이 팔려 있는 듯했다. 학평관은 그녀가 화전을 먹지 않는 한 이곳을 떠날 계획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왕야가 돌아오기 전 꼭 이 골칫거리 왕비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