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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0)화 (10/1,192)

제10화

그는 그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녀가 두 눈이 시뻘게지도록 울며 남월각으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이곳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좀 전에 일어난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새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건망증이 참으로 심한 계집아이라 생각했다.

녹하는 그의 곁에서 감히 아무 말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왕야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펴보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기홍을 원망했다. 목욕을 도와드린 뒤 곧바로 보내드리지 않고, 음식까지 내어 드리다니.

묵용감은 잠시 더 살펴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녹하도 곧장 뒤를 따라 침소에 드는 왕야의 시중을 들었다.

* * *

이곳 행랑채에서 음식을 먹으니 백천범은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거리며 기쁜 마음을 표출했다.

“언니, 이 과자는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 게 맛이 참으로 좋아요. 이것도 언니가 만든 것이어요?”

“예, 소인 간식거리 만드는 것을 좋아하여 계화떡, 백합 과자, 녹두병 등을 자주 만들지요. 아, 후원 회화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내일 화전을 만들 생각이옵니다. 왕비 마마께서도 드셔 보시겠습니까?”

“정말이요? 또 와도 돼요?”

뛸 듯이 기뻤던 백천범은 눈이 실가락지처럼 가느다래졌다. 정신을 잃을 만큼 놀랄 일을 겪은 뒤에 이리도 좋은 일이 생길 줄이야. 향긋한 죽과 함께 과자를 먹을 수 있는 것도 모자라 내일 화전까지 만들어 주겠다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었다.

기홍의 마음이 순간 두근거렸다. 이미 꺼낸 말이었지만, 회림각은 다른 이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만일 왕야가 아시기라도 하는 날엔 그녀가 책임을 져야 했다.

그녀가 주저하는 사이 백천범이 크게 기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정말 부처님같이 자비로운 사람이에요. 언니를 만나게 된 건 정말인지 행운 같은 일이에요.”

이리도 자신을 칭찬하니 기홍은 내뱉은 말을 거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마 어린 왕비에게 실망을 안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백천범은 죽을 크게 한 술 떠먹고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언니, 헌데 왕야께서는 매일 조정에 나가시는지요?”

“예, 왕야께서는 참으로 성실하신 분이시라 인시寅時(오전 3시~5시 경)에 기침하시어 묘시卯時(오전 5시~7시 경)에 조정에 가시옵니다. 그리고 진시辰時(오전 7시~9시 경)에는 조정에서 돌아오시지요.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하십니다.”

“잘되었네요.”

백천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왕야가 계시지 않을 때 올게요.”

“…….”

어린 왕비가 이리 결정을 내리니 기홍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왕비가 왕야를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녹하는 묵용감의 수발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발을 걷어 올려 보니 왕비가 아직도 가지 않고 이곳에 있었다.

녹하는 기홍과 달랐다. 또렷한 외모만큼 성격도 냉철했다. 백씨 집안의 딸이 초왕에게 시집을 온다는 건 그녀가 온갖 시련을 겪을 것이란 걸 의미했다. 다들 겉으로는 백천범에게 상냥히 대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 혼사는 머지않아 옛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겉으로 굽실거리는 것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녀는 충성심이 강한 시녀였다. 자신의 주인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녀 또한 싫었다. 그녀가 가볍게 기침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니, 왕비 마마께서 아직도 계셨군요. 오늘은 여기서 묵으실 예정이시옵니까?”

백천범은 그동안 눈칫밥을 먹으며 자라 왔기 때문에 작은 변화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 눈을 크게 뜬 녹하의 눈매가 왠지 무섭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쭈뼛거리며 기홍을 바라봤다.

“언니, 오늘 언니랑 같이 자도 될까요?”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녹하는 의아함에 눈썹을 치켜떴다. 왕비가 설마 말뜻을 못 알아챈 것인가?

기홍도 답하기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완곡한 어투로 말했다.

“어찌 왕비 마마께서 누추한 소인의 방에서 묵으신단 말입니까? 남월각으로 돌아가시어요, 마마. 게다가 소인은 밤에도 왕야를 모셔야 하기 때문에 마마께서 편히 주무실 수 없으실 것이옵니다.”

백천범은 조금 실망했지만 과한 요구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학평관이 말해 주었듯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회림각에서 자신이 묵는다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녹하는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회림각에 묵으시려거든 이곳은 아니 될 일이옵니다. 왕야의 침소에 드시지요. 마마께서는 막 혼례를 치른 정실이시오니 응당 부군과 함께 침소에 드셔야 합니다.”

이는 백천범을 깜짝 놀라게 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초왕과 함께 침소에 들다니. 생각만으로도 절망적이었다.

그녀는 남월각으로 돌아가기 위해 빠르게 의자에서 내려왔다. 아쉬운 마음에 그녀는 기홍을 다시 불렀다.

“언니.”

기홍이 녹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정말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왕야께서 들으시기라도 한다면 벌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그녀는 백천범을 달랬다.

“마마, 녹하가 한 허튼소리는 신경 쓰지 마시어요. 소인 왕비 마마를 모셔다 드릴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녹하에게 살갑게 대하고 싶었던 백천범은 미소 띤 얼굴로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녹하 언니 말이 맞아요. 저는 왕비이니 부군인 왕야와 함께 침소에 들어야 하지요. 지금은 제가 아직 작고 어려서 왕야께서 굽어살펴 주시는 것이겠지요. 언니들께서 고생이 많으시어요.”

녹하가 왕비의 말에 답했다.

“아니옵니다. 마마, 고생이라니요. 시녀가 왕야의 시중을 드는 것은 당연한 도리일 뿐이옵니다.”

백천범은 녹하의 대답을 듣고, 일전에 기홍과 녹하가 초왕의 첩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졌다. 녹하는 상관없었지만 기홍은 조금 안타까웠다. 이토록 좋은 언니가 어찌…….

그녀는 기홍이 낭군을 찾길 바랐다. 한평생을 함께할 짝을 만나는 것도 인생의 큰 복인데, 왕야의 시첩侍妾을 하고 있는 그녀가 참으로 안쓰러웠다.

기홍은 그녀의 말에 담긴 뜻을 알지 못한 채 무수리를 불러왔다. 그리곤 남월각으로 가는 왕비를 배웅했다.

두어 걸음 내디뎠을까, 백천범이 다시 몸을 돌렸다.

“언니, 한 번만 안아 주시어요.”

백천범은 기홍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있는 힘껏 그녀를 껴안았다. 기홍에게서 그윽한 향기가 났다. 백천범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언니 몸에서 아주 좋은 냄새가 나요.”

기홍은 왕비의 뜨거운 대우에 조금 부끄러웠다. 지체 높고 위엄 있으셔야 할 왕비 마마가 노비에게 이리 응석을 부리다니, 응석꾸러기 막내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백천범이 자신을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이런 어린아이가 얼마나 놀랐으면 바지에 실수를 다 했을까. 기홍은 백천범을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쉬시지요, 마마.”

백천범은 한 걸음마다 세 번씩은 뒤돌아보며 남월각으로 향했다.

그녀는 정말인지 기홍이 너무나 좋았다. 유모를 제외하고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을 꼽으라면 기홍을 꼽고 싶었다. 사람이 주는 따스한 온기가 부족했던 그녀였기에 자그마한 환대에도 간과 쓸개까지 모두 내줄 기세였다.

* * *

달조차 구름 뒤에 숨어 한 줄기 빛도 새어 나오지 않는 깊은 밤이었다. 어디에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등불을 든 무수리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오늘 저택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때문에 집안의 모든 이들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전에 죽었으니 곧바로 귀신이 된 건 아니겠지? 죽임을 당해 원한이 크면 귀신이 된다던데…….’

무수리는 고개를 돌려 백천범을 바라봤다. 소문이 퍼지는 건 일순간이었다. 왕야가 한 말은 그 의미가 분명했다. 왕비가 저지른 짓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당당히 걷는 백천범의 모습에서 다른 속셈을 읽을 수는 없었다. 단지 백 승상 댁 따님일 뿐, 나이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극악무도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또다시 중얼거렸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귀신님, 혹여 복수를 하려거든 원수를 잘 찾으셔야 합니다. 저는 오른쪽에, 살인자는 왼쪽에 있으니 절대 헷갈리시면 아니 됩니다.’

* * *

이튿날, 백천범은 아침 일찍 일어나 왕야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호위무사 둘을 거느린 묵용감이 말을 타고 집을 나서자 그녀는 기쁜 마음에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멀리 사라진 뒤, 그녀는 나무 뒤에서 나와 잽싸게 회림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평소 조심성이 많고 신중한 그녀였기에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 않았지만 기홍을 보고 싶은 마음과 화전의 유혹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홍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설령 그녀를 도와 일을 한다고 해도 좋았다.

그녀는 기억력이 좋았다. 특히 길을 잘 외웠다. 이 또한 연습을 거듭한 끝에 얻어진 재주였다. 비록 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지만, 그녀는 순조롭게 기홍의 방을 찾았다. 백천범은 문을 두드리며 조용히 기홍을 불렀다.

“언니, 언니! 저 왔어요.”

문을 연 것은 기홍이 아닌 녹하였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아니, 왕비 마마께서 이리도 이른 시간에……. 마마, 왕야를 찾아오신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를 어쩌지요. 왕야께서는 방금 막 나가셨습니다. 뛰어가신다면 아마 만나 뵐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

백천범은 녹하가 조금 무서웠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데다 무서운 입 모양을 하고 쌀쌀맞게 말했기 때문이다. 기홍이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어려서부터 시녀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며 자라 왔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그녀는 몸을 낮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녹하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 기홍 언니를 만나러 왔어요.”

문 앞을 막고 있는 그녀는 백천범을 들여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기홍이는 왜 찾으시옵니까?”

백천범이 입술을 한 번 핥고는 작고 가지런한 이를 내보였다.

“언니가 오늘 화전을 만든다고 저에게 와서 좀 도와 달라 했거든요.”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을 했다.

녹하는 도리어 눈썹을 더 치켜뜨며 말했다.

“기홍이가요? 목숨이 여러 개가 아니고서야 어찌 감히 왕비 마마에게 도와 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제가 청한 것이어요.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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