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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9)화 (9/1,192)

제9화

“기홍아, 왕비에게 충분한 양의 죽을 내어 오너라.”

기홍은 작게 대답한 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상을 차리러 갔다. 사실 죽을 끓일 필요도 없었다. 왕야가 오늘 죽을 드시지 않아 주방에 한 솥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홍이 빠르게 죽을 내어 왔고, 묵용감은 백천범에게 의자를 내어 주었다. 그녀는 사양치 않고 자리에 앉더니 국자로 크게 죽을 떠 후루룩후루룩 들이켰다.

기억 속 고소한 그 맛이 분명했다. 따뜻한 죽이 배에 들어가니 오장육부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근심 가득했던 그녀의 두 눈은 이내 편안해졌고, 축 처진 입꼬리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묵용감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죽 한 그릇에 불과할 뿐인데 저리도 맛있게 먹는단 말인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백천범은 금세 세 그릇을 먹어 치웠고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를 닦았다. 하지만 남은 죽에 여전히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더 들고 싶거든 그리하시오.”

“아닙니다. 저의 유모는 모든 것에는 정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정도를 넘어서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한들 해를 가져온다고요.”

“맞소. 현명한 유모를 두었구려.”

묵용감은 그녀를 잠시 살펴보고는 말을 이었다.

“자, 그럼 가십시다.”

백천범은 느릿느릿 일어났다. 작은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그녀의 유모는 생을 마감하더라도 다음 생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다. 불안한 가운데 뜨거운 기운이 다리 사이를 천천히 스쳐 갔다.

초왕은 두 눈으로 모든 상황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당당한 표정과는 달리 바지에 실수를 한 백천범을 말이다.

백천범은 수치심에 죽고 싶었다. 땅에 머리를 박고 죽는 게 차라리 더 나을 듯했다. 열셋의 어린 그녀였지만 그래도 체면은 있는 나이였다. 열셋이나 되어서는 바지에 오줌을 쌌단 소문이 퍼지면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까…….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웅크려 앉아 필사적으로 바닥에 고인 실수를 가리려 애썼다.

초왕의 뒤를 따르던 기홍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어린 왕비가 바지에 실수를 하다니, 어찌 해야 좋단 말인가?

일순간 정적이 흘렀고, 세 사람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분위기였다.

기홍이 먼저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말했다.

“왕야, 소인이 왕비 마마를 도와 뒤처리를 하겠사옵니다.”

초왕은 손을 한번 휘두르고는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서 데려가거라. 냄새 한번 고약하구나.”

기홍은 백천범을 일으키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 마마, 소인과 함께 가시지요.”

그녀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선녀처럼 아름답고, 목소리까지 부드러운 여인이 백천범의 눈에 비쳤다. 마치 역경에 빠진 이를 구원하러 온 구세주 같았다.

백천범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기홍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다리를 바짝 붙이고 걷느라 모양새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묵용감은 의자에 앉아 백천범이 실수한 흔적을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겨우 이 정도의 담력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아니라면 살인자는 누구란 말인가?

백천범이 들어오기 전엔 늘 평온하기만 하던 집이었다. 그녀가 시집을 온 후 연이어 두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그 둘 모두 그녀의 시녀이니 분명 남월각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한 짓이 정녕 아니라면, 살인자는 유모나 시녀 중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리던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과연 백 승상의 집에서 보낸 사람다웠다. 감히 자신의 공간에서 사람을 죽이다니!

사실 그는 백천범을 해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얼마 전 초왕에게 시집온 정실이었고, 혼인을 명한 황제의 체면도 살펴야 했기에 단지 겁을 주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놀라게 해도 이리 혼비백산하여 황당한 일을 저지르다니.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파르르 떨며 나가던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은 필시 우는 게 틀림없었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허약해 보이는 몸집이 조금은 가련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심하게 놀라 자신의 처소까지 더럽히는 실수까지 했는데, 어떻게 이 일을 계속 추궁할 수 있단 말인가?

* * *

묵용감의 수발을 드는 시녀 기홍과 녹하는 조금은 특수한 신분이었다. 묵용감은 그 둘을 선발한 뒤, 시중들기 편하도록 행랑채에 묵게 했다.

기홍과 함께 행랑채 안으로 들어간 백천범은 방 한가운데 쭈뼛쭈뼛 서서 분주히 움직이는 기홍의 모습을 바라봤다.

기홍이 뒤를 돌아보고는 그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소인 왕비 마마께 대접이 소홀하였습니다. 어서 여기 앉으시지요.”

백천범이 얼버무리며 말했다.

“언니, 속바지가 젖어 앉을 수가 없어요.”

바지가 젖은 채로 자리에 앉는 게 더 곤욕이라는 걸 이해한 기홍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물을 길어 온 뒤, 왕비의 몸에 맞는 연한 색 치마를 찾아 가져다주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새로 만든 치마이옵니다. 우선, 이 치마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남월각으로 돌아가셔서 왕비 마마의 옷으로 갈아입으시지요.”

백천범은 기홍에게 정말 미안했다.

“새로 만든 옷을 저에게 주다니요. 언니가 입던 헌 옷을 입겠어요.”

“아니 되옵니다. 왕비 마마같이 고귀하신 분께서 소인의 헌 옷을 입으시다니요.”

그녀는 옷을 들고 백천범을 부축해 일으켰다.

“소인, 마마의 목욕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은 참으로 오랜만에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기쁘면서도 새삼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언니한테 그런 수고를 끼치다니요.”

기홍은 난감했다.

“마마, 저에게 언니라고 부르시면 아니 되옵니다. 왕야께서 들으시면 화를 내실 것입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화를 내실까요?”

“그렇사옵니다. 마마께서는 왕야의 왕비이십니다. 그런데 한낱 노비가 왕야의 누이가 되는 것이지 않사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백천범은 그러한 이치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기홍이 너무나 좋았다. 이곳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늘 외톨이였기 때문에 기홍처럼 따뜻한 언니를 두고 싶었다.

“아무도 없을 때만이라도 그리 부르면 안 될까요?”

그녀가 가여운 눈빛으로 기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가 이리도 잘 대해 주는데… 언니라고 부르면 저도 기분이 참으로 좋아요.”

기홍은 그녀의 가련한 눈빛을 보고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왕비가 욕통 안에 들어가도록 부축하며 그녀가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소인을 예뻐해 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이곳에도 지켜야 할 규율이 있는 법이지요. 왕비 마마께서 마음속으로 그리 부르시는 것은 괜찮사옵니다만 다른 이가 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백천범은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 기쁜 마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어요, 언니.”

백 승상이라는 자는 교활하기 짝이 없고 그의 자식들도 하나같이 지독하다고 들어 온 기홍이었다. 그런 다섯째 딸 백천범의 가련한 모습이 그녀는 참으로 신기했다. 항상 괴롭힘을 당해 온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 * *

백천범은 거의 몇 년 만에 개운한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일곱 살 때쯤인가, 그녀는 목욕간에 숨어 홀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누가 꾸민 짓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 창문을 열고 불이 붙은 폭죽을 집어 던졌다. 깜짝 놀라 발가벗은 채로 목욕간을 뛰쳐나온 그녀는 밖에 무리 지어 서 있던 사내아이들과 맞닥뜨렸다.

하나같이 등불을 들고 있어 주변은 꼭 대낮처럼 훤했고, 백천범의 모습을 본 사내아이들이 배꼽을 잡으며 신나게 웃어 댔다. 백천범은 악몽 같았던 그날 일이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알몸으로 씻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옷을 입은 채 몸을 닦거나 속바지를 입고 탕에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기홍이 상냥하게 시중을 드니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 다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기홍이 등을 가볍게 닦아 주자 마음이 따뜻해졌고, 마음속으로만 부르려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언니.”

기홍은 손길을 멈추고 왕비에게 물었다.

“소인이 너무 세게 닦아 드렸나 봅니다. 불편하시옵니까, 왕비 마마?”

“아니요. 딱 좋습니다. 참으로 편안한걸요.”

“허면,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기홍은 일부러 아주 천천히 씻겨 드리는 중이었다. 그녀도 묵용감이 백천범을 정말 해하려 한 것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왕야의 화가 누그러질 테고, 그렇게 된다면 이번 일을 무탈히 넘길 수 있었다.

백천범이 잠시 고민한 후에 말했다.

“언니, 전 이번 생에는 복이 없어 곧 떠날 것 같아요. 그러니 그동안 모아 왔던 것들을 언니한테 주고 싶어요.”

기홍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마음이 아려 왔다. 자신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 대단한 일을 해 준 것도 아닌데, 이리도 정을 주시다니.

왕야가 왕비를 어여삐 여기지 않아 저택 안의 그 누구도 왕비 곁에 다가가지 못했고, 심지어는 왕비가 남몰래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왕비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그녀 또한 이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왕비를 만난 후로 마음속에 있던 의심이 모두 사라졌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초왕의 저택으로 보내졌는데, 왕야께서도 정을 주지 않으시니 참으로 가여운 아이였다.

“왕비 마마, 무슨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시어요. 곧 떠나다니요. 왕야께서는 그저 왕비를 골리시는 것이옵니다. 왕야께서 엄격하시긴 해도 마음은 선하신 분이옵니다.”

“왕야께서 절 안 죽이실까요?”

“당연하지요. 마마께서는 왕야와 정식으로 혼례를 치른 왕비시옵니다. 왕야께서 다른 이는 해하실 수 있어도, 왕비 마마만큼은 해하지 않으실 것이니 그런 말씀은 넣어 두셔요.”

기홍이 믿음직스러웠던 백천범은 초왕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 거란 그녀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 * *

오랜 시간 대청에 앉아 있던 묵용감은 느릿느릿 뒤뜰로 향했다. 녹하가 그의 곁을 따르며 조용히 물었다.

“왕야, 침소에 드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묵용감은 짧게 대답한 뒤, 고개를 들었다. 불이 환하게 켜진 방에서 누군가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기홍과 녹하가 묵는 방인데, 녹하는 이곳에 있었다. 그렇담 기홍은 누구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란 말인가?

순간 궁금해진 그는 몇 걸음 다가가 창살에 벌어진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팔선상에 기대앉은 백천범이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 큰 소매통 밖으로 팔뚝을 훤히 드러내 놓은 채 한쪽 손으론 과자를 집어 들고, 다른 한쪽 손으론 죽 그릇을 뒤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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