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묵용감도 진작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시신이 쓰러진 각도와 석가산의 높이, 착지 지점을 모두 고려해 봤을 때 단순한 실족사는 아니었다.
실족사였다면 떨어지는 순간 크게 당황해 본능적으로 표면의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발버둥을 쳤을 것이다. 그렇게 떨어졌다면 시신이 석가산 쪽에 더 붙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의복 위에 긁힌 흔적들이 생길 것이고, 신발도 도중에 벗겨져야 했다.
그러나 청수의 몸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시신이 떨어진 지점도 석가산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분명 누군가 있는 힘껏 그녀를 밀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묵용감은 모여 있는 이들의 얼굴을 일일이 훑어보며 물었다.
“누가 이 자를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모두 말해 보거라.”
모두 화를 자초할까 두려워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만일 지금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가, 나에게 발각되는 날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얼굴이 굳어지자 즉각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백천범의 모습이 드러났다.
묵용감이 애매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왕비는 그리도 먼 곳에 서서 무얼 하는 거요. 내가 잡아먹을까 봐 두렵기라도 한 것이오?”
백천범은 반 박자씩 반응이 느린 자신이 답답했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을 때 자신도 재깍 꿇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탓에 지금은 더 눈에 잘 띄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꾸물거리며 묵용감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안녕하시옵니까, 왕야.”
“내가 안녕하겠습니까?”
묵용감이 입꼬리를 올린 채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이곳에 온 후로 사흘 동안 두 명이 죽었소. 그것도 자네의 시녀가 말이오. 왕비의 명에 살기가 있나 보오!”
백천범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왕비는 오늘 이 시녀를 본 일이 있소?”
백천범은 곁눈질로 청수의 시신을 한 번 쳐다본 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있습니다.”
“언제?”
“대략 이각 전쯤 보았습니다.”
묵용감이 턱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순시를 돌던 머슴은 일각 전에 시신을 발견했는데, 이각 전에 시녀를 만났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 애를 본 사람은 왕비인 게로군.”
무릎을 꿇고 있던 자들은 하나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귀를 쫑긋 세운 채 백천범의 대답을 기다렸다.
백천범은 큰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저는 청수를 밀지 않았사옵니다!”
묵용감이 짧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언제 왕비가 밀었다고 하였소?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 아니오?”
묵용감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시녀를 때리든 죽이든 내 알 바 아니오. 헌데 잊은 것이 하나 있소. 이곳은 나의 집이오. 누구를 죽이려거든 밖에서 죽이시오. 내 집을 더럽힐 생각 말고.”
사실 어떠한 증거도 없이 죄를 뒤집어씌운다면, 억울함에 울며불며 난리를 치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방방 뛰며 울기는커녕 그 자리에 서서 평온하게 경위를 설명했다.
“왕야, 먼저 제 말을 들어 주시어요. 이각쯤 전에 석가산에 올라 바람을 쐬며 달을 보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수가 왔고, 저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청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석가산에서 내려와 정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간단히 설명했지만 그녀의 말은 허점투성이였다.
묵용감은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어쩜 이리도 순진무구한 척을 할까 싶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계획적이었다. 묵용감의 체면을 깎아내리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적극적으로 발뺌을 했다. 그 어떤 살인자가 이리 많은 사람 앞에 당당히 서서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참으로 감정을 잘 억누르는 계집이었다.
“이 말인즉슨, 본왕이 누명을 씌웠다?”
“그렇사옵니다.”
진지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가소로웠다. 아주 떳떳하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묵용감은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자들과 그녀의 자그마한 몸집을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왕비가 시인을 하지 않으니 살인자는 분명 이들 중에 있을 것이다. 가동은 듣거라. 모두 남월각으로 데려가 입구를 봉쇄하거라. 본왕이 모든 조사를 마치고 결정을 내릴 때까지 모든 이의 출입을 불허한다.”
가동이 명령을 받들었다.
“예, 왕야.”
백천범은 고개를 숙인 채 시녀들과 함께 남월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묵용감이 나지막이 말했다.
“왕비는 남으시오.”
백천범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슬며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곧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동이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데려갔고, 학평관은 사람들과 함께 청수의 시신을 옮겼다. 묵용감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왕비, 본왕과 함께 가십시다.”
“어, 어딜 가는 것입니까?”
백천범은 너무나 무서웠다. 초왕의 저택으로 온 뒤 그녀의 목숨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초왕이 그간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던 건 그럴만한 구실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가 한 말은 좋은 구실을 찾은 듯 단호해 보였다.
그녀가 온 후로 사람이 두 명이나 죽었고, 죽은 자들이 모두 그녀의 시녀이니 이를 핑계 삼아 책임을 지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초왕이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방금 왕비가 한 말 중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소. 본왕과 함께 회림각 대청으로 갑시다. 왕비가 설명을 좀 해 줘야겠소.”
결국 백천범은 오랜만에 다시 회림각에 발을 들였다.
이번 일로 묵용감은 성이 잔뜩 났다. 원래는 다시 한번 왕비를 받아들여 백여름 그 작자의 속셈을 캐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집은 너무나 악랄했고, 그가 인내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수도 없이 많은 자를 벤 그였지만, 무고한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눈앞에서 비열한 짓을 저지르는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었다.
대청에 다다르자 묵용감은 붉은빛을 띠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기홍이 따뜻한 차를 올렸다.
백천범은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우아한 자태의 기홍을 보는 순간 눈이 반짝였다. 그날 먹었던 향긋한 죽이 생각났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침을 삼켰다.
묵용감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물었다.
“왕비는 배가 고픈 게요?”
죽 생각에 잠겨 있던 백천범은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깜짝 놀라 대답했다.
“왕야께… 아, 예, 그러하옵니다.”
“괜찮소. 잠시 뒤 배불리 먹게 해 주리다.”
묵용감은 도포 자락을 걷어 올리며 느긋이 말했다.
“내 왕비에게 묻겠소. 한밤중에 남월각에 있지 않고, 석가산엔 무얼 하러 올라갔던 게요?”
“바람을 쐬며 달을 보러 갔습니다.”
“아무리 봄이라 해도 아직 밤엔 바람이 차니 오래 쐬면 고뿔에 걸릴 수도 있소. 병이 나고 싶은 게요?”
백천범은 마음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꺼내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저도 바람을 오래 쐴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늘은 보름이라 달이 크고 둥근 게 꼭 커다란 은쟁반 같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감상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 시녀도 달을 보러 간 것이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하, 백 승상 댁 사람들은 달 보는 걸 그리도 좋아한단 말이오?”
묵용감이 한쪽 입술을 치켜올리며 비웃었다.
“내일 조정에서 백 승상께 댁의 식구들이 달을 즐겨 보는지 꼭 물어보리다.”
“다른 이들도 그리하는지는 모르옵니다. 하지만 저는 간혹 그리하곤 합니다.”
“즐겨 보는 것이 아니라 간혹이라.”
묵용감이 다리를 탁 치며 말했다.
“간혹 하는 일인데 하필 사고가 났구려.”
그가 다리를 치는 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단연코 그녀가 죽인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쩌면 간접적으로나마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백천범은 자책감이 밀려왔다.
“한 가지 더 묻겠소. 그 시녀가 자리를 비켜 달라 하여 그대로 자리를 비켜 주었단 말이오? 그리도 시녀 말을 잘 듣는 것이오?
아까 뭐라 하시었소,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당신은 주인이고 그 애는 한낱 시녀일 뿐이오. 헌데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니. 대체 누가 주인이란 말이오?”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어조는 강해졌고, 목소리에도 냉기가 흘렀다. 백천범은 몸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왕야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저는 시집을 오기 전에도 주인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시녀와 유모들은 모두 마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제가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허면 그자들이 당신을 업신여겨 당신이 해한 것이 아니오?”
당황한 백천범은 놀라서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들었다.
“왕야, 억울하옵니다.”
“당신은 그간 천대를 받다 이곳에 보내졌고, 함께 온 몸종들은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소. 하여 당신을 소홀히 여기는 그들을 해한 것이 아니오? 지난번에 죽은 시녀도 당신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니겠소?”
백천범의 입이 더 크게 벌어지고 눈동자도 더 동그래졌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묵용감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어디 감히!”
꼿꼿한 자세로 고개를 들어 당당하게 고한 것도 잠시.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에 놀란 백천범은 다시 고개를 떨군 채 몸을 잔뜩 웅크렸다.
“내가 당신 말을 믿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말고, 당신의 악독한 마음을 탓하시오. 방금 배가 고프다고 하지 않았소? 무엇을 들겠소?”
흠칫 놀란 백천범은 크고 까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납작해진 입술은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사실 이리 보면 영락없는 아이에 불과했다. 축 처진 옅은 두 눈썹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 잔뜩 내려간 입꼬리까지. 작은 얼굴에 근심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제껏 묵용감은 상대가 여인이라는 이유로 눈감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견디기 어려웠다. 어린아이에게 손을 쓰는 것은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엇이 먹고 싶소?”
정신을 차린 백천범은 그의 의중을 그제야 알아들었다. 이생을 떠나는 먼 길을 가려면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한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기홍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기홍이 만든 죽을 먹고 싶사옵니다.”
묵용감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황천길을 가는데 죽 한 그릇이라니, 염라대왕을 만날 힘이나 있을지…….
“죽 한 그릇이면 되겠소?”
백천범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며 고민에 빠졌다. 마침내 세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세 그릇을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