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늘은 왜 자꾸 올려다보는 것이오?”
“아, 비가 오려고 해서요.”
백천범은 대답을 하고 난 뒤에야 아차 싶어 위쪽을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이내 묵용감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그녀는 펄쩍 뛰어올랐다.
묵용감은 굽힌 허리를 펴기 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민첩하게 백천범의 습격을 피했겠지만, 세상일은 늘 예상을 빗나가기 마련이었다.
퍽! 백천범의 이마와 묵용감의 턱이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묵용감은 턱을 감싸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도 이마를 감싼 채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심한 통증이 밀려온 묵용감은 묵직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계집아이의 머리였지만 참으로 단단했다.
그가 소리를 내자 백천범은 거의 경기를 일으킬 만큼 놀라 털썩 무릎을 꿇었다.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왕야.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묵용감은 턱에서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직접 말해 보시오.”
백천범은 더욱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께 아룁니다. 고, 곤장을 맞는 것은 제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 되옵니다. 왕야, 차라리 저를 감옥에 가두어 주십시오.”
묵용감은 적잖이 놀랐다. 곤장에 감옥까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만일 시녀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목숨을 거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백 승상의 다섯째 딸이었다……. 묵용감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일어나시오. 내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넘어가겠소. 다만, 다음번에 또 같은 일을 저지르거든 그때 함께 벌하겠소.”
“망극하옵니다, 왕야.”
백천범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그녀는 아직도 난처해하며 그에게서 멀찍하게 떨어져 섰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던 묵용감이 말했다.
“개미가 이사 가는 것을 보고 있던 것이오?”
“왕야께 아룁니다. 예, 그러하옵니다.”
묵용감은 그녀를 곁눈질로 흘겨보며 말했다.
“당신은 백 승상의 다섯째 딸인데 아무도 규율을 알려 주지 않았소? 당신은 엄연히 왕비인데 걸핏하면 왕야께 아뢴다고 하니, 모르는 이들이 들으면 하인이라고 착각할 거요.”
“왕야께…….”
백천범이 말을 하다 멈추었다. 사실, 그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저렇게 말하는 것이 이미 습관으로 굳어진 탓이었다.
백 승상의 집에서는 마님이나 다른 자식들의 말에 대답할 때 ‘누구께 아룁니다’를 붙이지 않으면 정통으로 따귀를 얻어맞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녀도 그 집의 딸이었지만, 사실 시녀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초왕이 포악하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는 신중한 행실만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신중을 기했고, 예의를 갖췄다. 다소 과하더라도 부족하지는 않으려 늘 애썼다.
“왕야, 제가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묵용감은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
“내 이 집의 가장인데, 왕비가 내 앞에서 스스로를 ‘제가’라 칭하는 게 이치에 맞소?”
백천범은 눈만 끔벅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에게 아무도 규율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강제로 신부 가마에 태워졌고, 곧장 초왕의 집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백천범의 장점 중 하나는 모르는 것은 바로 물어본다는 것이었다.
“왕야, 그럼 제가 스스로를 어찌 불러야 합니까?”
“…….”
묵용감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원칙대로라면 신첩이라 부르는 게 맞지만, 이리도 어린 계집이 신첩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상상해 보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번 혼사는 그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고, 이는 백 승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를 폐위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리 오래 머물지도 않을 왕비이니 스스로 부르고 싶은 대로 두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백천범은 곁눈질로 힐끗거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큰 눈을 깜빡거리는 모양새가 꽤나 진지하게 가르침을 얻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묵용감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고칠 필요 없소. 그냥 그리하시오.”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해 놓고 금방 말을 바꾸다니. 당최 속을 알 수 없었다.
묵용감은 아까 전에 하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날이 이토록 청명한데, 어찌 곧 비가 내릴 거라 하였소?”
“왕야께… 개미가 이사를 가기 때문이지요!”
“개미가 이사를 가면 비가 온다고 누가 알려 준 것이오?”
“왕야께… 제가 관찰해서 알아냈습니다.”
“보아하니 백 승상 댁에서 아주 한가로웠나 보구려.”
“왕야께… 저는 집에서 아무런 할 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참다못한 묵용감이 버럭 성을 내며 말했다.
“‘왕야께’라고 한 번만 더 말했다간, 백 승상 댁으로 다시 돌려보낼 줄 아시오!”
놀란 백천범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그녀는 ‘왕야께’라는 말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꾹꾹 참았다. 얼마나 많이 뺨을 맞았으면, 이런 비굴한 말투가 습관이 되었을까? 단번에 고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묵용감은 또다시 벌벌 떠는 백천범의 모습에 신물을 느꼈다. 그는 장삼을 한 번 걷어 올린 뒤 자리를 떴다.
그가 멀찌감치 가 버린 뒤에야 백천범은 놀란 가슴을 토닥였다. 참으로 큰일 날 뻔했다. 나무 뒤에 숨은 것을 초왕에게 들키다니, 앞으로 또 다른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묵용감이 왔을 땐 벌벌 떨던 그녀였지만, 그가 돌아가니 다시 활기가 넘쳐흘렀다. 깜짝 놀란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호수에 물수제비를 떴다. 돌멩이는 수면 위에서 한 번, 두 번, 세 번 튕긴 후에 가라앉았다.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다시 주워 온 돌멩이를 호수 표면에 바짝 붙여 던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꽤 괜찮았다. 그녀는 기쁜 마음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묵용감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던 길을 멈추었다. 나무 뒤에 서서 돌아온 길을 바라보니 백천범이 손뼉을 치고 껑충껑충 뛰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활짝 웃으며 어찌나 즐겁게 뛰어오르는지 땋아 올린 머리가 휘날릴 정도였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냉소를 지었다. 벌벌 떨던 모습은 모두 가식인 게 분명했다. 역시 백여름은 어린 나이에도 눈가림이 뛰어난 자식이기에 백천범을 자신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백여름 그자가 백천범을 보낸 건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아직 어린 매라 작긴 해도, 언제 부리에 쪼일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이 혼인을 명 받았을 때, 이러한 문제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두 집안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 시집오는 백씨 집안의 딸만 화를 입는 격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괴롭힐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말라도 바싹 마른 계집아이는 그가 손을 대고 말고 할 수준도 되지 않았다. 후원에서 혼자 살게 내버려 두다 그의 기분이 몹시 언짢은 날에 왕비를 폐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을 빗겨 갔고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남월각에서. 이 일로 그는 흥미가 생겼다.
그가 백천범을 어찌 시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남월각에서 또 사달이 났다.
* * *
어느 날 밤이었다. 기홍과 녹하가 초왕의 세안을 돕고 있는데, 학평관이 급히 달려와 고했다.
“왕야, 좋지 못한 소식입니다. 남월각에서 또, 또 사달이 났습니다.”
묵용감은 의자에 앉아 세족을 받던 참이었다.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그의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왕비 마마의 시녀 청수가 죽었습니다.”
“어찌 죽었더냐?”
“그게…….”
학평관의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길가에서 발견되어 아직 확실하지 않사옵니다. 어두컴컴한 밤중이라 아무도 본 자가 없고, 순시 중이던 머슴이 시신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발견했다고 하옵니다.”
“시신은 어디 있느냐?”
“아무도 건드릴 수 없게 현장을 봉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가장 먼저 왕야께 고하러 온 것입니다. 왕야께서 지시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 내가 직접 가 보겠다.”
묵용감은 씻고 잠을 청하려 장삼도 벗어 둔 상태였다. 그는 기홍과 녹하의 시중을 받아 다시 옷을 차려 입었다. 등불을 든 학평관이 길을 안내했고, 영구와 가동이 묵용감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현장에 도착했다. 남월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석가산 앞이었다. 사방에서 등불을 비추고 있으니 꼭 대낮같이 훤했다.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도착한 이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얼굴도 등불에 비쳤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한눈에 알아봤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사람들 뒤쪽에 서서 스스로의 모습을 최대한 감추려는 듯 보였다. 작은 몸집이 시녀들 사이에 가려진 데다가 밤이었기 때문에 살피는 게 쉽지 않았지만, 틈새로 보이는 그녀를 묵용감은 빠르게 훑어보았다.
청수라는 시녀의 시신은 석가산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얼굴이 바닥을 향한 채였다. 머리에 흐르는 피 외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묵용감은 시신을 발견한 머슴을 불렀다.
“언제쯤 발견한 것이더냐?”
“와, 왕야께 아룁니다. 대, 대략 일각쯤 된 것 같사옵니다.”
잔뜩 몸을 구부린 어린 머슴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며 답했다. 별안간 시신에 발이 걸려 넘어졌으니 놀란 가슴이 아직 진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느냐?”
“쇤네 드, 등불을 들고 순시를 돌던 차, 참이었습니다. 이,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마, 만일, 발에 거, 걸리지만 않았다면 발견하지 모, 못했을 것입니다.”
묵용감이 영구에게 눈짓을 보냈다. 영구는 곧장 시신 곁으로 가 주변을 자세히 살폈다. 고개를 들어 석가산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결론을 내렸다.
“왕야, 이 시녀는 석가산에서 추락하여 죽은 것이옵니다.”
그의 말에 곳곳에서 작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리 늦은 시간에 석가산엔 뭐 하러 올라갔겠어?”
“날이 어두워 발을 잘못 디딘 게 아닐까?”
“며칠간 비가 내렸으니 돌을 밟다 미끄러졌을지도 몰라.”
“멀쩡한 길 놔두고 어째서 한밤중에 석가산을 올라간 거야?”
다들 의견이 분분했지만, 영구의 한마디에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왕야, 소인의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누군가 이 시녀를 밀쳐 떨어뜨린 것이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