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6)화 (6/1,192)

제6화

“하늘에 대고 맹세하지요.”

이씨 부인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는 이번 일과 추호도 관련이 없습니다. 초왕의 집에서 사람을 보내와 전해 들은 것이옵니다.”

“관련이 없다니 다행이오. 일전에 자네들이 저지른 추악한 일들은 내 훤히 꿰고 있소. 지금은 천범이가 초왕의 집에 있으니 허튼수작일랑 부릴 생각도 마시오. 제발 문제 좀 그만 일으키란 말이오!”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목소리는 매서워졌다.

이씨 부인은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걱정 마시어요, 서방님. 다섯째는 이미 출가한 몸이 아닙니까. 제가 아무리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한다고 한들 어찌 감히 초왕을 건드려 서방님께 폐를 끼친단 말입니까?”

“자네 동생도 잘 간수하시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거든 나도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테니.”

깜짝 놀란 이씨는 애걸복걸하며 말했다.

“서방님, 어찌 그런 말씀을……. 강이가 가끔 어리석긴 해도 서방님의 처남입니다. 헌데 관여를 하지 않으시겠다니요?

곧 칠순인 아버님은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을 하셔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관직이라도 강이에게 한 자리 내어 주면 온종일 방탕한 생활을 하진 않겠지요. 서방님…….”

백여름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런 성품을 가진 자에게 관직을 맡긴다고? 날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는구려.”

말을 마친 그는 홱 하고 소매를 당기며 방을 나섰다.

그가 왼쪽으로 꺾어 복도를 걸어 나가자 이씨 부인은 성을 내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여우 같은 년과 놀아나더니 정신까지 잃은 모양이구나. 강이 얘기만 아니었다면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분께서.”

“마님, 진정하시옵소서.”

홍련이 따뜻한 찻잔을 이씨 앞에 올렸다.

“승상께서 아무리 많은 이들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 한들 집안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마님이십니다. 승상께서 도련님 일로 화가 나셔서 심한 말씀을 하셨지만, 우리 둘째 아가씨께서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고 계시니 승상께서도 마님을 늘 염두에 두실 것이옵니다.”

둘째 딸 백강벽白江碧을 떠올린 이씨 부인은 그제야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서방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내 우리 귀비 마마를 찾아가 황제 폐하께 말씀을 드려 달라고 청해야겠다. 자그마한 관직을 주시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게야.”

그러다 별안간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지. 내 우선 친정부터 가 봐야겠다. 초왕에게 손찌검을 당했으니 분명 강이가 크게 다쳤을 게다. 참으로 가여운 우리 강이…….

홍련아,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약재와 얼마 전 들어온 산삼을 가져오너라. 참, 아버지께 드리려고 만든 비단 적삼도 함께 챙기고.”

* * *

묵용감은 잠시 낮잠을 청하고 일어났다. 기홍이 그의 곁으로 와 조용히 말했다.

“왕야, 학평관 어르신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묵용감이 팔을 들자 기홍이 서둘러 장삼을 입혀 주었다. 그는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느릿느릿 말했다.

“할 말이 있거든 들어와 말하거라.”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문 앞에 서 있던 학평관이 듣기엔 충분했다. 그는 문발을 걷어 올리고 들어가 허리를 굽힌 채 고했다.

“왕야, 오늘 오전 백 승상 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왕비 마마께 드릴 것을 가져왔다 하기에 남월각에 들여보냈는데, 왕비 마마께서 처소에 계시지 않아 두 유모와 얘기를 나누다 돌아갔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더냐?”

“그것이…….”

학평관은 이마에 맺힌 땀을 한 차례 닦고는 말을 이었다.

“유모들이 워낙 치밀한 성격이라 사람을 시켜 입구에서 망을 보게 했다 하옵니다. 하여 머슴도 가까이 갈 방도가 없어…….”

“그저 듣지 못했다고 하면 될 일 아니더냐? 쓸데없는 소리를 그리 길게 늘어놔서야, 원.”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택의 총 관리인이라는 자가 모르는 것이 그리도 많은 걸 보니 일에 진절머리가 났나 보구나.”

학평관이 곧장 쿵 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왕야,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이번 일은 그르쳤지만,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소인이 반드시 알아내어 왕야께 아뢰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묵용감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녹하가 내어 온 차를 마시며 느긋이 말했다.

“그자들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관심 없다. 너는 그 계집아이만 잘 감시하거라.”

그가 말한 계집아이는 물론 백천범이었다. 사실 학평관은 보고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러나 한바탕 호되게 혼이 난 후라 더 얘기했다간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일을 묻어 두자니 조금 불안했다.

처음엔 왕비에게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던 초왕이었지만, 시녀가 못에 빠져 목숨을 잃은 뒤로는 왕비를 잘 감시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는 머슴을 시켜 왕비 뒤를 밟았지만 왕비가 돌연 사라지는 일이 수차례나 반복되었다.

머슴의 말에 따르면 왕비는 은신술을 하는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고 했다. 그러다 온 저택을 이 잡듯 뒤지고 있으면 별안간 다시 나타나 누구를 그리 찾느냐고 묻는다 한다.

결국 놀라 나뒹군 머슴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고, 돌아왔을 땐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학평관은 머슴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직접 남월각에 숨어들었다. 남을 감시한 경험이 많은 그의 눈앞에서 백천범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했다. 분명 뒤를 잘 밟고 있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왕비가 사라졌다. 그는 한나절 넘게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혹 어린 왕비가 요술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왕야께 아뢰자니 계집아이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역정을 내실까 두려웠다.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묵용감이 입을 뗐다.

“그 애는 요즘 무얼 하며 지내느냐?”

“딱히 무얼 하시지는 않사옵니다. 온종일 이곳저곳 거니시곤 합니다.”

“후원을 벗어나는 게냐?”

“아닙니다. 어찌 후원을 벗어나시겠습니까?”

학평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사실 그도 왕비가 후원을 나섰는지 알 턱이 없었다.

“오늘 온 자는 누구인가?”

“이씨 부인의 시녀, 홍련이라는 자가 왔었습니다.”

“무엇을 보냈더냐?”

“간식거리로 과자를 보내왔습니다.”

“왕비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그냥 가 버리더냐?”

“예, 왕비 마마께서는 밖을 거니시느라 처소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불러 찾으라 하지도 않고?”

“예, 찾지 않았습니다.”

학평관이 말을 이었다.

“소인이 지켜보니 홍련이라는 자가 방에서 한나절 동안이나 두 유모와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챙겨 온 물건을 두고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묵용감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빙빙 돌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 그 애는 백 승상의 집에서 천대를 받는다 하였는데, 어찌 사람을 시켜 먹을 것을 보낸단 말인가? 게다가 그 시녀가 왕비를 보러 온 것이라면, 어째서 왕비를 찾지도 않고 그대로 가 버린단 말인가?

* * *

오늘 묵용감은 모처럼 여유가 있었다. 때마침 날씨도 좋아 그는 홀로 정원에서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천천히 거닐다 보니 어느새 후원 앞에 다다랐다. 둥근 반월문에 들어서니 백천범이 묵는 남월각이 보였다. 입구엔 문을 지키는 사람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는 시녀 둘이 앉아 해바라기 씨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게 시녀는커녕 양갓집 규수 같았다.

이를 본 묵용감은 고개를 저었다. 평소 백천범은 아랫사람을 어찌 관리하길래 이렇게 제멋대로 굴게 둔단 말인가? 그는 혀를 찬 뒤, 기둥 뒤로 조용히 몸을 숨겨 안채로 난 길을 걸었다.

몇 걸음 뗐을 무렵 왼쪽 행랑채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사각사각 거리는 게 꼭 패를 섞는 소리 같았다.

묵용감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냈다. 역시나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유모 옆쪽 탁자에는 각종 간식거리와 차 따위가 놓여 있었다. 허드렛일을 하는 계집이 찻주전자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이기는 분께서 저에게 차 심부름 값을 주셔야 해요.”

초록 상의를 입은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제씨 유모님께서 이기셨네요. 홀로 셋을 이기시다니요.”

유모 제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봤자 어제 잃은 걸 돌려받는 것뿐이지. 그래도 오늘 운수가 좋으니, 옜다. 이거라도 우선 가지거라.”

유모 제씨는 엽전 두 냥을 계집 앞으로 던졌다.

계집아이는 재빨리 엽전을 챙겨 들고는 허리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습니다. 유모님.”

묵용감은 지금껏 이토록 오만방자한 유모를 본 적이 없었다. 감히 주인 행세를 하다니. 대화를 엿듣던 그는 저들이 노름판을 자주 벌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인들이 노름판을 벌일 동안 주인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옆에서 시중을 드는 이도 필요 없단 말인가?

묵용감은 대체 백천범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조용히 내부를 살펴보았지만 행랑채에도 작은방에도, 목욕간에도 백천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들어왔던 길을 돌아 나섰다. 그러다 길가에 그대로 선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 * *

학평관은 초왕이 남월각에 들어간 순간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남월각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왕야께서 신경을 쓰시지 않으니 그 또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왕야가 심각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는 걸 본 학평관은 재빨리 그에게 달려갔다.

“왕야,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내 너에게 왕비를 잘 감시하라 하지 않았더냐? 지금 왕비는 어디 있는 것이냐?”

“그것이…….”

그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왕비는 고사하고 왕비 뒤를 밟는 머슴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산책을 가셨을 것이옵니다. 사람을 불러 찾아보겠습니다.”

“관두거라.”

묵용감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만 물러가거라. 홀로 거닐다 들어갈 것이다.”

“예, 왕야.”

학평관은 허리를 굽히며 예를 차리고 물러났다.

묵용감은 호숫가로 발길을 돌렸다. 명호明湖의 풍경은 꽤 운치가 있었다. 듬성듬성 핀 연꽃과 이제 막 자라나는 푸른 나뭇잎이 한층 더 멋을 더했다.

그는 구불구불 놓인 다리를 따라 호수 한가운데 세워진 정자에 다다랐다. 이곳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니 아득한 하늘이 비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앞을 응시했다. 자꾸만 맞은편 나무 아래에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는 듯했지만 옅은 자주색 장삼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호숫가로 돌아와 천천히 맞은편 나무로 향했다.

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백천범이었다. 그녀는 무언가에 몰두한 채 땅을 내려다봤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행동을 반복했다.

묵용감은 그녀의 행동이 하도 수상쩍어 조용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알고 보니 그녀는 개미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하늘은 왜 바라보았단 말인가? 그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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