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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화 (5/1,192)

제5화

어느 날, 아침부터 초왕의 저택에 소란이 벌어졌다. 그리 큰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하인 한 명이 목숨을 잃은 일이었다. 남월각에서 백천범을 모시던 시녀 청병이었다.

저택의 관리인 학평관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왕비가 왕야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데 이 일까지 겹친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었다. 그러니 시녀 한 명쯤은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일개 하인 때문에 왕야를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소식을 전달한 머슴에게 명했다.

“백 승상 댁으로 가서 이 소식을 전하고, 시녀의 집안에 시신을 거둘 이가 있는지 보고 오너라. 만약 없다면 시신을 관에 넣지 말고 멍석에 말아 무덤가로 옮기거라.”

때마침 집으로 들어오던 묵용감이 그의 말을 듣고 말았다.

“누가 죽었다 하였느냐?”

학평관이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왕야께 아뢰옵니다. 죽은 것은 왕비 마마를 모시던 시녀 청병이옵니다. 물가에서 발을 헛디뎌 그만 익사했다 하옵니다.”

묵용감이 되물었다.

“언제 일어난 일이더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옵니다. 시신이 아직 물가에 있어 처리를 하려던 참이었사옵니다.”

묵용감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봐야겠다.”

학평관은 급히 길을 안내했고 곧 후원에 다다랐다.

묵용감은 후원에 드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는 이곳이 쓸모없는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학평관이 신경 써서 단장한 덕에 누각과 꽃밭, 연못에 산까지 더해져 경치가 꽤 아름다웠다.

남월각에 도착한 묵용감은 대문 담벼락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과 으리으리한 정원을 살펴보았다.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왕비의 처소를 이곳으로 정한 것이더냐?”

학평관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소인, 황제 폐하께서 정해 주신 혼인인 데다 명색이 왕비 마마의 처소이니, 후원에서도 이곳 남월각이 상전께서 묵기 적합한 곳이라 여겨 감히 그리 결정했사옵니다. 분부만 내려 주시옵소서, 왕야.”

묵용감은 그의 말을 듣고는 일언반구도 없이 성큼성큼 정원 안으로 걸어갔다.

연못가에는 여러 명이 시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초왕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다들 급히 예를 차려 인사를 올렸다.

묵용감은 잔꾀를 부리던 어린 계집아이가 사람들 곁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자신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듯 보였다.

그는 왕이고 그녀는 왕비였다. 얼굴을 보고도 자신의 곁에 오기는커녕 무슨 켕기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숨어 버리다니.

익사한 청병의 시신은 땅 위에 놓여 있었다. 창백한 낯빛에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수놓은 신발 두 짝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어찌 된 일이더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초왕이 입을 떼자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나마 담력이 좋은 편이었던 유모 제씨가 어찌 된 일인지 고했다.

“왕야께 아룁니다. 오늘 아침 청병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고 말았사옵니다. 발견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습니다.”

묵용감이 연못을 살펴보았다. 연못이라고는 하나 연꽃은 없었고 비단잉어만 몇 마리 있을 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익사를 하다니!

다시 청병의 시신을 살피던 그는 시신을 덮고 있는 피풍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유모 제씨가 대답했다.

“피풍이옵니다, 왕야.”

묵용감이 피풍을 모를 일은 없었다. 시녀가 왜 꼭두새벽부터 피풍을 걸치고 연못가에 서 있었단 말인가?

“누구의 피풍이더냐?”

일순간 적막이 흘렀다. 아무도 입을 떼지 않던 중 가냘프게나마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야께 아룁니다. 그 피풍은 저의 것이옵니다.”

순간 묵용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그대의 피풍이 어찌 저 애의 몸에 덮여 있단 말이오?”

백천범은 필사적으로 설명하려 애썼다.

“왕야께 아룁니다. 사실은 이리된 것이옵니다. 일어나 보니 바깥에 바람이 심하게 불었습니다. 그리하여 피풍을 걸치고 연못가에 가 잉어 밥을 주려 했사옵니다. 그러다 청병을 마주쳤는데 청병이 제 피풍이 맘에 든다 하여 그 애에게 준 것이옵니다.”

한낱 시녀가 주인의 옷을 곧장 받아 가다니. 이 얼마나 낯짝 두꺼운 시녀란 말인가!

그보다 백천범의 말이 묵용감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왕의 물음에 답하는 왕비가 입을 뗄 때마다 ‘왕야께 아룁니다’ 타령이었으니 말이다. 혹 스스로를 노비로 착각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왕비라는 사람이 시녀들 뒤에 숨은 채 왕과 대화를 나누다니. 설마 왕이 손찌검이라도 할까 봐 두려운 것인가?

묵용감은 가볍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이리 오시오.”

백천범은 더 이상 상황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쭈뼛쭈뼛 그의 앞에 섰다.

“저 애가 달라고 하니 바로 주었다?”

“아… 네……. 참으로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 애가 맘에 들어 하면 뭐든 다 줄 것이오?”

백천범은 우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군자는 남을 도와 공덕을 쌓는 법이니까요.”

묵용감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스스로를 군자에 비하다니, 군자가 이런 하찮은 일도 한단 말인가?

그는 다시금 그녀에 대한 생각을 바로잡았다. 자칫하면 잘못된 판단을 내릴 뻔했다. 허약한 참새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어린 매에 더 가까웠다. 역시 백여름은 그에게 재미난 자를 보낸 게 분명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백천범이 시녀에게 자신의 피풍을 입힌 뒤 연못으로 떠밀어 결국 죽게 만들었다? 만약 정말로 용의주도한 성격이었다면 이러한 계략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누구든 죄를 저지른 후엔 후환이 없길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눈에 띄는 증거를 남겼다. 심히 우둔하거나 과하게 똑똑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어째서 시녀 청병을 죽였단 말인가. 묵용감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백천범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청병이 자신의 비밀을 알아차려 죽음으로 입을 막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어떤 비밀이기에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단 말인가?

백천범은 잠깐 사이에 초왕이 이토록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피풍을 청병에게 빼앗긴 걸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초왕의 저 무시무시한 시선을 보고 있자니 청병의 죽음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 청병을 가장 마지막으로 본 사람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묵용감은 백천범의 속을 들춰 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왕비의 시녀의 억울함을 풀어 줄 만큼 자애롭지 않았다. 그래도 왕비의 체면이 있으니 사람을 불러 허름한 관에 청병의 시신을 수습했다.

백천범은 감사를 표하며 자그마한 몸집으로 공손히 절을 올렸다. 눈을 내리깔고 부드럽게 짓는 표정이 제법 그럴싸하다고 묵용감은 생각했다.

* * *

백 승상의 집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백 승상의 본처 이씨는 크게 노해 도자기 그릇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재수가 없으려니! 죽어야 할 년은 안 죽고 애꿎은 애만 죽었구나! 천하의 망할 년, 감히 잘도 빠져나갔겠다?”

이씨 부인의 수발을 드는 시녀 홍련紅蓮은 매우 영악한 사람이었다.

“마님, 노여움을 푸시어요. 제가 보기엔 초왕이 손을 쓰기 시작한 듯하옵니다. 이번에는 일을 그르쳤으나 기회는 또 있질 않사옵니까?

초왕야가 누굽니까, 동월국의 군신입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도 죽음을 면치 못하지요. 승상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멍청한 다섯째 아가씨는 초왕의 미움을 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마님. 조만간 사달이 날 것입니다.”

홍련의 말을 듣고 난 이씨 부인은 그제야 화가 누그러졌다. 그때 잿빛 그림자가 창문을 스쳤다. 그녀는 급히 문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서방님, 오셨습니까?”

백여름은 짧게 대답한 뒤 장삼長衫을 걷어 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홍련은 재빨리 차를 내어 온 뒤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안마를 시작했다.

이씨 부인은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서방님, 오늘 불길한 일이 있었습니다…….”

백여름은 고개를 숙인 채 차의 거품을 걷어 냈다. 그는 한참 뒤에야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초왕이 아직도 날 못살게 굴 생각인가 보구려. 천범이를 보낸 것은 겉치레로나마 내가 초왕의 장인이 되기 위함이었소.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사람들 앞에서 사위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더구나 황제 폐하께서 정해 주신 혼사이니 체면은 살려 줘야 하는 게 아니오? 헌데 보는 눈 많은 조정에서 도리어 나를 공격하다니…….”

이씨 부인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겠소?”

백여름은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를 흘겨봤다.

“당신의 그 잘난 동생 때문이지.”

이씨 부인의 이름은 이연李娟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예부禮部의 정랑正郞 출신으로 정5품의 소관이었다. 형제는 남동생이 유일했다. 이강李剛이라는 이름의 남동생은 그녀보다 열 살도 더 어린 늦둥이였기에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백여름이 막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을 때, 이연의 집안과 수준이 얼추 비슷하다 여겨 혼례를 치렀다. 하지만 몇 년 뒤 그는 권세에 빌붙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승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 주변 식구들은 그의 덕을 얻으려 했다. 결국 이연의 부친 이덕해李德海 또한 정5품에서 정2품으로 올라 예부의 시랑侍郞이 되었다.

정2품의 고관이 된 장인 말고도 승상에겐 처남이 남아 있었다. 이강은 늘 말을 타고 거리를 폭주하며 양갓집 규수들을 희롱했고, 백성들을 억압하거나 강탈을 일삼는 골칫덩이였다. 임안臨安에서 그의 악명은 자자했지만 그 누구도 감히 분노를 표하지 못했다.

이강은 어제도 거리에서 악랄한 짓을 저질렀다. 어느 가난한 집의 여인을 첩으로 삼겠다며 강제로 끌고 간 것이다. 그의 악명을 익히 들어 왔던 여인은 한사코 저항했지만, 머리를 담벼락에 세게 부딪혀 그 자리에서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묵용감이 자초지종을 듣고는 이강을 호되게 때렸고, 사람을 불러 여인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조정에서 이 일을 황제 폐하께 고한 것이었다.

부인 이씨는 동생이 맞았다는 소리에 마음이 아파 왔다. 게다가 이 일을 황제 폐하께 고했다니! 너무 놀라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뭐라 하십니까?”

“폐하께서도 초왕이 내 약점을 캐내려 기회만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오. 하여 이번 일은 진상을 조사한 후에 다시 결정하자고 하셨소.”

이씨 부인은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

“역시 황제 폐하께서는 슬기로우십니다.”

잠시 고민한 끝에 이씨는 결국 청병의 소식을 알렸다.

“초왕이 이미 손을 쓰기 시작한 건 아니겠지요? 우선 시녀를 본보기로 목을 베고, 후에 다섯째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서방님도 조심하시지요.”

백여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손을 썼다면 천범이의 목숨을 단번에 앗아 가지 않고, 무엇 하러 시녀를 죽인단 말이오. 설마 당신이 거기까지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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