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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화 (4/1,192)

제4화

“황제 폐하께서 각별히도 신경을 쓰셨군요.”

묵용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중재를 하고 싶으셨다 한들 형님과 백여름 사이에 원한이 얼마나 큰데, 다섯째 딸 하나로는 가당치도 않겠지요……. 그러고 보니 형수님이 도통 보이질 않습니다.”

묵용감은 백천범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혼례를 올리긴 했지만 왕비와 같은 저택에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묵용택의 물음을 듣고 나서야 그는 왕비를 들인 사실을 떠올렸다.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이 눈앞에 휙 스쳐 지나갔다. 나른한 목소리는 또 어떠했던가?

“두려워할 것 없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여전히 우스웠다. 어찌 감히 자신이 여우 신선이라는 허튼소리를 해 댔을까? 병아리만 한 여우 신선이라니?

묵용감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알아챈 묵용택은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형수님이 그리도 재미있으십니까?”

“재미는 모르겠고, 잔꾀를 부리는데 꽤 솜씨가 있더구나.”

묵용감은 그날 아침에 있었던 일을 묵용택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묵용택은 몸을 들썩이며 박장대소했다.

“재미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형수님이 그렇게 훌륭한 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어서 형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군요.”

묵용감은 살짝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도 재미있느냐? 허면 내 오늘 왕비를 폐할 터이니 내일 네가 장가를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묵용택은 여전히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어찌 제가 감히……. 이토록 훌륭한 분은 셋째 형님 곁에 계셔야지요.”

한바탕 웃고 나니 또다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만 백여름의 딸이라는 게 아쉬울 뿐이지요. 그것만 아니라면 재밋거리 삼아 남겨 둘 것을.”

그 말에 묵용감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내가 그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더냐?”

“제 뜻이 아니라 다들 암암리에 백 승상의 다섯째 딸이 언제 죽을지 내기를 걸고 있습니다.”

“백여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내가 그의 딸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그는 폐하께 그 사실을 곧장 고할 것이고.”

“백여름 그 못된 작자가 어찌 귀한 딸을 호랑이 굴에 보냈을까요?”

“귀한 딸?”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아이다. 백여름이 내게 첩의 자식을 보냈어.”

묵용택은 묵용감에게 왕비를 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형님, 남겨 두면 화근이 될 그 애가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백여름이 자신의 딸을 이곳에 보낸 것은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입니다.”

“백여름이 젖비린내 나는 그 계집을 이곳에 잠입시켰다고 생각하느냐?”

묵용감은 늘 머리가 비상했기에 묵용택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만 여우 신선 같은 구실을 대며 빠져나가려던 걸 보니 똑똑하고 배포가 큰 계집인 게 분명했다.

돌아가는 길에 묵용택은 일부러 먼 길을 돌아 남월각 앞을 지나쳤다. 입구에서 바라본 남월각은 고요하고 썰렁한 게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듯했다. 들어가서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너무 성급히 찾아온 듯하여 그만두기로 했다.

저택의 모든 이들이 백 승상의 다섯째 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녀는 엄연히 초왕의 왕비였다. 왕비에게 불쑥 찾아가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한참 고민한 끝에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백천범이 초왕의 집에 온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시녀들은 백씨 가문 다섯째 딸이 남월각에서 시들어 사라질 한 떨기 꽃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백천범은 별다른 감흥 없이 투명 인간처럼 지내고 있었다. 그저 백 승상의 집에서 초왕의 저택으로 환경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시녀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사는 것은 이전과 똑같았다.

처음엔 두 유모가 먼저 차일피일 일을 미루기 시작하더니 시녀들까지 꼬드겨 소홀히 일하게 했다. 결국 그들은 왕비의 말을 듣지도,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그녀가 죽길 바라며 자신들이 돌아갈 날만 손꼽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백천범은 거의 변하는 게 없었다. 활력이 넘쳐 별안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시들어 가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유모 제씨는 답답함에 유씨에게 물었다.

“대체 다섯째 아가씨는 어째서 아직까지 멀쩡한 거랍니까? 어느 계집년이 몰래 먹을 걸 갖다 바치는 건 아니겠지요?”

유모 유씨가 대꾸했다.

“마님께서 다섯째 아가씨를 여우라고 하시지 않는가? 목숨이 아홉 개나 있다고 말일세. 승상 댁에서는 번번이 실패했지만 초왕의 살기가 곧 아가씨를 덮칠 것이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

유모 제씨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명이 긴 건 긴 것이고, 예상치 못한 화는 하늘의 뜻이겠지요. 차라리…….”

“안 되네.”

유모 유씨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여긴 초왕의 저택이네. 승상께 해를 끼치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일세.”

유모 제씨가 입을 떼려는 순간 바깥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급히 창가로 가 살펴보니 백천범이 손수건을 살랑살랑 흔들며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자그마한 몸집이었지만 햇볕을 쬐며 걷는 모습이 유난히 생기발랄했다.

작은 체격으로 꼿꼿하게 거니는 모습을 본 유모 제씨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죽을 때까지도 다섯째 아가씨는 멀쩡히 살아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모 제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유모 유씨의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성격이 조급하고 참을성도 없는 그녀는 하루빨리 백 승상 집으로 돌아가 안락한 삶을 즐기고 싶었다. 온종일 적막한 남월각에만 갇혀 있느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다섯째 아가씨를 일찌감치 해치우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유모 유씨가 머리를 내밀며 물었다.

“누가 있는 겐가?”

“다섯째 아가씨요.”

“우리 대화를 들으신 건 아니겠지?”

“멀리 계셨으니 못 들었을 겁니다.”

유모 제씨가 말을 이었다.

“헌데 활력이 넘치는 게 끼니가 부족한 모습은 아니더군요. 역시 우리가 방도를 찾아야만 합니다.”

유모 유씨는 과자를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이보게, 제씨. 초왕야의 행실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초왕과 승상께서는 서로 앙숙이긴 하나 이번 일만큼은 두 분의 뜻이 상통할 터인데.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그녀는 접시에 있는 과자를 하나 더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이곳에 음식과 꽤 많은 돈을 보내시지 않는가? 다섯째 아가씨께 주려고 말일세.”

“보내 주신다면야 다섯째 아가씨만 빼고 다 같이 나눠 가지고 좋지요.”

“하나 초왕에게 아가씨를 치울 생각이 없어서 이러는 거라면…….”

유모 제씨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군신의 집에서 이토록 시달리고 있는데 이것마저 없으면 우리더러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초왕야가 다섯째 아가씨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뜻일 겁니다. 갓 시집온 왕비가 죽었다는 것도 모양새가 영 별로일 테고.”

“초왕이 그리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봐 무서운 게지. 우리가 마님의 분부를 받잡고 온 건 맞지만 목숨과 비하면 그게 뭐 그리 대수인가? 자네와 내가 잘 생각해야 할 걸세.”

방금 전까지 유모 제씨는 아가씨를 하루라도 빨리 해치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유모 유씨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초왕의 저택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은 노비일 뿐이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일을 도모하는 편이 더 나았다.

유모 제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에 형님께서 기다려 보자 하셨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요.”

군신이라 불리는 초왕의 칭호는 결코 쉬이 얻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자칫 심기를 잘못 건드려 자신만 목숨을 잃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피로 강을 만든다는 소문처럼 왕비 집안의 모든 이들을 몰살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투명 인간 취급의 가장 좋은 점은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유모 제씨는 자신과 유씨가 한 말을 백천범이 듣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이미 모든 내용을 듣고 난 뒤였다. 그녀에게 이 정도 눈치도 없었다면 어찌 잔혹하기 짝이 없는 백 승상의 집에서 13년을 살아올 수 있었겠는가.

백 승상의 집에서는 각종 모함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녀는 운 좋게 모든 계략을 눈치채고 피해 갈 수 있었다. 백천범은 스스로를 기적과도 같은 존재라 여기며 탄식하곤 했다.

백천범을 죽이지 못하자 그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그녀를 초왕의 저택으로 보냈다. 초왕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할 작정이었다.

초왕의 저택에 발을 들이면 십중팔구 불길한 일이 발생한다는 건 백천범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혼삿날 밤 도망을 계획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담벼락을 넘다 초왕의 처소로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그와 동침까지 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초왕은 그녀를 해치지 않고 남월각에 홀로 두었다. 백천범은 자신만의 공간이 생겨 매우 기뻤다. 처음엔 그녀와 함께 온 시녀와 유모들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초왕의 저택에 온 뒤 시작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시녀와 유모들은 자신을 왕비라 불러 주며 따뜻한 밥과 물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밥과 물을 내오고, 더 지나니 아예 상도 차리지 않을 만큼 소홀해졌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겨우 끼니를 굶지 않을 수 있었다.

몇 년간의 투명 인간 생활로 인해 그녀는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그녀는 누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누가 뼈 있는 말을 하는지, 누구의 행실이 변했는지 등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 마치 그녀 마음속 누군가가 초왕의 저택에 함께 온 무리들을 조심하라고 일러 주는 듯했다.

그렇게 그녀는 조마조마한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늘 누군가의 표적이 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그녀를 해할 수 있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했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게 한다든가 석가산에서 밀쳐 떨어트리기, 독이 든 야생 열매를 먹이기, 그것도 아니면 은밀한 숲속으로 몰아넣어 밀애를 하는 것처럼 꾸미기 등 수도 없이 많았다.

백천범은 남월각에서 자신의 방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방 안에만 머무른다면 그 누구도 그녀를 노골적으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 만일 그녀가 자신의 침대에서 죽음을 맞는다면 양가 모두 난감해질 것이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백 승상과 초왕이 속을 끓일 일임은 분명했다.

그래서 백천범은 잠자리에 들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 빗장에 가느다란 실을 묶고 방울을 달아 누군가 침입하면 방울이 울려 잠에서 깰 수 있게 해 놓았다. 또 허리춤에는 표창을 매고, 베개 밑에는 작은 칼을, 수를 놓은 신발 속에는 새총을 숨겨 놓았다.

그녀는 백 승상의 집에서 도령들이 무예를 익힐 때 한편에 몰래 숨어 무기들의 사용법을 익혀 두었다. 기교가 뛰어나진 않았지만 위험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건 문제없었다.

그날, 유모 제씨와 유씨의 대화를 엿듣고 난 후 백천범은 더욱더 신중히 행동했다. 가능하다면 모든 이들이 그녀를 찾지 못하도록 은신술을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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