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기홍이 깜짝 놀라 황급히 말했다.
“왕비 마마, 저는 그저 시녀에 불과하옵니다. 주인과 종은 천지 차이인데 말을 높이시다니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백천범은 여전히 겸손한 말투로 말했다.
“언니는 저보다 일찍 이곳에 왔고, 나이도 저보다 많으시니 언니라 부르는 게 당연하지요. 제가 이곳에 처음 와 모르는 게 많으니 언니가 많이 가르쳐 주시어요.”
기홍은 초왕이 이런 왕비를 맞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평소엔 늘 침착한 그녀였지만, 결국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학평관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르신, 저 대신 왕비 마마께 말씀 좀 해 주세요.”
학평관은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 왕비와 어찌 대화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기홍에게 언니라고 부르자 그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대관절 어린 왕비가 진짜로 멍청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척을 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역시… 백 승상의 딸 또한 그 핏줄이라고, 속을 알 길이 없는 자였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왕비 마마, 기홍은 시녀이옵니다. 왕비 마마께서 언니라고 부르시면 이 아이는 감당하기 힘들 것이옵니다. 또한, 왕야께서 들으시면 아마 크게 노하실 것입니다.”
왕비에게 초왕의 무서움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뒤이어 말했다.
“왕야께서 한 번 노하시면 그 후환이 매우 심각하옵니다.”
“저도 들었어요. 초왕이 화가 나면 피가 강이 되어 흐른다던데, 정말이에요?”
백천범이 물었다.
학평관은 자신의 주인을 욕되게 말할 수 없었지만, 어린 왕비가 또다시 문제를 일으킬까 걱정되어 모호하게 대꾸했다.
“비슷하지요.”
기홍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무서워하지 마시어요. 왕야께서는 조금 차가워 보이실 뿐 나쁜 분이 아닙니다.”
시녀가 자신의 주인에 대해 이리 편하게 말하는 걸 보니 절대 평범한 관계는 아닌 듯했다. 백천범은 자신의 추리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학평관은 손짓을 하며 사람을 불렀다.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왕비 마마를 처소로 곧장 모실 것이다.”
백천범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물건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내 물건…….”
“왕비 마마, 걱정 마시어요. 제가 챙겨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막 다리를 굽혀 일어나려 하자 배에서 ‘꼬르륵’하고 신호를 보내왔다. 그러고 보니 뱃가죽이 등에 붙는 듯했다. 온종일 난리법석을 피우며 도망을 쳤는데, 먹은 거라곤 어젯밤의 간식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비틀거리는 백천범을 본 학평관도 더 이상 재촉하지 못했다. 기홍이 왕비에게 아뢰었다.
“왕비 마마, 많이 시장하시지요? 소인이 우선 죽을 내드리겠습니다. 죽으로 요기를 하신 후에 남월각에서 다시 아침 수라를 드시지요.”
학평관이 생각해도 그편이 가장 나았다. 왕야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니 요기만 살짝 하고 보내 드리는 수밖에.
백천범이 백 승상의 집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기 시작한 건, 유모가 세상을 떠난 뒤 아무도 그녀를 돌봐 주지 않으면서부터였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면 언제든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너무 오랫동안 그녀를 보살펴 주는 이가 없었던 탓일까? 뜨끈하고 향긋한 죽이 차려지자 그녀의 마음이 아려 왔고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죽을 한 술 떠서 입에 넣는 순간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며 입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어찌나 맛있는지 그녀의 두 눈에 결국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왕비의 표정을 본 학평관과 기홍은 깜짝 놀랐다. 왕야의 총애를 받진 못해도 엄연히 왕비는 왕비였다. 학평관은 급히 그녀 곁에 다가가 물었다.
“왕비 마마, 죽이 입에 맞지 않으시옵니까?”
백천범은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죽이 너무 맛있어서…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나려 합니다.”
학평관과 기홍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지금 이 상황이 단순히 넘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평관은 백천범이 어리긴 해도 백 승상의 가문에서 온 자이니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는 왕비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기홍의 생각은 달랐다. 참으로 순수한 이 왕비라면 앞으로 초왕의 곁을 충분히 견뎌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백천범은 남은 죽을 빠르게 먹어 치우고는 고개를 들어 가련한 눈빛으로 기홍을 바라봤다. 참으로 가여운 모습이었다.
시간이 더 지체될까 조급해하며 학평관이 말했다.
“왕비 마마, 남월각에 드시면 소인이 곧장 아침 수라를 올리겠사옵니다. 드시고 싶은 것을 모두 차려 드리지요.”
백천범은 기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이 흰죽이 또 먹고 싶어요. 언니가 만든 것이어요?”
“예, 소인이 만든 것이옵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먼저 돌아가시지요. 소인이 왕비 마마를 모시고 갈 자를 바로 불러오겠습니다.”
왕비가 계속 꾸물대다간 처소로 돌아오는 왕야와 또다시 마주칠 것이다. 그렇기에 기홍은 재빨리 사람을 불러 왕비를 처소로 보내려고 했다.
남월각을 백천범의 처소로 삼는 것은 학평관의 견해였다. 그는 이미 묵용감에게 의견을 물은 적이 있었지만, 묵용감은 그때 아무런 말도 없이 손만 내저었다. 알아서 결정하라는 의미였다.
남월각은 후원에서 가장 크고 좋은 곳이었다. 어쨌든 왕야의 정비正妃이니 이곳을 내주는 것이 도리라 여겼다.
백천범은 친정에서 시녀 네 명, 유모 두 명과 함께 이곳에 왔다. 학평관은 여기에 허드렛일을 하는 몸종 넷을 더 붙여 남월각으로 보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왕비를 모시기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왕비를 처소로 안내한 뒤 곧바로 곤장을 맞으러 갔다.
* * *
백천범은 자신과 함께 온 시녀와 유모들이 낯설었다.
일전에 그녀의 곁엔 유모 한 명만 있었다. 유모가 세상을 떠난 후, 백천범은 기댈 곳 하나 없이 외톨이처럼 지내 왔다.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배가 고파 오면 스스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자식들이 많은 데다가 늘 바쁜 부친은 그녀를 진작에 잊어버린 듯했다. 마치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증오하고 홀로 살다 죽길 바라는 것 같았다.
시녀와 유모는 잠시 동안만 보내진 것이었다. 비록 이름도 잘 몰랐지만 적어도 초왕의 저택에서는 그들이 자신의 최측근이었다. 퍼뜩 정신이 든 백천범은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다.
시녀 네 명의 이름은 각각 청매青梅, 청지青枝, 청병青瓶, 청수青秀였다. 백 승상의 집에서는 허드렛일을 하다가 초왕의 저택으로 와 왕비를 수발하는 시녀가 된 이들이었다.
그녀들의 지위가 조금 높아진 듯했지만, 그들에게서 기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 승상이 다섯째 딸을 군신에게 보낸 것은 죽음으로 내몬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애꿎은 자신들까지 희생양이 된 것 같았다.
시녀들은 이런 고역스러운 일을 원치 않았지만, 신분도 낮고 비빌 언덕도 없으니 윗선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섯째 아가씨를 모시는 것보다 자신들의 목숨을 건사하는 일을 더 중시하기로 했다. 그들은 다섯째 아가씨가 죽은 뒤에 초왕이 자비를 베풀어 자신들을 백 승상의 집으로 돌려보내기만을 바랐다.
두 유모는 더욱더 음흉했다. 그들은 모두 백 승상의 본처 수하에 있던 이들인데, 백천범이 어떻게 사달이 나는지 보기 위해 따라온 자들이었다.
백천범을 집안에서 죽이기 어렵다고 여긴 백 승상의 본처는 그녀를 초왕에게 보냈다. 그들은 백천범이 초왕의 괴롭힘 속에서 빨리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백천범은 그들을 살갑게 대하며 환심을 사려 했지만, 그들은 미적지근한 태도로 백 승상 집에서처럼 그녀를 대했다. 그저 각자 마음속에 품은 일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백천범도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찌하겠는가? 옆에서 수발을 드는 사람이 있으니 적어도 따뜻한 밥은 먹을 수 있었다. 백 승상 집에서 겪었던 투명 인간 생활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대우는 썩 괜찮은 편이었다.
그렇게 백천범이 남월각에 머무르면서 묵용감을 다시 마주할 일은 없었다. 저택 안의 사람들도 그녀를 찾지 않으니 꼭 외딴섬 같았다. 조용하면서 적적한 곳.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백천범은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게 익숙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쨌든 먹고 잘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온순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에 시녀들은 점점 게을러졌다. 두 유모의 꼬드김까지 더해져 백 승상 집에서의 모양새로 돌아가고 있었다. 백천범은 시녀 넷과 유모 둘을 두고도 완벽한 외톨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백천범은 자신의 세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미움 살 짓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립심이 강한 편이었기에 스스로 자신을 돌보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아쉬운 것이 있었으니 그날 이후 그렇게 맛있는 죽을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날, 학평관은 왕비를 이곳으로 안내한 뒤 저택의 규율에 대해 설명했다. 백천범은 그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초왕의 회림각엔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말인즉슨, 마음대로 기홍을 찾아가 죽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왕비가 되려면 답답함쯤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초왕과 백천범의 부친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자연스레 그의 눈 밖에 났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를 칠 명분을 찾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그가 왕비를 죽이는 건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초왕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 남월각에서 단 한 발짝도 떼지 않았다.
* * *
따사로운 봄볕이 내리쬐는 정원에 복사꽃이 아름답게 흩날렸다. 분홍빛 작은 꽃잎들이 땅 위에 켜켜이 쌓여 꼭 옅은 색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했다.
진왕 묵용택墨容澤은 청자 술잔을 들었다 놨다 하며 초왕을 약 올렸다.
“셋째 형님께서 바깥출입도 마다하시는 걸 보니 신혼 생활이 참으로 즐거우신가 봅니다. 형수님과 천생연분인 것이 틀림없겠지요. 금실이 아주 좋으십니다!”
묵용감이 웃으며 대꾸했다.
“허튼소리는!”
묵용택은 크게 소리를 내어 웃더니 금세 낯빛을 바꾸고 초왕에게 물었다.
“형님, 백여름 그 작자가 형님께 딸을 보낸 건 대체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백여름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뜻이네.”
묵용감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황제 폐하와 백여름은 벗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내가 외톨이가 되는 것이 싫으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