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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화 (2/1,192)

제2화

집안의 모든 이들이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했지만 묵용감만은 아침까지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곁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작은 몸집에 손바닥만 한 얼굴. 때마침 눈을 뜬 그 아이와 묵용감의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서로를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분위기 속에서 백천범이 느릿느릿 입을 뗐다.

“두려워할 것 없다.”

작은 계집아이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 한다는 소리가 ‘두려워하지 말라’라니…….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백천범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백천범은 아직 잠이 덜 깬 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 천 년 묵은 여우 신선이다. 어젯밤 천둥 번개가 심해 수행 중에 실수로 인간계에 들어선 것뿐이니 지금 당장 떠나겠다.”

묵용감은 침착하게 그녀를 살펴본 후 되물었다.

“이대로 그냥 가겠다고?”

백천범은 손을 뻗어 포동포동한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

“내 너의 소원을 하나 들어줄 터이니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 가능한가?”

“무엇이든 좋다.”

백천범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사양하지 말고 말하거라.”

“내 침대에서 썩 꺼지거라!”

“…네 감히, 시, 신선에게, 어찌… 무엄하다!”

“신선이 이리도 말을 더듬더냐?”

묵용감이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의 눈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백천범은 곧바로 이불을 걷어 올려 침대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자 그녀의 옷에서 온갖 잡동사니가 후드득 떨어졌다.

묵용감은 고개를 내밀어 떨어진 물건들을 훑었다. 비수, 탄환, 새총, 표창, 땅콩, 용안, 대추, 녹두전병, 떡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닥에 흩어진 물건을 보던 두 사람 사이에 또 한 차례 기이한 기운이 흘렀다. 묵용감이 몸을 일으켜 앉아 물었다.

“대체 누구인가?”

“…나는… 도둑…….”

백천범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묵용감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백천범을 뚫어지게 쳐다봤고, 이에 놀라 다리에 힘이 빠진 백천범은 곧장 무릎을 꿇고 고했다.

“도둑이 아니라 어제 초왕야와 혼례를 치른 왕비입니다. 다들 초왕이 흉측하고 포악한 데다 어린아이의 심장만 먹는다 하기에 너무 무서워 그만 야반도주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만 공자의 방으로 잘못 들어선 것이지요.

공자, 부디 이 소녀의 목숨을 살려 주시어요. 떠나게만 해 준다면 공자가 피해 볼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모두 털어놓으며 빠르게 말했다. 묵용감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그녀를 차분히 응시하며 말했다.

“초왕이 그리도 포악하다면 너희 부모는 어찌 너를 그에게 보냈단 말인가? 영영 돌아오지도 못할 텐데?”

“제가 첩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집에서는 거의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지요. 위의 세 언니 모두 이 혼인을 원치 않으니 아무런 힘이 없는 절 보낼 수밖에…….”

백여름 이 자가 가장 보잘것없는 아이로 골라 그에게 보낸 것을 안 초왕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고개를 들라.”

백천범은 공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순간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가냘픈 얼굴을 내비쳤다.

묵용감의 미간이 한껏 더 일그러졌다. 역시 영락없는 어린 계집아이의 모습이었다. 어젯밤에도 체구가 너무 작다 싶더니만, 환한 낮에 보니 꼭 복숭아나무에 막 열린 푸르스름한 복숭아같이 풋내가 났다.

그는 냉소를 지었다. 백여름이 이리도 어린 아이를 보내다니. 이 애가 신방에서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단 말인가?

“몇 살이냐.”

“열… 셋이옵니다.”

열셋이라니. 끽해야 여덟, 아홉으로밖엔 보이지 않았지만, 열셋이라 한들 너무 어렸다. 백여름에게는 분명 열다섯과 열여섯의 혼기가 찬 딸이 있거늘. 열셋의 아이를 보낸 것은 일부러 그를 능멸하려 한 것이 분명했다.

묵용감은 습관적으로 손가락에 낀 옥반지를 만지작거리다 아직 세안도 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그의 목소리에 문이 곧장 열리더니 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기침하셨습니까? 소인 들어가겠사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발을 들추고 기홍과 녹하가 들어왔다. 한 명은 대야를, 다른 한 명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입을 헹구는 잔과 수건, 치분, 미안수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기홍과 녹하는 무릎을 꿇고 있는 백천범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초왕의 시중을 드는 시녀였기에 황급히 놀라움을 숨기고 못 본 척 넘겨야만 했다. 두 시녀들은 능숙하게 눈을 내리깔고 침착함을 유지했다.

백천범은 조금 난처했다. 공자의 방에 잘못 들어와 동침을 하긴 했지만 의도치 않은 실수일 뿐이었다. 명색이 백씨 가문에서 시집온 사람인데 여기서 무릎을 꿇고 있다니,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그녀는 공자가 세안하는 틈을 타 슬쩍 벽을 짚고 일어났다.

“꿇거라.”

묵용감이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를 펴기가 무섭게 백천범은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를 왜 이렇게나 무서워하는지 본인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신도 분명 백 승상 집의 다섯째 딸이거늘. 저자는 백 승상이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정말인지 흉악스러웠다. 둘째 오라버니보다도 더 포악한 듯했다. 그러니 꿇으라면 꿇는 수밖에. 준수한 이 공자의 손에 죽는 것이 군신 초왕에게 고통받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기홍은 더러워진 물을 버리고 돌아온 뒤 말했다.

“학평관 어르신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묵용감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할 말이 있거든 밖에서 하라고 전하라.”

문밖에서 초왕의 말을 들은 학평관은 벌벌 떨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왕야가 이미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왕야,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묵용감은 기홍과 녹하가 입혀 주는 옷을 입고는 냉정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여 달라는 것이냐?”

학평관은 압박감에 심장이 더욱 조여 왔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제 혼례를 마친 후부터 왕비 마마께서 보이시질 않사옵니다. 소인이 어젯밤 온 저택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결국 찾지 못하였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왕야!”

문발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대화 덕에 백천범도 이 상황을 똑똑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왔다.

눈앞에 있는 이 공자가 초왕이라니……. 가마솥 바닥처럼 까만 피부에 방울같이 커다란 눈, 각진 입, 들창코와 뾰족한 이는 어딜 가고……. 그런 그에게 자신이 천 년 묵은 여우 신선이라고 속이기까지 했으니 그녀를 죽일 게 불 보듯 뻔했다.

묵용감은 창백해진 얼굴로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제야 좀 만족스러워졌다. 그는 팔뚝을 살짝 휘둘렀다 떨어트리며 말했다.

“발을 걷어 올리거라.”

녹하가 서둘러 문발을 걷어 올렸다. 학평관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곁눈질만 하다 방 안에 누군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진홍색의 신부 예복을 입고 있는 듯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위쪽으로 슬며시 시선을 옮긴 그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밤새 찾아다닌 왕비가 이곳에 있다니.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허면, 어제 이곳에서 이미 합방을 하셨단 말인가?

“왕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젯밤 이곳에서 묵었을 뿐이네.”

담담한 말투에 학평관의 등에 다시 식은땀이 맺혔다. 초왕의 처소 회림각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엔 후원을 나누는 높은 담이 세워져 있었고, 둥근 아치형의 문으로만 통행할 수 있었다.

분명 허둥지둥 도망가던 왕비가 이곳으로 뛰어들었고, 그녀를 발견한 왕야가 크게 놀랐을 터였다. 이 사달의 모든 죄는 결국 학평관에게 있었다.

마침내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왕비가 이곳에 처음 발을 들여 저택의 규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총 관리인인 자네가 충분히 보필하여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예, 왕야. 소인 왕비 마마를 처소로 모신 후 곧장 곤장을 맞으러 가겠사옵니다.”

학평관은 심장이 벌렁거릴 만큼 두려웠지만, 겉으로는 당황한 기색 없이 눈을 내리깔며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백천범의 눈에는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백 승상의 집에서 곤장을 친다 하면 어느 하인이든 목 놓아 울며 한바탕 소란을 피울 텐데, 초왕의 사람들은 이리도 평온하다니. 맞는 게 무섭지도 않은 것인가?

그녀는 너무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발 전체가 저려 왔다. 그런데도 초왕은 일어나라는 말을 하질 않으니 소문대로 그는 냉혈한인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얼굴과 달리 못된 그의 품성을 탄식했다.

기홍은 하던 일을 마치고 묵용감에게 아뢰었다.

“왕야, 아침 수라는 화원에 준비하겠습니다. 복숭아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으니 경치를 감상하시며 수라를 드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그래, 그리하자꾸나.”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천범은 깜짝 놀랐다. 초왕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방금 전 대답에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홍을 자세히 보니 단정하고 수려한 외모에 선하기까지 한 모습이 분명 빼어난 미인이었다. 다시 녹하를 바라보니 계란형 얼굴에 늘씬한 체형, 살짝 올라간 눈꼬리까지 기홍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미인이었다.

이렇게 예쁜 두 여인이 매일같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분명 초왕은 이들을 진작에…….

백천범은 나이도 어린 데다가 투명 인간처럼 살아왔지만, 집안의 더럽고 추한 꼴은 모두 보고 자랐다. 큰 오라버니, 둘째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들은 틈만 나면 시녀들을 바꿔 댔다. 건드리지 않는 시녀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초왕에게 정을 나누는 시녀가 둘이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평범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군신 초왕과 합방이라도 한다면 작은 체격의 그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꽃처럼 어여쁜 두 언니가 그녀를 대신하고 있으니 잠시 그를 피할 시간을 번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기홍과 녹하에게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묵용감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큰 보폭으로 문을 나섰다. 녹하가 그의 뒤를 따라나섰고, 기홍은 방에 남아 침상을 정리했다.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백천범을 본 그녀는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 힘드셨지요. 다리가 저리진 않으십니까?”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여긴 백천범이 답했다.

“언니가 고생이 많으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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