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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1)화 (1/1,192)

제1화

3월의 어느 봄날, 임안성臨安城이 유달리 시끌벅적했다.

번화한 저잣거리인 금성대로에는 신부 측의 붉은 대열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졌다. 떠들썩한 구경거리를 놓칠세라 구름처럼 밀려드는 인파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든 오늘이 동월국東越國의 군신軍神, 초왕야의 혼삿날이기 때문이었다.

초왕야는 두세 살 남짓의 어린아이들에게조차 그 명성이 대단했다. 소문에 그는 칠흑같이 검은 얼굴에 커다란 눈, 네모난 입과 높이 솟은 들창코를 가졌으며 입술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기다란 이로 어린아이의 심장을 즐겨 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말을 타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백옥처럼 맑고 고왔다. 봉황의 눈처럼 가늘고 긴 눈꼬리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모습에서 요괴의 흔적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준수한 미남임이 분명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가 초왕야가 아닌 초왕의 동생 진왕晋王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왕이 정사를 돌보느라 제때 오지 못해 대신 진왕을 보내 신부를 먼저 맞이한 후, 혼례식 때쯤에야 그가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진왕 또한 명성이 자자한 왕이었다. 그는 풍류를 즐기는 호방한 성격에 재능도 뛰어났다. 시는 물론이고 금琴, 바둑, 회화 등 각종 기예에 능해 귀족 여인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이따금씩 진왕을 두고 어느 집 규수와 황족의 공주가 서로 질투하여 다투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진왕은 개방적인 성격 덕에 규수들과 가깝게 지내면서도 기방에서의 즐거움 또한 놓치지 않았고, 임안성의 내로라하는 여인들과 한데 어울려 지내는 인물이었다.

형은 소문만으로도 모두를 두렵게 하는 군신인데, 동생은 황족부터 기방까지 모든 여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사랑꾼이라니. 백성들은 두 형제의 간극에 혀를 내둘렀다.

한편, 초왕 묵용감墨容澉은 천천히 말을 몰며 입성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북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태평소 소리는 땅을 울릴 기세였다.

묵용감은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한가롭게 말을 몰았다. 묵용감을 따르는 신하 가동賈桐은 힐끗 살펴본 그의 얼굴이 온화하자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왕야, 빨리 왕비 마마를 뵙고 싶지 않사옵니까?”

“어차피 곧 보게 될 터. 도망가지도 못할 텐데.”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듣자 하니 귀비 마마께서는 선녀처럼 아름다우시다고 하던데, 여동생이신 왕비 마마도 분명 엄청난 미인이시겠지요.”

가동이 말했다.

“왕비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것이냐? 하면 내일 왕비와 이 혼인을 무르고 너와 인연을 맺어 줄까?”

묵용감이 그를 흘겨보며 대꾸했다.

가동은 크게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왕야, 저는 그저 왕야의 혼례가 너무 기뻤을 뿐이옵니다.”

가동이 울상을 하며 말했다.

줄곧 침묵을 지키던 영구寧九가 가동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왕비 마마를 맞는 일은 형님이 간섭할 일이 아닙니다. 결국은 백 승상 댁의 따님이시니.”

묵용감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채찍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백여름白如廪이 그의 거처까지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가 보낸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뒤쪽에 있던 가동이 목소리를 잔뜩 깔고 말했다.

“백 승상 댁 따님이 뭐 어떻다고. 그 집안에 미인이 얼마나 많은데. 두고 봐, 왕야도 결국엔 못 참을걸.”

영구는 가동을 한 번 흘겨보고는 고삐를 당겨 서둘러 그의 곁에서 떨어졌다.

“왕야의 마음이 조급한 건 알겠는데, 영구 너는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건데? 설마 너도 왕비 마마를 빨리 뵙고 싶은 거야?”

가동이 푸념하듯 말했으나 영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동은 조용히 말을 몰았다.

* * *

묵용감이 저택에 도착하자 하인들이 잽싸게 환복을 도왔다. 머리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금관을 쓰고, 자금색과 진홍색 바탕에 ‘복’자가 새겨진 예복을 입었다. 허리에 옥대까지 매고 나니 어두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외모는 원래도 준수했지만 이렇게 차려입고 나니 그 풍채가 극에 달했다. 명성이 자자하던 진왕보다 한 수 위인 듯 보였다.

사실 이들 형제의 외모는 매우 닮아 있었다. 다만 진왕은 피부가 희고 성격이 점잖아 보이는 반면, 묵용감은 늘 전쟁터에서 고생을 하니 구릿빛 피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리 단장을 하고 보니 건장한 풍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환복을 끝나자 시녀 기홍綺红과 녹하綠荷가 그에게 경하 인사를 올렸다. 묵용감은 그들에게 상을 내린 뒤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앞쪽 문을 열었다.

부축을 받아 꽃가마에서 내리는 어린 신부를 본 묵용감은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작아도 이렇게나 작은 신부라니……. 신부인지 신부 측에서 함께 보낸 어린 몸종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꼭 한겨울 자라다 만 나뭇가지에 봉황 장식의 관과 수가 놓인 예복을 걸쳐 놓은 듯 초라했다.

묵용감은 의심이 담긴 목소리로 시중을 드는 여인들에게 물었다.

“잘못 모셔 온 것 아니오?”

“왕야께 아뢰옵니다. 잘못 모셔 온 것이 아니라, 이분이 백 승상 댁의 다섯째 아가씨이옵니다.”

그녀는 덜덜 떨며 말했다. 군신 초왕 앞에서 자신이 잘못 말한 게 있진 않은지 곱씹는 모양새였다.

묵용감은 애초에 백씨 집안 다섯째 딸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신부가 맞다 하니 그는 우선 의심을 거두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백여름은 감히 그에게 수작을 부릴 위인이 아니었다.

혼례식 후 대청에 연회상이 차려졌다. 자신의 혼례인 터라 묵용감이 자리를 피할 길은 없었다.

* * *

신부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후원에 있는 신방에 들었다. 마침내 주변이 조용해지자 신부 백천범白千帆은 붉은 면사포 아래를 곁눈질로 흘끔거렸다.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면사포를 휙 걷어 올렸다. 이왕 얼굴을 드러냈으니 방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진홍색 침대에는 원앙이 수놓아진 이불과 연꽃 두 송이가 새겨진 침대보가 깔려 있었다. 창에는 ‘쌍 희’자가 붙어 있고 장식장에 놓인 화촉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방 모서리마다 걸린 네 개의 연화등이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백천범은 조심스럽게 붉은 면사포를 벗어 침대 위에 내던진 뒤 머리를 더듬거리며 봉관을 고정한 매듭을 천천히 풀었다. 팔을 높게 들고 있으니 금방 저려 와서 풀다 쉬기를 세 차례나 반복한 끝에 무거운 봉관을 벗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세 시진時辰(옛날 두 시간을 세던 단위)째 음식은커녕 물도 입에 대지 못했다. 만약 옆에서 부축해 주는 시녀들이 없었다면 절을 올릴 때 앞으로 고꾸라져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탁자에는 간식거리가 놓여 있었고 침대 위에도 대추와 용안, 땅콩 같은 것들이 잔뜩 흩뿌려져 있었다. 준비성이 철저한 그녀는 나중을 대비해 그것들을 양손 가득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뒤이어 그녀는 탁자에 놓인 차와 함께 간식을 두 접시나 먹어 치웠다. 배가 차면 재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남은 간식 두 접시도 주머니 속으로 털어 넣었다. 창문 밖을 탐색한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살금살금 신방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초왕의 저택이 이리도 자유로울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보초를 서는 이가 없어 손쉽게 탈출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 숨겨 두었던 무기는 쓸모가 없어졌다.

요 며칠간 그녀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며 팔자가 좋다고 떠들어 댔다. 초왕에게 시집을 가면 앞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원 없이 살 거라고.

그녀는 몇몇 언니들에 비해 총기가 떨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이 혼인이 진정 그리도 좋은 일이었다면 혼기가 찬 세 언니들에게 기회가 갔을 것이다. 헌데 환영도 못 받는 첩의 딸을 보냈으니 이것으로도 설명은 충분했다.

초왕이 군신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 그를 피해 숨는 것도 부족한 판국인데 시집을 오다니,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온 격이 아닌가?

* * *

묵용감은 한바탕 손님치레를 한 뒤 홀로 서재에 들었다.

군사 업무 등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나 주고받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황제가 맺어 줬다지만 그에게는 원치 않는 혼인에 불과할 뿐, 그저 형식적인 혼례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아무도 그를 신방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 조용히 업무를 마쳤고 책까지 읽은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하인들이 그를 신방으로 모시지 않은 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하객들이 남아 있는 이 상황에 신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감히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걸 그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이는 큰 벌을 받을 만한 죄였다. 신부가 사라진 것을 처음 발견한 시녀는 두 눈이 뒤집혀 문 앞에서 혼절해 버렸다. 이를 본 다른 시녀가 곧장 저택의 총 관리인 학평관郝平貫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대청에서 정신없이 손님 접대를 하던 학평관은 이 소식을 듣고 놀란 나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급히 후원으로 달려온 그는 인부들을 불러 신부를 찾기 시작했다.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분명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빠르게 신부를 찾아와 왕야를 신방으로 모셔야만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나절이 지나 하객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신부의 흔적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저택의 모든 인부가 뜨거운 솥 안의 개미처럼 허둥댔지만 그 누구도 감히 묵용감에게 이 사실을 고하지 못했다. 이 일이 밖으로 퍼진다면 시집온 어린 신부마저 초왕의 포악함에 도망가 버렸다며 만백성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온 저택을 샅샅이 뒤졌지만 신부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더 이상 이 사실을 감출 수 없다고 여긴 학평관은 하는 수 없이 초왕의 처소로 향했다. 처소 앞에 다다르니 정원이 칠흑같이 어두운 것이 묵용감은 이미 침소에 든 것처럼 보였다.

묵용감은 잠에서 깨면 유난히 성질이 곤두서곤 했다. 예를 들어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그의 단잠을 깨웠을 땐, 벌로 채찍질을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학평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무척이나 난감해했다. 보고하자니 채찍이든 곤장이든 벌을 받을 게 당연지사요, 보고를 안 하자니 백 승상의 딸을 달가워하지 않는 왕야는 신부가 죽든 말든 개의치 않아 할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학평관은 결정을 내린 후 몸을 돌려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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