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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300)화 (30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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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화 딱 좋은 날이군(완결)

야신근은 예를 올린 뒤, 궁인을 따라갔다.

야홍릉은 말없이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근이는 고분고분해 보이나 생각이 적지 않아.”

용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자식은 단순한 것보다 생각이 많은 게 좋지요.”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우리도 가서 보죠.”

자신궁은 헌원자롱이 홀로 사용하는 궁전이었다.

주 침전은 그녀가 사는 곳이었고 난각(暖閣)은 책을 읽고 쉬는 곳이었다.

자신궁은 주전이 한 칸, 편전이 여섯 칸이고 궁 밖에는 정자와 회랑이 있었다.

또 널따란 호수가 있어 헌원자롱은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 다른 때에는 늘 밖의 정자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헌원자롱과 반독들이 수업을 듣는 곳은 상서방(上書房)이었다.

자신궁에 돌아온 뒤, 그녀가 만약 동난각에 있다면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헌원자롱은 밖의 의자에 앉아 호수의 물보라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궁에서 구성진 고금 소리가 들려왔다.

고금 소리는 초보자가 연주한 탓에 서투른 느낌이 있지만 아이가 연주한다 치면 충분히 훌륭한 실력이었다.

화청의 정중앙에서 여덟 살 남짓한 두 남자아이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한 명은 검은색 옷을, 한 명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

흑백의 조화가 유난히 보기 좋았다.

구석에는 파란색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가 책상에 마주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화청 밖의 정원에서 녹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깔끔한 검술을 자랑하고 있었다.

헌원자롱의 옆에는 곱상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차를 타고 있었다.

암홍색 허리띠로 경포를 두른 훤칠한 소년이 공주의 옆에서 눈을 내리깐 채, 시중을 들고 있는 모습은 아름다운 화면을 연출했다.

아니, 화청 전체가 아름다운 화면이었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화청 안과 근처에서 놀던 소년과 소녀들이 행동을 멈추고 빠른 속도로 화청 밖으로 뛰어나왔다.

공주의 옆에서 시중 들던 암홍색 경포의 소년만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이곳에 온다.

이 말은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이나 아이들에게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누군가’라는 것은 낯선 사람을 가리켰다.

그들의 영역에 낯선 사람이 침입했다는 말이었다. 아이들은 바로 경계 태세로 들어갔다. 그들은 나이가 어리고 몸이 약해 강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영역과 주인을 지키는 것을 책임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외부인이 약자라고 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외부인이 강자라고 해서 물러서지 않았다.

야신근은 궁인의 안내를 받으며 자신궁에 도착했을 때, 열 명의 아이들이 일렬로 서서 그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이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녕.”

누구도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적의 어린 시선에 야신근은 자신이 흉악하게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궁인도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흠칫 놀라며 해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야신근은 해맑게 웃으며 뒷짐을 진 채, 앞으로 걸어갔다.

반독들은 표정이 굳으며 야신근의 앞길을 막았다.

야신근은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은 뒤, 몸을 날려 뛰어갔다.

반독들도 빠른 속도로 그를 잡으려고 했다.

어린아이들끼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화청에 앉아 있는 요요는 지금 상황에 관심이 없는 듯 지켜보고 있다가 암홍색 경포의 소년에게서 찻잔을 받아 가볍게 마셨다.

싸움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나이가 가장 커 봤자 열 살이었고 제일 어린 아이는 일곱 살이어서 무공 실력이 어른들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싸움은 치열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인원수가 많은 쪽이 이기나 오늘은 달랐다.

남자아이 여덟 명과 여자아이 두 명은 야신근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우르르 쓰러지고 말았다.

일곱 살 된 야신근은 우아하게 옷을 정리하고 넘어진 반독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한 뒤,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만나서 반갑구나. 나는 야신근이고 헌원자롱의 남동생이다.”

그는 한마디 더 붙였다.

“같은 부모님을 둔 친동생이지.”

쓰러진 아이들은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외부 침입자가 공주의 동생이라고 자칭해도, 그의 외모가 황제, 공주와 비슷하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그는 외부 침입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외부 침입자는 늘 사람들의 배척을 받는 편이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침입자가 너무 강해 처음의 경계심은 증오로 바뀐 지 오래였다.

화청 안.

일곱 살 공주는 의자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이 광경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실력도 안 되면서 굴복하지 않다니. 참 대단하구나.”

소년들은 이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하며 다급히 땅에서 일어났다.

“정원에 가서 무릎을 꿇고 있거라.”

헌원자롱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이의 앳된 티가 묻어났지만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을 담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열 명의 아이는 줄을 서서 조용히 정원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야신근은 화청으로 들어간 뒤,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신근이 누님을 뵙습니다.”

헌원자롱이 그를 힐끗 보고 물었다.

“언제 온 것이냐?”

“아침에 왔습니다.”

그는 대답하고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님, 화를 낼 것 없습니다. 모두 어린아이들인데…….”

헌원자롱은 그의 말을 잘랐다.

“네가 그들보다 크냐?”

야신근은 말문이 막혔다.

일곱 살 난 아이가 그들보다 더 큰 소년들을 두고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다니.

참 우스운 일이었다.

“앉아라.”

헌원자롱이 담담하게 물었다.

“뭘 마실 것이냐? 매실즙?”

야신근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헌원자롱은 지시를 내렸다.

“물을 따라 오너라.”

시녀는 야신근에게 뜨거운 물을 가져왔다.

너무 뜨거운 탓에 옆의 탁자에 두고 식히기로 했다.

야신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님, 감사합니다.”

헌원자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앳된 얼굴이 침묵을 지키자 설산처럼 한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누님, 화내지 마십시오.”

야신근은 아까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도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한창 크는 나이에 어찌 밥을 먹지 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차라리 절 벌하여 주십시오.”

헌원자롱은 시선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그저 그들이 실력도 너보다 못하면서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것을 벌한 것인데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넌 내가 널 감싸느라 이러는 것으로 보이냐?”

야신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말은 분명했다.

‘내 사람은 잘못을 하면 벌을 받아야 한다. 네가 내 동생인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괜한 생각은 하지 말아라.’

몰래 뒤따라온 용수와 야홍릉은 나무 위에 서서 오랜만에 만난 남매를 지켜보고 있었다.

거리가 먼 탓에 그들은 두 아이가 하는 말을 잘 듣지 못했다.

그러나 용수와 야홍릉은 야신근이 혼자서 열 명의 아이를 쓸어 눕힌 장면과 열 명의 아이들이 나란히 벌을 받으러 간 광경을 지켜보았다.

용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신근이의 무공 실력이 대단합니다.”

그는 아들이 목국에서 무공을 열심히 익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이가 이제 일곱 살밖에 안 된 데다 평소 점잖고 온화하기만 하여 무공 실력이 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날 때마다 그는 기껏해야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묻고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정을 쌓는 데 보냈다.

야홍릉은 아이를 곱게만 키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야신근도 그녀의 옆에서 충분히 좋은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녀가 목국의 차기 황제를 훌륭히 키울 것을 잘 알기에 용수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아이와 정을 쌓는데 치중했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야홍릉이 말했다.

“해맑고 순수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속에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법이지.”

용수는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애비의 말씀이 맞습니다. 일곱 살 된 아이가 이토록 침착한 경우는 많지 않지요.”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보는 야신근은 천성적인 귀공자 느낌이었다.

그는 차분하고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따뜻했다. 그러나 그는 보여지는 것처럼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일을 할 사람 같았다.

용수는 두 아이를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신근이와 자롱이는 오만하지 않은데 아비인 제가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 큰일입니다.”

야홍릉은 한심한 눈빛으로 용수를 흘겨보았다.

용수는 미소를 지으며 야홍릉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둘은 함께 나무 위에 누웠다.

“이렇게 훌륭한 두 아이가 우리 아이라니. 너무 뿌듯하지 않습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년만 더 지나면 천하가 이 아이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용수는 고개를 돌리고 야홍릉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홍릉, 애들이 다 크면 우리는 지금 하던 일을 내려놓고 놀러 다닙시다. 그러나 조용한 곳을 만나면 그곳에 한동안 머무르고요. 그렇게 누구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신선놀음이나 하면서 지내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수는 미소를 지었다.

“강산을 버리기 아깝지 않습니까?”

“아까울 게 뭐가 있다고? 집념과 미움이 사라지면 모든 게 홀가분해지는 거야. 아이들도 원하는 게 있겠지. 자롱이와 신근이가 각자 바라는 삶이 있을 테니 우리는 너무 반대하지 말고 자연의 순리에 맡기도록 하지. 지나치게 간섭하지 말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들이 천하를 망하게 하거나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는 이상, 하려고 하는 대로 내버려둘 생각입니다. 인생은 놀이인 셈이니까요.”

야홍릉은 팔을 들어 용수의 목을 끌어안았다.

“영웅들이 소견도 비슷하군.”

용수는 그 말에 활짝 웃었다.

그는 야홍릉을 끌어안고 부드럽게 말했다.

“애비 같은 아내를 맞이했는데 남편인 제가 무슨 요구가 있겠습니까?”

야홍릉은 실눈을 뜨고 말했다.

“이 좋은 시간을 그냥 여기서 오글거리는 얘기나 하면서 보낼 거야?”

용수는 흠칫 놀라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애비의 말씀이 맞습니다. 좋은 시간을 이렇게 낭비할 수는 없지요. 더 즐거운 일을 해야 하지요.”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을 안고 자신궁의 방향으로 사라졌다.

귓가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햇살도, 바람도 적당했다.

‘정사를 벌이기 딱 좋은 날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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