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외모를 밝히다
이때, 어화원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요를 홀로 자신궁에 남겨 두었더니 걱정이 되는군. 빨리 돌아가야겠어.”
“정려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간만에 만났는데 이런 분위기를 즐겨야지요.”
용수의 구성진 목소리가 들리자 야홍릉은 쏘아 붙였다.
“오래된 부부가 무슨 분위기를 즐겨?”
“누가 오래된 부부라고 그럽니까? 애비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는데. 우리는 신혼이라고요.”
둘은 함께 어화원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었고 좀 떨어진 뒤에서 궁인들이 따르고 있었다.
감진과 영린은 침묵을 지키다 조용히 일어서서 걸어갔다.
용수와 야홍릉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화원은 작지 않은데 바로 이렇게 딱 마주친 게 이상하긴 했지만 영린은 찔릴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숨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날도 어두웠고 다른 나라에 있기에 괜한 구설수에 오를 일은 하지 말자고 생각한 그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황제와 신하 둘이서 나랏일이라도 의논한 것입니까?”
용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물론 아닙니다.”
영린이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연회가 너무 시끄러워 조용한 곳을 찾은 것입니다. 감진은 짐이 걱정되어 궁인에게서 짐이 있는 곳을 알아내서 온 곳이고요. 두 폐하께서 분위기를 즐기려고 온 것인데 저희 때문에 기분을 망쳤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옆에 서 있던 감진이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매력이 담겨 있었다.
용수도 분위기를 내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와 야홍릉은 모두 분위기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위기를 따지기보다 욕지나 침대에서 격렬한 정사를 벌이는 것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겉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었다.
둘은 얘기를 나눈 뒤, 각자 궁으로 돌아갔다.
용수는 딸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요요는 정려의 보살핌으로 갓 씻고 나와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요요의 표정은 한결 같이 싸늘했다.
요요는 용수의 친밀한 행동에 거부감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데려가서 재우거라. 요요가 졸린 것 같구나.”
용수는 아이를 정려에게 넘겨주었다.
정려는 예를 올린 뒤, 요요를 안고 떠나갔다.
용수는 고개를 돌려 야홍릉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애비, 우리도 목욕을 하죠.”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말을 이었다.
“오늘밤은 우리의 신혼 첫날밤이지 않습니까?”
야홍릉은 그를 흘겨보았다.
‘신혼 첫날밤? 애가 둘인데 신혼 첫날밤은 무슨.’
하지만 용수가 신나하니 그녀도 괜스레 분위기를 흐리지 않았다.
둘은 더운 안개가 피어오르는 욕지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할 만큼 했으니 나머지는 영린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용수는 야홍릉의 어깨를 주무르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감진도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야홍릉은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진에 대한 기억은 처음 공주부에 들어왔을 때에 멈춰 있었다.
마른 몸에 파란색 경포를 입고 부채를 든 그는 우아하고 풍류스러웠고 왠지 모르게 요염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그는 빙란각에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치명적인 매력은 풍류스러운 곳 출신의 공자다웠다.
그러나 감진을 알게 될수록……
사실 야홍릉은 감진을 잘 알지 못했다.
측부 여섯 명을 들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야홍릉은 목국을 떠났다. 그래서 감진에 대한 이해는 암위에게서 들은 게 대부분이었다.
야홍릉은 암위에게서 얘기를 듣고 감진이 그저 평범한 기루 출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진은 분위기가 다양한 사람이었다.
요염할 때도 있고 매정할 때도 있으며 파악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동제로 돌아온 뒤의 감진을 만났을 때, 야홍릉은 그에게서 풍류스러운 끼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온몸을 맴도는 분위기는 차분한 학자로 변해 있었다.
고요한 눈에는 전처럼 장난스러운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우아하고 평온하기만 했다.
“그의 눈에는 미움이 없었어.”
야홍릉은 생각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예전의 일로 상처를 받았을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를 미워한 적은 없었어. 그가 떠난 것도 더 이상 영린과 엮이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그러나 영린은 결국 그가 가르친 제자잖아? 감진은 분명 영린을 성심껏 가르쳤을 거야. 그러나 둘의 사이는 그렇게 자른다고 끊어질 사이가 아니라는 거지.”
용수는 야홍릉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진 같은 성격은 흔치 않습니다.”
감진은 지나치게 부드럽고 너그러웠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사실 둘의 기억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영린은 이미 우위에 있었다. 나약한 그의 약점이 감진과의 사이에서 오히려 우세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들 얘기는 그만하시죠.”
용수는 야홍릉의 허리를 끌어안고 턱을 그녀의 하얀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만 잘 지내면 되지요.”
영린이 간밤에 했던 말 몇 마디로 감진은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 이는 그가 원래도 영린에 대한 정을 잘라내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영린이 곧 죽는다 해도 감진은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영린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감진에게 충격적인 일일 수 있으나 그냥 거기서 끝이 났을 법도 했다.
그러나 감진은 놀란 데서 끝나지 않고 영린을 찾으러 나갔다.
용수와 야홍릉은 원래도 말주변이 없었다.
영린은 나이만 그들보다 좀 어릴 뿐, 머리나 생각이 뒤처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욕지의 온도가 점점 올라갔다.
안개가 아른거리는 수면이 파문을 일으키더니 둘의 움직임에 따라 물보라가 점점 커졌다.
* * *
구월 말, 대전이 끝났다.
시월 초, 남성국에서 보름 동안 있은 영린은 감진과 함께 제국으로 돌아갔다.
“신은 폐하께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감진은 마차에 앉아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영린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뭘요?”
“폐하께서 수명이 짧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폐하께서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면 저는 폐하의 요구대로 승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감진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린은 그 말을 듣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감진은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영린은 가볍게 기침했다.
“수명이 짧다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묵백 대제사의 말대로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게…….”
감진은 그의 말을 잘랐다.
“신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영린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탑에 기대어 그에게 그 일을 어떻게 설명할지 생각했다.
“사실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닙니다……”
영린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짐이 잘못한 것이니 돌이키고 싶어서…….”
감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돌이킬 것입니까?”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겠어?’
영린은 마차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미 지난 일이니 더 이상 얘기를 꺼낼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말하세요.”
감진이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영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꿰뚫어볼 것 같은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짐이 대제사에게 부탁해…….”
감진은 영린이 머뭇거리면서 하는 얘기를 조용히 들었다.
그는 영린이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수명도 별일이 아닌 양 넘기는 영린의 말에 항상 온화하던 감진은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의 차가워진 분위기에 영린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 * *
날씨가 차가워지자 야홍릉은 궁에서 황제와 함께 상주서를 읽으며 국가대사를 의논하고 종친 여인들도 만났다.
시월 말, 야홍릉은 궁에서 꽃구경 연회를 주최했다. 황족 여인들을 초대하여 서로 얼굴을 익히고 친해지자는 목적이었다.
시간이 하루하루 지났다. 황제와 황후는 감정뿐만 아니라 조정의 대사를 보는 견해까지 똑같아 의논 도중 다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둘은 단호한 황제였지만 둘만 있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성격이 온화해지며 서로 상대방을 위해 자세를 낮추는 사람들이었다.
십이월 초, 매화가 활짝 피었다.
황제와 황후는 궁에서 매화 연회를 주최했다.
연회가 끝난 뒤, 다음날, 세 식구는 자신궁에서 따뜻한 식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야홍릉은 남편과 딸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홀로 목국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탔다.
그녀는 아쉬움 가득한 용수의 눈빛을 뒤로 하고 남성국을 떠났다.
새해 전에 목국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몇 달간의 만남 뒤에는 몇 달간의 이별이 뒤따랐다.
만남과 이별의 반복과 함께 둘의 사랑은 그리움에 젖어 점점 더 진하게 변했다.
이듬해 봄, 용수는 딸을 데리고 목국에 가서 몇 달 머물렀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긴 하나 어깨에 짊어진 책임 때문에 당분간 이런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자 헌원자롱은 점점 커갔다. 길도 잘 걷고 말도 또박또박 했지만 삼 년간 한결 같이 과묵하고 싸늘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헌원자롱은 온종일 말을 하지 않았다.
헌원자롱의 측근 시녀인 정려도 삼 년간 공주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헌원용수는 딸이 그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다.
예전에는 아이가 어려서 말을 잘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태생이 도도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는 딸이 점점 어미를 닮아간다고 생각했다. 부부는 이 일에 대해 적잖게 얘기를 나눴지만 야홍릉의 생각은 용수와 좀 달랐다.
야홍릉은 딸의 성격이 자신과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뭐가 다른지 그녀도 잘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주에게도 눈에 띄는 특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주는 미인을 좋아했다.
공주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아이였다.
이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홍제 오 년, 삼월.
야홍릉과 용수는 조정대사를 마무리하고 아들딸과 함께 밖으로 놀러 나갔다.
제국 도성에 지날 때, 우연히 예쁘게 생긴 아이를 본 요요는 그 아이더러 자신의 반독이 되어 달라고 떼를 썼다.
그 남자아이는 여섯 살이고 요요는 세 살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아름다운 아이는 감진의 사촌 조카였다.
감진은 그때 이미 제국의 최연소 승상이 된 후였다.
감진의 사촌 형은 소문난 바람둥이였는데 정실을 제외하고도 여섯 명의 첩실을 들였다. 그것으로 부족한지 매일 여인들을 집적거리고 다녔다.
이 아이의 이름은 감금화(甘錦華)로, 여섯 번째 첩실이 낳은 아이였다.
출신은 고귀하지 않으나 감씨 가문의 아이는 모두 출중한 외모를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이 아이는 유독 예뻤다.
단순히 외모로만 본다면 감진과 견줄 수 있는 정도였다.
아이는 성격도 조용했다.
외모를 빼더라도 성격도 요요의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