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정해진 순리
영린은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나를 아이로 보는 것이냐?”
“아이 아닙니까? 전생의 나이까지 더한다고 해도 소년입니다.”
묵백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영린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는 법입니다. 자신의 우세를 최대한 이용하십시오. 그러면 원하는 효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영린은 어화원의 환한 불빛을 바라보았다. 꽃들은 밤에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청초한 꽃, 고귀한 꽃, 요염한 꽃……
꽃들도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영린은 한숨을 내쉴 뿐,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저는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으시면 이곳에 좀 더 머무르십시오. 어쩌면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묵백이 말했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
영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에 서 있으면 미인이 와서 안기기라도 한대?’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린은 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묵백이 떠난 뒤, 영린은 긴 의자에 누웠다.
연회의 떠들썩한 분위기보다 조용한 이곳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더 나았다.
‘묵백은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고 했어. 또 나더러 최대한 우세를 이용하라고 했는데…… 나라고 이치를 모르겠어?’
전생에 사람의 마음을 꽉 움켜쥐고 이용했던 영린은 수단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일이 마음속 상처로 남은 지금, 그는 함부로 수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전생에 치른 대가가 너무 커서 그는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린은 의자에 누워서 별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에 수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묵백이 그에게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할 것과 천하가 곧 통일될 것임을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자미제성이 이미 나타났다고 했다.
이 말에 영린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아서 제국에 미안한 마음을 품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철없는 행동에 그 사람이 실망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 모든 게 다 정해진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운명.’
영린은 처음으로 이 말이 참 기분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폐하, 이곳에서 뭘 하십니까?”
맑은 목소리와 함께 경포를 입은 남자가 위에서 불쑥 나타나 누워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표정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영린은 의자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대전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
감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스승님.”
영린은 낮게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스승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감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년은 눈을 감은 채, 꿈을 꾸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눈에서 물방울이 나오더니 떨리는 속눈썹에 의해 툭 하고 떨어졌다.
소년은 슬픔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진은 조용히 서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영린은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는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감진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밤이 추우니 궁에 들어가 주무십시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
감진은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렸다.
소년은 잠든 듯,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감진은 소년의 얼굴을 찰싹찰싹 두드리며 불렀다.
“폐하.”
영린은 눈을 떴다.
수증기가 어린 그의 눈은 별을 담은 듯, 순수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세상에 버려진 토끼같이 나약한 눈빛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감진은 가슴이 욱신거렸다.
“스승님…….”
영린은 손을 뻗으며 애처롭게 미소를 지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감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린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면 감진이 사라지기라도 할까 두려워 눈이 시리도록 그를 바라보았다.
감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영린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디서 순수한 토끼인 척하는 것입니까? 혼나고 싶은 것이지요?”
영린은 감진의 팔을 잡고 아이처럼 울먹이며 말했다.
“태부.”
감진은 참을 수가 없어서 팔을 빼고는 영린을 의자에서 끌어당겨 바닥에 내팽개쳤다.
“잠 깼습니까?”
영린은 멍한 얼굴로 바닥 위에 한참이나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감진? 언제 오셨습니까?”
감진은 입가를 실룩이더니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방금 전에요.”
‘방금 전?’
영린은 침묵했다.
“짐은 왜 바닥에 있습니까?”
“몽유병이 있는 듯합니다.”
“그런가?”
영린은 중얼거리고 고개를 들어 달빛을 바라보았다.
“오늘 달빛이 참 밝네요.”
감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회는 끝났습니까?”
영린은 고개를 돌렸다.
“짐이 여기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감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입이 달려 있으니 물어보며 왔지요.”
영린은 침묵했다. 그는 낮게 ‘네’라고만 대답했다.
감진은 그를 힐끗 보더니 물었다.
“폐하께서는 여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미인이 품에 안기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라는 미인 대신 감 공자가 먼저 왔네요.”
영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오지 말 것을 그랬네.’
“농담입니다.”
영린은 바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곧 미소를 거두고 울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방금 전 묵백 대제사와 여기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음이 복잡해져 혼자 남은 것입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감진이 담담하게 물었다.
“대제사가 뭐라고 하던가요?”
영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대제사가 뭐라고 했냐고? 묵백은 나더러 우세를 이용하라고 했지. 나이가 젊으니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고 멋대로 한번 부딪혀 보라고. 우는 아이에게는 젖을 주는 법이라면서.’
그러나 이런 말까지 감진에게 할 수는 없었다.
‘절대 못해.’
영린은 말없이 묵묵히 있었다. 그러나 감진의 눈에는 영린이 버려진 아이처럼 온몸으로 쓸쓸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소년은 잘 지내지 못했다.
선황은 아들이 둘밖에 없어 그는 황위를 다툴 형제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이 막강한 신하가 많아 어린 나이에 황위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에게 휘둘렸다.
만약 전생에 영위가 정말 황위를 빼앗을 생각이 있었다면 결과적으로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순수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은 황위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감진이 태부로 있을 때, 영린에게 선한 마음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영린이 전생에 한 일이 황제로서는 잘못한 게 없었다.
그저 그가 사용한 수법이 좀 치사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막 정무를 보기 시작한 어린애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감진은 사실 진정으로 영린을 혐오하거나 미워한 적이 없었다.
영린에 대해 실망한 감정이 다일 것이다. 황제의 스승으로서 그는 영린이 모든 이가 두려워하는 제왕이 되기를 바랐다.
영린이 매번 사람들에게 휘둘릴 때마다 감진은 더 마음이 아팠다.
그는 차라리 영린이 혼인이나 간택을 하는 방식으로 세력가의 지지를 받기 바랐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보다 더 최악인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영린의 수단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자신이 스승으로서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가법으로 엄히 다스려지고 오랫동안의 명예가 바닥을 칠 때에도, 그가 감씨 가문의 죄인이 되어 미움을 받을 때에도 감진은 영린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영린이 자신을 이용한 것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실망했을 뿐이었다.
최선을 다해 가르쳤던 제자였으니 그 아이가 잘 성장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용수와 야홍릉의 말 때문에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이 영린을 잘 가르치지 못해서 영린이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승으로서 잘 가르치지 못한 거야.’
감진은 똑똑한 사람이라 용수와 야홍릉이 일부러 그가 들으라고 한 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둘은 남의 뒷담화를 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도 방금 전 영린이 일부러 그에게 쓸쓸하고 적막한 뒷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것이든, 아니든, 그가 외롭고 쓸쓸한 것은 사실이었다.
“폐하께서는 묵백 대제사와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감진이 그의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물었다.
“신이 알아도 됩니까?”
영린은 고개를 돌리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궁금합니까?”
감진이 되물었다.
“그럼 안 됩니까?”
“짐은 감 공자가 궁금증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특히 짐에게는 궁금한 점이 더욱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린은 푹신한 풀밭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묵백 대제사는 운명에 관한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운명이요?”
감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운명 말입니까?”
영린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오늘 좀 이상하군요.”
‘갑자기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말이야. 전혀 다른 사람 같은데…… 아니지, 태부는 원래 이런 분이셨지.’
영린은 전생의 감진을 떠올렸다.
감진은 나이가 어리나 학식이 뛰어나고 학자의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잘난 척하지 않고 부드럽고 자상하며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나중에 일어날 일만 아니었다면 동제에서 그에게 어울리는 여인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흠모하는 완벽한 사내는 그가 직접 가르친 소년에게, 더러운 수단에 당해 죽었다.
영린의 가슴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전생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영린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감진이 그를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감진에게서 미움이 아닌 다른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소원함이었다.
그러나 오늘밤의 감진은 예전에 영린이 잘 알던 태부와 아주 비슷했다.
말하고 있는 지금도 인내심이 넘쳐났다.
영린은 희망을 보았다.
그러나 이 정도 희망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영린은 말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는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사실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걱정할 것도, 궁금할 것도 없습니다. 다 정해진 운명이니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수밖에요.”
감진은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