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아직 젊습니다
그 말이 맞았다.
전쟁터를 누비던 그녀가 어찌 이런 대전 절차를 힘들어 하겠는가?
“대전의 과정은 원래 이렇게 따분합니다. 하지만 오늘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따분하기는커녕 즐겁기만 합니다.”
용수가 웃으며 말했다.
야홍릉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다.”
둘은 옆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짐’이나 ‘신첩’으로 자신을 지칭하지도 않고 일반적인 부부의 말투로 사랑을 속삭였다. 옆에 있던 예관은 고개를 숙이고서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용수는 야홍릉의 손을 잡고 구중보전을 내려갔다.
“공주 전하, 보이십니까? 저 두 분이 바로 공주 전하의 부황과 어머니십니다.”
정려는 빨간색 치마를 입은 요요를 안고 계단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들이지요.”
요요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황제와 황후의 가마가 떠날 준비를 마치고 궁 밖으로 행차하자 정려는 요요를 안고 자신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영린이 다가와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녀의 품속에 안긴 요요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바로 남성국의 신 공주냐?”
정려는 영린을 알아보고 무릎을 굽혔다.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영린은 어여쁜 공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요요는 그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어라?’
영린은 어린 공주의 성격에 흠칫 놀랐다.
“공주 전하 힘드시지요? 자신궁으로 돌아갈까요?”
정려가 요요를 바라보며 물었다.
요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려는 영린에게 예를 올린 뒤, 공주를 안고 떠났다.
영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정려의 품에 안긴 공주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평범하지 않은 아이군.’
“감진.”
영린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공주가 어떤 것 같습니까?”
감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례식 다음은 궁중 연회였다.
제사전으로 갔던 둘은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둘은 궁에 들려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연회에서 용수와 야홍릉은 손을 잡은 채 나타났다.
영린과 감진의 자리는 황제, 황후와 아주 가까운 곳에 마련되었다.
남성국 대신들도 품급대로 자리에 착석했다.
영린은 앞으로 나서서 혼례식과 황후 책봉 대전에 대한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 다음에는 모두 형식적인 술자리였다.
덤덤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야홍릉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쁜 화장이 그녀의 차가운 분위기를 더욱 부각시켜서 사람들은 감히 황후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다.
용수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곤하십니까?”
“괜찮아.”
야홍릉은 엷게 미소를 짓고는 술잔을 들었다.
“신첩이 폐하께 술 한 잔을 권하겠습니다. 폐하의 혼례를 축하드리며 남성국이 앞으로도 쭉 번창하기를 바랍니다.”
용수는 웃으면서 술잔을 들어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짐도 황후에게 한잔 권하겠습니다. 황후의 혼례를 축하드리며 목국이 앞으로도 쭉 번창하고 여제 폐하도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바랍니다.”
그들과 가까이 떨어져 있는 영린은 둘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뒤로한 채, 오글거리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고개를 돌려 감진을 바라보니 감진은 차분하게 앉아서 술잔을 들고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듯,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묵백.”
영린은 시선을 떼고 맞은편의 묵백 대제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짐이 이곳에 있기 심심하여 대제사와 함께 좀 걷고 싶은데 가능할지?”
하얀색 장포를 입은 묵백이 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용수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과 황후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싶은 것뿐이었다.
영린은 고개를 돌리고 감진에게 말했다.
“나갔다 올 테니 술은 적당히 마십시오.”
감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린은 용수에게 말을 한 뒤, 묵백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둘이 사이가 참 좋아. 누가 누구를 불러낸 건지 몰라.”
야홍릉이 말했다.
“분명 영린이 묵백을 불러냈을 겁니다.”
용수는 뻔하다는 듯이 말했다.
“영린은 직접 정무를 보고 있지만 지금 그의 관심은 황위에 있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황제의 신분과 책임을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저자가 참 이상하게 보여.”
“네? 뭐가요?”
용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제왕은 천하를 움켜쥐어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지. 만약 황위와 권력을 포기한다면 살아 있는 것도 문제가 될 텐데 언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좇을 수 있겠느냐?”
용수는 침묵에 잠겼다가 말했다.
“애비의 말이 맞으나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수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우리와 마찬가지지요. 제가 애비를 좋아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성국의 강산도 돌보아야 합니다. 사랑과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었던 것은 애비의 덕도 있습니다.”
“내 덕분이라고? 뭐가 내 덕분인데?”
야홍릉이 물었다.
“애비가 일편단심으로 저를 좋아해 주기 때문이지요.”
용수는 기분이 좋은지 야홍릉의 얼굴로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애비의 마음속에 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겪으면서 감정이 단단해졌고 아이까지 생겨서 아무리 조정의 업무 때문에 바쁘더라도, 일 년 넘게 만나지 못하더라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애비를 빨리 만날 생각에 일을 빨리 하다 보니 동력도 생기고 효율도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애비가 항상 자리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고 말씀하셔서 애비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명한 황제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하지만 만약 애비가 저를 좋아하지 않거나 애비가 목국에 있는 게 안심되지 않는다면 저는 정무에 몰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매일같이 애비의 옆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랐겠지요. 예전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사랑 때문에 책임을 저버릴 수밖에 없겠지요.”
그들의 아래쪽에 있는 감진은 조용히 앉아서 용수와 야홍릉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어쩌면 영린이 황위를 내놓으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영린도 같은 이유일까?”
야홍릉이 물었다.
용수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책임과 사랑을 동시에 이행하지 못하는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이유?”
“영린은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명이 짧은 사람입니다.”
용수가 말했다.
‘명이 짧다고?’
감진은 흠칫 놀랐다. 술잔을 움켜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야홍릉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꿈속에서 보았던 용수와 영린이 떠올랐던 것이다.
둘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큰 대가를 치렀다.
다른 점이라면 용수는 사랑이었고 영린은 속죄였다.
“그도 불쌍한 사람이야.”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투는 내용과 달리 쌀쌀하게 들렸다.
“어렸을 때부터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고 홀로 차가운 황위에 앉아 있었겠지. 동료도 없고 도피처도 없는 상태로 권신들의 권모술수를 경계해야 했고 대세가를 상대해야 했겠지. 홀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영린도 결국에는 어린 소년이야. 그래서 생각이 짧았던 거지.”
감진은 입안의 술이 쓰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소년. 어렸을 때부터 모성애도 못 느끼고 홀로 차가운 황위에 앉았지.’
‘동료도, 도피처도 없는 상태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말 하나하나가 대못이 되어 그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감진은 시선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가르친 아이야. 아이가 잘못 자랐다면 다 스승인 내 잘못이지.’
감진은 지금 영린의 명이 짧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아야 했다.
영린은 묵백과 함께 대전으로 나간 뒤, 사람이 많은 어화원을 지났다. 궁인들을 그들을 보고 예를 올리며 길을 비켜 주었다. 둘은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어화원의 오솔길을 여유롭게 거닐었다.
“난 몇 년 남았느냐?”
영린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묵백은 영린의 질문에 좀 놀란 듯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얼마 남은 것 같습니까?”
영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생에 그가 동제에서 남성국으로 온 것은 잘못을 돌이킬 기회, 딱 그것 하나만 보고 온 것이었다. 그때 그는 뭐든 다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아졌다. 남은 수명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수명으로 이번 생을 바꿔온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으나 자신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알아야 했다.
많은 일들이 감정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건 자연의 순리에 맡기면 됩니다. 남은 수명이 얼만지는 알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그것을 알게 된다면 인생에 의미가 없어지거든요.”
만약 쉰 살까지 살 수 있다면 마흔 살이 넘을 때부터 죽음만 기다리겠는가?
인생의 재미는 내일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간다면 살아있는 인형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영린은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대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묵백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 년 전보다 더욱 훤칠해진 소년을 바라보았다.
“폐하는 이번 생에 자제가 없을 것입니다. 자미제성이 나타났으니 천하는 곧 통일될 것이고요. 미리 알고 있으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자미제성이 이미 나타났다고?’
영린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천하는 최종적으로 통일된다는 말인가?’
영린은 침묵을 지키다 미소를 지었다.
“묵백, 예전의 네 예언은 그다지 정확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맞겠어?”
묵백은 입가를 실룩거리며 말했다.
“예전에는 두 분이 운명을 바꾸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어졌지요.”
그때 그는 제사전으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대제사의 직무를 맡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점을 쳤다기보다 자신의 추측으로 한 얘기가 더 많았다.
그러니 틀린 경우가 나올 만도 했다.
“자미제성이 너무 강해 저를 오인했습니다.”
영린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묵백은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했다.
“폐하, 아직 나이가 젊으니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고 멋대로 한번 부딪혀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