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강산을 버릴 것입니다
감진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하게 말했다.
그에게서는 귀공자의 기품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군신 사이에 예를 올리는 것은 필수입니다.”
“그럼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는요?”
영린이 물었다.
감진은 눈을 내리깐 채,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모르겠다고?’
영린은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진이 목국에서 돌아온 첫 번째 달에 영린은 소식을 받고 그를 궁에 불러들였다. 감진은 그의 신분을 처음 안 것처럼 깜짝 놀라며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목국에서 영린에게 무례를 범한 것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모르고 범한 것은 죄를 묻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지만 감진은 이런 방식으로 둘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았다.
그 뒤로 영린이 그를 궁에 불러들일 때마다 감진은 항상 신하의 예를 깍듯이 올리며 말실수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영린도 일 년 내내 그의 연기에 맞춰 주었다.
옛날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꺼냈다가 지금보다도 못한 사이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참을 수가 없었다.
영린은 순간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삼키고 담담하게 말했다.
“짐은 감진 공자를 태부(太傅, 황자의 스승)로 모시고 싶습니다.”
감진은 흠칫 놀랐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 농담이 심하시군요.”
“짐은 농담을 한 적이 없습니다.”
감진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젊으시고 궁에는 비빈이나 황후도 계시지 않으며 황자도 없는데 태부라니요. 게다가 저는 배움이 짧고 능력도 부족해 태부로 될 자격이 없습니다.”
“짐은 지금 의논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미 정한 일입니다. 물론, 생각할 시간을 좀 주겠습니다.”
감진이 말을 하려는 순간, 영린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 일로 부른 것은 아닙니다. 짐과 함께 남성국으로 가려고 불렀습니다.”
‘남성국에?’
감진은 흠칫 놀랐다.
“남성국 황제가 혼례식을 한다고 짐에게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함께 가시죠.”
영린이 말했다.
감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폐하, 이건 경우가 아닌…….”
“성지는 어길 수 없습니다.”
감진은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영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태부가 되기 싫다면 승상의 자리를 남겨줄 것입니다. 너무 젊어서 이런 무거운 책임을 못 맡는다느니 같은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감 공자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능력이……”.
“제가 싫다면요?”
영린은 말문이 막혔다.
“태부나 승상 중 하나를 고르십시오.”
감진은 동제로 돌아온 게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린은 전생보다 더 침착하고 황제다워졌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교활함은 전생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이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랐다.
감진은 더 이상 사사건건 영린에게 끌려 다니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감진은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예전에 특별한 상황에 놓여 목국의 호국 공주를 만나 그분의 측부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황제가 되었는데 저도 족보에 오른 측부로서 앞으로 그분의 뜻에 따라 다른 신분을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담담한 그의 말에 영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대전 안은 정적에 쌓였다.
영린은 주먹을 움켜쥔 채, 자신의 충동적인 행위를 후회했다.
감진은 동제로 돌아왔지만 그와 만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감진을 너무 몰아붙이면 안되었다.
목국 황제의 측부.
야홍릉은 이 신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감진을 족보에 올린 것도 사실이었다. 감진은 이것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감진이 이 이유를 핑계로 내세우는 이상, 영린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야홍릉은 전에 영린에게 감진의 선택을 존중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영린이 제국의 땅으로 감진을 얻으려고 해도 이 거래가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가 제국 황제의 신분으로 목국 여 황제의 측부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영린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던지라 이런 좌절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일단 가서 준비하고 구월 초엿새에 함께 남성국으로 떠나시죠.”
영린은 곧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서 말했다.
“승상이나 태부에 관한 얘기는 남성국에서 돌아온 뒤에 다시 얘기하시죠.”
감진은 그와 함께 남성국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감 공자가 목국 황제의 측부라고 하니 짐도 그분과 앉아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네요. 그러지 않고서야 짐이 어찌 감 공자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지 알 수 있겠습니까?”
감진은 냉소를 하였다.
‘거짓말이라고?’
영린이 목국에 있을 때, 그의 상황을 낱낱이 조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런 말을 하다니. 영린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남성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는 감진도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아까 가겠다고 했으니 자신이 한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감진은 허리를 숙이고 우아한 자세로 물러났다.
영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번 남성국 행에서 어떻게 감진과의 벽을 허물고 사이가 가까워질지 생각해 보았다.
전생에 일어난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안 그러면 지금처럼도 지내지 못할 수 있었다.
시간이 하루하루 흘러갔다.
영린은 일찌감치 조정의 일을 남들에게 맡기고 섭정권도 영위에게 넘겨준 뒤, 구월 초엿새가 되자마자 이천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제국을 떠났다.
마차는 네다섯 명이 탈 수 있는 초호화 마차여서 영린과 감진 둘만 타기에는 충분했다.
감진은 마차를 타기 싫었다. 그래서 황제와 같은 마차를 타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영린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일이 생각하던 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도성을 떠난 뒤, 영린이 창문을 열고서 말을 타고 걸어가는 감진에게 말했다.
“짐이 아주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데 감 공자 한 명만 들어야 합니다. 들어오시죠.”
감진은 마차에 앉아서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말에서 내려 마차에 들어갔다.
그는 영린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짐은 올해 열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영린은 마차에 기댄 채,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직접 정무를 본 지 이 년밖에 안 되었고 한창 열정이 불타오를 때여야 하지만 밤이 되면 종종 인생이 재미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농을 하시는 것입니까?”
영린은 고개를 저었다.
“농이 아니라 최근 들어 황위를 누구에게 줄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황위를 남에게 준다고?’
감진은 크게 놀랐다.
“짐은 평생 후손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짐은 비빈을 간택할 생각도 없고 여인과 가까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황위를 물려줄 후손도 없을 것이고…… 그래서 남성국에서 돌아온 뒤, 황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감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영린이 그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영린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열여섯 살 소년의 눈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듯한 사람의 눈빛을 읽었다. 세상에 대한 혐오와 무기력함으로 가득한 그의 눈빛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감진은 흠칫 놀랐다. 순간 그는 화가 치밀어 꾸중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이번 생에는 그에게 영린을 질책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생에 그는 영린의 태부였다.
스승이 제자를 꾸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이번 생에서 그는 실종된 지 여러 해 만에 돌아온 감씨 가문의 공자일 뿐이었다.
전생은 이미 그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예전의 과거는 그들의 지금 관계를 좌지우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린이 황위를 내놓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도 하지 못했다. 전생에 영린은 자신의 황권을 탄탄히 다지려고 위협이 되는 섭정왕을 갖은 수단으로 무너뜨렸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왜 갑자기 황위를 내놓겠다는 말인가?
감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폐하께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황당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신 것입니까?”
‘황당해?’
영린은 눈을 질끈 감고 피식 웃었다.
“황당하긴 하군요. 짐도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지더군요.”
감진은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폐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이것입니까?”
영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생각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누구와 얘기를 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던 것입니다. 예전에 목국에 있을 때, 누님과 용수에게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처럼 세 나라가 공존하는 것을 더 좋아하더군요. 당분간 이 평화를 깨뜨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영린은 황제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게 연기나 그를 협박하는 게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영린이 이럴수록 감진은 영린이 자신을 협박하는 거라고 느껴졌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폐하, 좀 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마차를 나가서 말에 올라탔다.
그의 준수한 얼굴에는 냉기가 흘렀다.
‘황위를 버리겠다고? 정말 말도 안 되게 고집을 부리는군.’
평화로운 한 달이 지났다. 남성국의 혼례식 겸 황후 책봉 대전의 준비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드디어 구월 이십육 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날은 혼인하기 길한 날이었다.
용수는 목국의 황제 야홍릉을 남성국 황후로 맞이한다는 성지를 널리 알렸다. 그리고 야홍릉도 남성국 조정의 결정권을 가지고 그와 함께 남성국 강산을 다스린다고 했다.
이 조서에 천하가 들썩였다.
영린과 감진은 이십사 일 전에 남성국 도성에 도착했다.
용수의 심복들도 모두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대전을 보려고 모였다.
이십육 일 날이 밝기 전에 궁의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녀들은 황제와 황후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어 주느라 바삐 보냈다.
황궁 밖의 어도에서 제사전까지 붉은 융단이 쫙 깔렸다.
목국의 황제는 화려한 빨간색 옷을 입고 제사전에서 가마에 앉은 채, 황궁으로 향했다. 거리 양옆에서는 북과 꽹과리를 치고 빨간 등을 높이 매다는 등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떠들썩한 사람들까지 더해지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