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승리자의 자세
처음 몇 달 동안 그는 화를 내보고 반항도 해보고 단식도 해보았다.
그러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하인들은 때 맞춰 그에게 밥을 날랐다. 그가 먹든 말든, 굶어 죽든 말든 관심이 없는 듯했다.
반항이 한 번, 또 한 번 실패로 끝나자 야천란도 포기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반항할 마음도 접고 조용히 봉왕부에 머물렀다.
매일 제때에 밥을 먹고 책도 읽으며 꽃구경을 하고 산책도 하면서 나름 나쁘지 않게 보냈다.
용수가 조례를 마치고 야홍릉과 함께 봉왕부에 왔을 때, 야천란은 이제 막 깨어난 상황이었다.
이 년간 그는 늦게 자고 늦게 깨어나는 것에 익숙해졌다. 매일 조용한 밤에 홀로 창가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시가 넘어서야 잠들고, 아침에 늦잠을 자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나태해졌다고 생각했다.
발소리가 회랑에서 울려 퍼졌다. 옅은 파란색 장삼을 입은 야천란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책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용수와 야홍릉은 회랑에서 내려와 정원에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야천란도 탑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황자.”
용수는 입을 열었다가 호칭을 바꾸었다.
그의 말투에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천란 황형.”
야천란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용수 옆에 서 있는 야홍릉에게 고정했다. 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홍릉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짐이 황형에게 설명을 해드리지요.”
용수는 야홍릉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분은 남성국의 손님이시자 목국의 황제 폐하십니다. 남성국의 황후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짐과 곧 혼인할 아내라는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야천란은 주먹을 점점 꽉 움켜쥐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는 그제야 이 년간의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재작년 구월에 목국을 떠나 남성국에 온 뒤로 올해 구월까지 딱 이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목국은 천하가 뒤바뀐 것이다.
‘야홍릉이 황위에 오르다니.’
야천란은 냉소를 하였다.
“너도 참 대단하구나.”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과찬이세요.”
눈앞의 한 쌍을 바라보는 야천란은 눈빛이 이글거렸다.
그는 수많은 가능성과 음모를 떠올렸지만 결국 그저 담담하게 묻는 것에 그쳤다.
“내 어머니는 살아 계시냐?”
“네, 아주 잘 계세요.”
야홍릉이 대답했다.
야천란은 야홍릉의 말을 듣자 꽉 움켜쥐었던 주먹이 살짝 풀어졌다.
“부황은?”
“부황께서는 옥체가 안 좋으셔서 건양궁에서 요양 중이세요.”
‘옥체가 안 좋아?’
야천란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부황과 어머니를 살려줘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나?’
“둘째, 셋째, 넷째, 여섯째, 여덟째, 아홉째. 이 중에 몇이나 살아 있느냐?”
야천란이 야홍릉을 바라보며 물었다.
야홍릉은 그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둘째 오라버니는 잘 살아 계세요. 셋째 오라버니는 적국과 내통한 증거가 명확하여 부황께서 직접 자결을 명하셨고 한씨 가문은 멸문되었어요. 넷째 오라버니는 천뢰에 계세요. 살아 있긴 하나 자유롭지는 않죠.
여섯째 오라버니와 자릉이, 남동생은 모두 궁에 있어요.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리만 없을 뿐, 다른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예요.”
야천란은 야홍릉의 말을 알아들었다.
“둘째만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감금되었다는 말이구나? 너도 참 대단하네. 짧은 이 년 사이에 목국의 천하를 바꾸었으니. 여인의 몸으로 황위에 오른 경우는 역사상에서도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야홍릉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나는?”
야홍릉이 물었다.
“날 계속 남성국에 가두어 둘 것이냐? 아니면 목국에 돌려보내서 가두어 둘 것이냐?”
“그건 오라버니의 태도에 달렸어요.”
야홍릉은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화를 내지 않고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저에게 복종한 사람들은 모두 편히 살 수 있어요. 제가 장담하지요.”
야천란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네게 복종하지만 않는다면 죽는다는 말이냐?”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복종은 중요하지 않아요. 제 기분만 상하지 않게 하면 돼요.”
아주 거만한 말이었다.
야천란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황위에서 기반을 잘 다졌기에 나 같은 사람들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가? 그래서 복종을 하든 말든 상관없으니 까불지만 말라? 선만 지키면 뭘 하든 상관이 없는데 선을 넘는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역시 한 나라의 황제다운 말이군.’
야천란은 불쾌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의 힘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그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그는 오랫동안 참아왔다. 그는 황후 모자와 한씨 가문을 최대한 피하며 그들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줄곧 조용하게 지내며 조정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황자가 되었다.
심지어 선왕과 정왕이 남몰래 세력을 키우고 있을 때에도 그는 바깥의 일에는 귀를 닫고 부황이 맡긴 일만 열심히 했다. 그는 듬직하고 차분한 대황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자신만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면 부황이 언젠가 그에게 길을 깔아주리라 굳게 믿었던 것이다.
황후 모자와 한씨 가문이 대단하면 뭐 어떤가?
선왕과 정왕이 몰래 세력을 키우면 또 뭐 어떤가?
결국에는 황제의 뜻대로 태자가 정해질 것이다.
부황은 그에게 명확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승상에게 사람이 많으니 한씨 가문이 무너진 지금에는 승상과 조정 대신의 지지만 받는다면 그는 얼마든지 태자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부황은 그더러 대황자의 듬직한 모습을 고수하여 조정 대신들에게 단호하고 현명한 인상을 남기라고 했다.
다른 것은 부황이 다 알아서 할 거라고 했다.
야천란은 부황을 대신해 남성국으로 떠날 때까지만 해도 벅찬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성국에 도착한 뒤, 모든 것이 달라졌고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되었다.
이 년이 지났다.
이 년 동안, 황위에 앉은 사람은 바뀌고 죽을 사람은 죽었으며 다른 사람은 모조리 감금되었다.
‘다 부질없구나.’
야천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남성국 황제와 목국의 황제가 통혼한 사실을 그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지금의 상황을 돌이키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은 왜 온 것이냐?”
야천란은 화난 속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황제가 된 너의 너그러움을 드러내려 온 것이냐? 아니면 승리자의 자세로 내 처지를 동정하러 온 것이냐?”
용수는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평소 침착하고 점잖던 목국의 대황자께서도 이처럼 신경질적일 때가 있군요.”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광대가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야천란이 만약 여태까지 살아왔던 대로 조용하게 산다면 앞으로의 삶이 좀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원한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야홍릉이 그를 어찌하지 않는다고 해도 용수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전 연말에 돌아갈 겁니다.”
야홍릉은 야천란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 저와 같이 가도 되고 그게 싫다면 남성국에 남아 계셔도 됩니다. 저도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용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지.”
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왕부의 밖으로 걸어갔다. 나란히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은 흔들림 없는 제왕의 위엄을 담고 있었다. 아주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야천란은 방에 숨어 멀어져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만 했다.
* * *
용수가 황후 책봉 대전을 구월말로 정한 것은 영린이 올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영린이 나라를 다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불안정한데다가 섭정왕 영위가 이제 막 남제를 무너뜨린 터였다. 지금은 영위가 제국의 대공신이었다. 황제가 자꾸 자리를 비운다면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용수에게는 자신의 혼인 대전이 가장 중요했다.
현존하는 세 나라 중 제국이 가장 약했다. 제국은 이제 막 통일을 완성한 데다 황제가 어려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약한 황제와 강한 신하의 최악 조합이었다.
제국의 국력은 목국과 비슷했으나 목국이 남성국과 통혼을 마친다면 남성국의 보호를 받을 것인데 최약체가 제국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용수는 현재 세 나라가 공존하는 상황을 깨뜨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영린더러 오라고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세 나라가 앞으로 수십 년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협정을 맺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야홍릉이 영린의 의형제인 누님이기 때문이었다.
영린이 야홍릉을 누님으로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지만 목국에 있는 야홍릉의 친형제들보다 영린이 더욱 야홍릉의 가족 같았다.
적어도 용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야홍릉은 모르겠지만.
용수와 영린은 모두 영위가 다름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남성국과 제국이 자주 왕래할수록 영위는 걱정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는 가족의 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기에 권력에 대한 욕구를 참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들 영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구월 초, 영린은 남성국에서 온 초대장을 받았다.
열여섯 살에 들어선 그는 키도 더 크고 이 년 전보다 더욱 어른스러워졌다. 얼굴 윤곽도 더욱 뚜렷해져서 전보다 더욱 차분한 인상을 풍겼다. 또 제왕의 위엄도 흐르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용포를 입은 그에게서는 귀티가 흘렀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담담하게 지시를 내렸다.
“감 공자더러 궁에 들어오라고 하여라.”
동제로 돌아온 뒤, 그는 자주 감진을 궁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다들 황제가 오래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감씨 가문의 공자에 호기심을 가져서 부르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 일이 반복되자 귀족 세가에서는 감씨 가문이 황제의 중용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감진은 제경 공자들의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소녀들의 이상형이 되었다.
이건 모두 영린과 감진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이었고 실제 상황은 그와 감진만 알고 있었다. 심지어 감씨 가문도 황제는 감진의 학식을 좋아한다고 여길 뿐, 전혀 다른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감씨 가문은 동제에서도 유명한 세가였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도 강했다.
그렇기에 황제의 지시가 내려오자 감진도 어길 수 없었다.
반 시진이 지나자 감진이 청색 장삼을 입고 궁에 들어와 영린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더 이상 목국에서처럼 요란한 비단 옷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온몸에 흐르는 귀티는 소박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영린은 그가 무릎을 꿇기도 전에 일어서서 감진을 부축했다.
“예를 올리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