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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92)화 (29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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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화 미리 준비하다

지금까지 목국은 남성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이십 년 후에는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늘의 뜻이라면 거지도 황포를 입을 수 있었다.

하늘의 뜻이라면 아무리 강한 나라도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역사상 강한 나라가 망조가 들어 서서히 멸망한 사례는 적지 않았다.

“됐습니다, 그만하십시오.”

용수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다들 돌아가십시오. 대제사는 남으시오. 짐이 할 얘기가 있습니다.”

묵백은 허리를 숙였다.

종친들과 대신들은 예를 올리고 물러갔다.

묵백은 용수, 야홍릉 부부와 함께 자신궁으로 걸어갔다.

사람이 없는 곳까지 간 묵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이 대제사가 된 뒤, 처음 폐하와 황후마마와 협조하여 한 연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랍니다.”

“연기라고?”

야홍릉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왜 연기냐? 폐하와 난 모두 너더러 거짓을 얘기하라고 한 적이 없다. 네가 한 말도 모두 사실이지 않느냐? 신령님이 듣는다고 해도 널 탓하지 않을 건데 이게 어떻게 연기라는 것이냐?”

묵백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지하게 말했다.

“신령님은 절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고결하고 청렴한 대제사이니까요. 그러니 저는 폐하와 황후마마의 앞에서, 수많은 종친과 대신들 앞에서 황후마마와 말다툼을 할 것이 아니라 제사전에서 조용히 신을 모셔야 했습니다.”

용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결하고 청렴하다고요? 형님은 어떻게 그런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십니까? 아예 속세에 물 젖지 않고 매일 이슬만 먹고 살며 도를 닦는다고 하시지 그럽니까?”

“폐하, 그리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묵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용수의 태도에 서운한 듯했다.

“하지만 말이 나와 그러는데 어쩌면 저는 정말 도를 닦으러 내려온 신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용수와 야홍릉은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백은 다시 시선을 용수의 품에 안긴 공주에게 돌렸다.

“공주 전하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신은 정말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선이 아닐까요?”

요요는 무표정한 얼굴로 멍청한 질문을 무시했다.

묵백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께서 좀 더 자라시면 폐하께서 바로 태자로 책봉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반독 몇 명을 궁에 들이는 것이지요. 가까이서 가문, 품행, 학식, 기개 등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공주 전하가 다 크면 황부를 뽑는 것입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참 멀리도 생각하는구나.”

묵백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제 직무입니다.”

‘끝까지 도와야지.’

요요가 아직 어리기는 했지만 용수도 미리 준비하고 있는데 그도 당연히 협조할 생각이었다.

요요가 천명제녀라는 것도 사실이고, 칠성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공주의 반독은 그녀가 성인이 되어 등극한 뒤의 심복이 될 것이니 각 면에서 뛰어나야 했다. 그중에서 유독 뛰어난 사람은 공주의 황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묵백이 적절하게 제안했다.

“남성국 차기 황제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남성국 사람들이 점차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태연하게 공주 전하를 황제로 모실 것이니 공주 전하에게도 좋은 것이지요.”

자신궁에 들어간 용수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정려만 남겼다.

용수, 야홍릉과 묵백은 모두 자리에 착석했다.

정려는 공주를 안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묵백은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으나 그의 말에는 날카로운 지혜가 번뜩였다.

“여성이 황제로 등극하는 일은 남성국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뿌리박힌 남존여비 사상입니다.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나중의 황부 간택입니다.”

용수와 야홍릉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모두 속으로 묵백의 말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묵백의 말이 맞았다.

오랫동안 지속된 남존여비 사상에 잠식된 사람들은 여인이 황제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신령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진심으로 공주를 황제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목국도 그러했다.

야홍릉은 예로부터 항상 강하고 대단하며 제멋대로이고 매정하다는 인상을 유지해 왔다. 그녀가 세운 수많은 공들도 그녀가 사내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홍릉이 황위로 등극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녀가 여러 면으로 압력을 가했기에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야홍릉이 황제가 된 지금에도 목국의 대신들은 진심으로 야홍릉을 황제로 모시지 않았다.

그래서 황자의 출생에 아주 기뻐한 것이었다.

여러 황자들이 태자 자리를 두고 싸운다면 대신들은 여러 편으로 나뉘어서 각자 다른 황자를 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자와 공주 중 누가 등극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서는 대신들의 의견은 똑같았다.

그들은 여인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면 불러일으킬 영향을 생각할 뿐이지, 여인이 강하다고 해서 하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먼저 남자인 자신의 지위와 가문의 이익을 생각할 것이다.

남자가 황제가 되어야만 그들은 집안 여식을 황제의 후궁으로 궁에 보낼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황족과 사돈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여인이 황제가 된다면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는 대세가의 적자들은 황제의 후궁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사내가 존엄을 내려놓고 수많은 남자와 함께 황제를 모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존여비의 인식은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어서 짧은 시간 안에 바꾸기 힘들었다.

그나마 남성국이 목국보다 수월할 지도 모르는 이유는 제사전의 존재였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제사전에 대한 백성들의 절대적 신앙 때문에 남성국 사람들은 신령이 뽑은 천명제녀를 무턱대고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오래된 생각은 일찌감치 고쳐야 했다. 그래서 공주를 어렸을 때부터 잘 키워 그녀에게 제왕으로서 갖춰야 할 책임과 도덕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용수와 야홍릉은 모두 똑똑한 사람들이라서 묵백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셋은 대전에서 요요의 일에 대해 한 시진 가까이 토론을 했다. 대부분은 용수와 묵백이 대화하고 야홍릉은 거의 끼어들지 않았다. 남성국의 일이니 남성국 집권자인 용수와 묵백이 더 잘 알 게 빤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야홍릉보다 황권과 제사전의 권위를 이용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 더욱 빠삭했다.

의논을 마친 뒤, 묵백은 일어서서 작별을 고했다.

야홍릉은 자신궁을 떠나는 묵백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묵백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야홍릉이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대제사는 혼인할 수 없는 거지?”

용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대제사의 신분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대 대제사들은 모두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제사전에 오래 있다보니 남녀의 정에도 관심이 없고 혼인할 생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묵백은 조건이 좋은데 아쉽군.”

‘묵백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도 범상치 않겠지.’

“조건이 좋다고요? 얼마나 좋은데요?”

용수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야홍릉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투덜거렸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이상한 눈빛으로 용수를 바라보았다.

“별걸 다 질투하는구나.”

“…….”

한참 침묵을 지킨 그가 말했다.

“저는 황후 책봉 대전을 구월 말에 정할 예정입니다. 그때면 덥지도 춥지도 않고 딱 좋을 듯한데 애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대로 하자꾸나.”

황후 책봉 대전이라는 말이 나오자 야홍릉은 문득 큰 오라버니가 떠올랐다.

“야천란은 지금 어디에 갇혀 있느냐?”

“예전의 봉왕부입니다. 가보실 것입니까?”

용수가 물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도 없는데 가 보지 뭐.”

“내일 제가 모시겠습니다.”

용수는 야홍릉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황후마마는 잠자리에 드셔야지요.”

야홍릉은 그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내전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용수가 웃으며 야홍릉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우리 먼저 씻으러 가시죠. 오늘 밤 요요더러 홀로 편전에서 자라고 하고요.”

이때, 내전에서 요요와 함께 있던 정려는 입을 삐죽이며 구시렁거렸다.

“폐하는 정말 너무하시잖아? 황후마마만 챙기시느라 공주 전하를 홀로 편전에 두신다니 참…….”

요요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귀여운 아기 침대에 앉아 풍령을 툭 건드리는 요요의 행동은 노는 것 같으나 짜증이 난 듯했다.

“공주 전하.”

정려는 다급히 요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도 씻고 잘까요?”

요요는 풍령을 내려놓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려는 요요의 치마를 벗긴 뒤, 편전의 욕조에 물을 채우고 꽃잎을 띄웠다.

그리고 공주를 깨끗하게 씻기고 몸을 닦은 뒤, 부드러운 옷을 입혀 침대에 눕혔다.

같은 시각, 욕지에서 용수와 야홍릉은 운우지정을 나누느라 매우 바빴다.

다음 날 아침.

용수는 조례를 마친 뒤, 자신궁으로 돌아와 야홍릉 모녀와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정려더러 요요를 보살피라고 당부한 뒤, 박으로 나갔다. 자신궁 밖에는 고수들이 지키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들어올 수 없었다.

정려도 무공이 뛰어나 용수는 그녀에게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었다.

둘은 곧 봉왕부에 도착했다.

야홍릉은 전에 봉왕부에 온 적이 있었다. 다시 찾은 봉왕부는 이 년 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사람이었다. 이 년 전의 태자는 황제가 되었고 호국 공주 역시 황제가 되었다.

봉왕부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자유가 없는 것만 빼면 야천란의 일상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활동 범위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자죽원 안팎이라서 그렇지 저택의 하인들은 모두 그를 귀한 손님 대접하면서 예우했다.

그러나 하인들이 아무리 그를 예우한다고 해도 그는 그저 이곳에 감금된 손님일 뿐이었다.

어쩌면 수감된 범인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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