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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87)화 (288/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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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화 어쩜 이리도 닮았는지

칠월 말.

그녀는 한경백, 육연지, 심한의와 한묵을 불러 모았다.

황제가 바뀐 뒤로 이 네 명은 가장 황제의 신임을 받는 대신이 되었다.

한경백은 역사상 가장 젊은 좌상(左相)이었다. 겉보기에 점잖으나 강단 있고 단호한 심한의는 어전 참정 겸 좌도어사(左都禦史)였다. 육연지는 육씨 가문의 병사들을 이끌 수 있는 것 말고도 황성을 지키는 직무까지 맡고 있었다.

황권과 강산의 안전까지 모두 육연지에게 맡긴 셈이었다.

육연지도 황제가 너무 간이 크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른 마음을 품고 반역을 일으킬까 두렵지 않으신 건가?’

야홍릉은 그게 두렵지 않은 듯했다. 육연지를 믿어서 그런 것인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를 막론하고 여 황제의 처사방식은 그녀가 호국 공주일 때와 마찬가지로 과감했고 단호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한묵은 여전히 금위군 통령이었으나 그의 동생 한기는 이제 막 벼슬길에 들어섰다.

지금은 관직이 높지 않지만 부친과 형님을 본다면 그도 얼마든지 더 크게 될 수 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제경을 어떻게 지킬 것을 지시하고, 한경백과 승상에게 중요한 대권을 맡긴 뒤, 야홍릉은 딸을 데리고 남성국으로 떠났다.

신은전의 암위가 줄곧 옆에서 그녀를 지켰지만 야홍릉의 무공도 충분히 강했기에 길에서 별다른 위험에 마주치지 않았다.

한 살 된 딸은 아명이 요요(嬈嬈)였다. 야홍릉은 어렸을 때부터 싸늘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공주가 남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친어머니와 함께 있고, 유모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어미인 야홍릉보다도 성미가 더욱 차가웠다.

돌이 지난 아이는 간단한 단어를 말할 수 있으나 요요는 말을 하기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는 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쌍둥이 동생이 깔깔 웃을 때도 요요는 눈으로 한기를 내뿜으며 조용히 있었다.

요요의 유모는 처음에 걱정을 많이 했지만 황제가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 그녀도 호들갑을 떨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요요를 보살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지고는 했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왜 표정과 눈빛이 이리도 차가울까?’

야홍릉은 남성국으로 가는 길에 서릉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받게 되었다.

사청의는 직접 황후와 그녀의 유일한 아들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국구부의 수백 명 사람들과 서릉 황족의 사람들을 반 이상이나 죽였다.

멍청한 황제가 통치하는 황조는 이로써 끝나고 말았다.

뼛속까지 썩은 황조가 멸망하는 것은 사람들이 기뻐할 만한 소식이었다.

서릉의 백성들에게도 다행인 일이었다.

칠월 말, 헌원창은 다시 남성국으로 돌아왔다.

팔월 초, 헌원용수는 사람들에게 원 서릉 지역은 남성국의 소유가 되었다고 말했다.

금국은 진작 멸망했고 지금 서릉도 사라졌다.

이제는 남성국, 목국, 제국 세 나라밖에 남지 않았다.

한 나라를 삼키는 것은 천하를 들썩이는 일이라고 해도 야홍릉은 이런 일에 익숙해져서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야홍릉과 용수는 부부이기에 남성국이 서릉을 삼켰다고 해도 반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국의 황제 영린은 강산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남성국이 서릉을 삼킨 것에 대해서는 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나중에 헌원용수가 제국까지 삼키려고 한다고 해도 그는 흔쾌히 옥새를 내놓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제국과 목국의 대신들은 이번 사건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걱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매일 부귀영화를 누릴 줄밖에 모르는 신하들보다 훨씬 책임감이 있는 것이었다.

팔월 초이레.

헌원창은 오천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남성국의 황성을 떠나 야홍릉을 맞이하러 왔다.

야홍릉은 남성국으로 가는 소식을 미리 용수에게 말한 적이 없는데 용수의 첩자들이 세상에 가득 분포되어 있어 야홍릉이 행방을 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야홍릉은 헌원창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둘은 모두 열정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헌원창 뒤에서 오천 명의 기예병이 말에서 내리고 가장 뒷줄에서 검은색 말이 야홍릉의 마차로 천천히 다가올 때, 세상에는 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 년 동안 쌓였던 그리움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용수는 말고삐를 당기며 말 등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그는 말 등에서 나는 것처럼 뛰어와 야홍릉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서 마차로 들어가 비단 탑에 눕혔다.

고개를 숙이고 야홍릉의 입술을 머금은 채, 뜨겁게 입을 맞추던 그는 지금 바로 야홍릉을 안고 싶었다.

이때, 옆에서 민망한 듯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용수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차 안은 또 정적에 쌓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를 안고 있는 정려가 보였다. 용수는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와 뒤로 물러서서는 고개를 숙이고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그리고 야홍릉의 구겨진 옷을 정리하며 천천히 제자리에 앉았다.

“짐의 공주이냐?”

용수는 정려가 안고 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자, 부황이다. 안아보자꾸나.”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덤덤한 시선이었다.

용수는 흠칫 놀란 얼굴로 야홍릉을 돌아보았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수는 시선을 맞은편의 아이에게 돌렸다. 아이는 어여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보석 같은 큰 눈이 유난히 예뻤다.

그러나 아이의 눈은 전혀 온기 없이 차갑기만 했다.

이는 낯선 사람을 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용수는 침묵을 지키다 일어서서 정려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아이를 안아서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는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무서워하지 않을 뿐이었다.

용수는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애 엄마와 오랫동안 지내서 성격이 이렇게 닮은 건가?’

“요요야, 나는 네 부황이다. 배는 안 고프더냐?”

용수가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이제 한 살 된 아이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그러다 편한 자세를 잡고는 눈을 감고 자기 시작했다.

용수는 멍한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는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찡해졌다.

‘내가 옆에 있어 주지 않아서 날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괜한 걱정은 하지 말아라. 요요는 성격이 원래 그렇다.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사람을 상대하지도 않는다.”

‘한참 사람을 좋아할 나이에 사람을 상대하지도 않는다고?’

용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애비를 대할 때도 이렇습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

용수는 생각해보다 물었다.

“아들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황자의 성격은 공주 전하와 정반대십니다.”

정려가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고 잘 웃으십니다. 말은 아직 잘 못 하시지만 말 하는 것을 좋아하여 매일 옹알이도 하고 사람을 보기만 해도 웃고요. 웃을 때면 드러나는 하얀 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공주 전하는 성격이 싸늘하시고 웃거나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제 생각에는…….”

정려는 혀를 홀랑 내밀고 말을 이었다.

“저희 폐하를 닮으신 게 아닌가…….”

‘그렇다고?’

용수는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홍릉이 어렸을 때 어쨌는지 용수는 알지 못했지만 딸이 어머니의 성격을 닮은 거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용수는 고개를 숙이고 딸의 얼굴에 입을 맞춘 뒤, 편히 자도록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야홍릉을 돌아보며 물었다.

“웬일로 오셨습니까?”

탓하는 듯했지만 사실 그는 기쁜 표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네가 보고 싶어서.”

야홍릉이 대답했다.

“정무를 남에게 맡기고 왔단다. 혼례식도 올릴 겸 말이다.”

용수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활짝 웃으며 물었다.

“저한테 그동안 간택했냐고 묻지 않으십니까?”

야홍릉은 침묵하다가 평온하게 물었다.

“네가 감히?”

용수는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정려는 머쓱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저는 나가서 말을 타고 갈게요.”

“그래. 짐의 말이 비어 있다.”

용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정려는 문발을 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용수는 한 손에 잠든 딸을 안고 다른 손으로 야홍릉의 허리를 끌어안은 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하던 일을 마치고 목국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애비가 먼저 오실 줄 몰랐습니다.”

“딸을 데려왔으니 남성국에 있게 하거라. 딸은 네가 잘 키우고.”

용수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저는 사실 남매가 떨어지는 게 싫습니다.”

“요요는 성미가 싸늘해서 동생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 그게 나쁠 건 없지. 황제가 될 자는 정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성미가 싸늘한 사람은 정을 중요시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을 뿐이었다.

예전의 야홍릉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가려면 어렵지만 그녀의 인정을 받는다면 전적인 신임을 받을 것이다.

황제가 될 사람이 너무 정에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으나 감정이 아예 없어도 안 되었다.

“그러나 아비의 입장에서 보면 저는 딸이 감정 표현을 뚜렷하게 하고 정상인이 가져야 할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용수는 눈을 내리깔고 요요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이는 모두 자신만의 인생이 있으니 순리에 맡기는 게 맞는 것이겠죠. 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속 며칠 걸었더니 마차에 앉아 있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탑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피곤하구나.”

용수는 안쓰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앞에 성이 있으니 하루 쉬었다가 다시 가시죠.”

거리가 멀어 한 번에 다녀오려면 시간 말고도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야홍릉은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왔을 것이다.

덜컹거리는 마차를 오랜 시간 타니 오히려 더 힘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저녁 무렵에 한 성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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