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그리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용수는 야홍릉의 얼굴을 잡고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잘 지내요. 일찍 자고 늦게 깨어나십시오. 조례는 좀 미뤄도 되잖아요? 정무는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많이 나눠주고 애비는 몸을 아껴요. 내가 간 뒤, 애들을 잘 부탁합니다.”
아이들 얘기가 나오자 용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애들이 보고 싶군요.
제가 궁에 없어도 다른 남자를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혹시 어느 대신이 애비더러 후궁을 들이라고 한다면, 또는 다른 황부를 간택하라고 한다면 전 흑의 기예병을 시켜 그 저택을 밀어버리고 그자의 가족들을 모두 유배 보낼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있던 목국의 대신들은 이 말을 듣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협박을 너무 대놓고 하잖아?’
“꼭 저를 잊지 마십시오.”
용수는 야홍릉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 힘들게 지내지 마십시오. 곧 돌아올 테니 그때 다시 와서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서 애비를 힘들게 하는 자들을 모조리 엄벌할 것입니다.”
야홍릉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사람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럴 사람이 없을 만도 했다.
대신들은 무릎을 꿇은 채, 생각에 잠겼다.
‘흑의 기예병들이 저택을 밀어버리겠다는데 누가 감히 폐하를 힘들게 하겠어? 누가 감히 다른 짓을 하겠어? 남성국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 폐하는 만만한 분이 아니신데 누가 감히 괴롭히겠냐고? 남성국 황제는 괜한 걱정을 하는 거야.’
용수는 아쉬운 얼굴로 돌아섰다.
호성하교를 지난 그는 날렵한 자세로 말 위에 올랐다. 그제야 옆에 꿇어앉아 있던 헌원창과 다른 흑의 기예병들은 일어서서 말을 탔다. 그렇게 그들은 용수를 모시고 목국을 떠나 남성국으로 향했다.
야홍릉은 조용히 서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묵과 대신들은 서서 용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용수는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서서 야홍릉을 돌아보았다.
마치 견우직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만하기도 했다.
두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어 한 번 다녀오기 쉽지 않았다. 황제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나라를 오래도록 비워두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두 나라의 황제가 동시에 후궁을 비워두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차라리 이러는 게 나았다.
남성국 황제가 저리 난리를 치니 대신들도 더 이상 여 황제더러 후궁을 들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후궁 간택을 한다고 해도 도도한 세가 공자들이 원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내의 존엄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예병이 점점 멀어져가서 보이지 않을 때에야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었다.
“폐하,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정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깐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면 불타오른다고 하잖아요. 저희 폐하는 곧 돌아오실 거예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널따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연이 되어서 훨훨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곧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접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줄곧 차갑기만 하던 그녀는 용수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서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심지어 가끔씩 이렇게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정’이라는 것이 가장 무섭기는 했다.
궁으로 돌아온 야홍릉은 먼저 두 아이를 보러 갔다. 궁인이 올리는 예를 받으며 야홍릉은 내전으로 들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황자와 공주 모두 방금 깨셨습니다. 젖도 먹고 기저귀도 갈았으니 기분이 좋으실 것입니다.”
유모가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 안아보실 것입니까?”
야홍릉은 조용히 아이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애들이 혼자 놀게 놔두어라.”
“황자와 공주 전하가 한 달이 되자 폐하와 점점 닮은 티가 납니다.”
정란이 옆에서 아이들의 발그레한 얼굴을 보고 찬사를 금치 못했다.
“두 폐하의 장점만 쏙쏙 골라 닮았네요.”
“그러게요, 눈 큰 거 좀 봐요.”
첨향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제가 보니 황자 전하께서 더 잘 웃으시는 것 같아요. 공주 전하는 더 조용한 것이 오히려 더…….”
그녀는 한참이나 단어를 고르는 듯했다.
“황젯감 같은데요?”
정란은 그녀를 흘겨보았다.
‘얘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황자 전하야말로 황젯감이지.’
첨향은 혀를 홀랑 내밀고는 다급히 사죄했다.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 달 전보다 얼굴이 훨씬 핀 아이들은 눈 주변의 윤곽이 또렷한 게 용수를 닮은 것 같았다.
야홍릉은 아이들이 자신을 닮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누구를 닮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야홍릉은 한참 망설이던 끝에 밖으로 걸어갔다.
“진원, 상주서를 모두 가져오너라. 앞으로 짐은 자신궁에서 정무를 보겠다.”
야홍릉이 말했다.
“네.”
진원은 공손하게 대답한 뒤, 밖으로 걸어갔다.
야홍릉은 비단 탑에 기대앉아 정려가 올린 차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평생 그리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내다 이제 그리움이 뭔지 알게 되었는데 그 고통에 깊게 빠졌구나(平生不會相思,才會相思,便害相思).’
그녀는 평생 누군가를 그리워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용수가 떠난 순간부터 그녀는 뼈에 사무친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차를 마셨다.
* * *
보름 가까이 길을 걸어 용수는 드디어 오월 십팔 일에 남성국에 도착했다.
그는 남성국의 황성에 도착하자마자 다음 날 바로 남성국과 목국이 통혼했다는 조서를 다시 내리고 앞으로 남성국과 목국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황제의 여식인 헌원자롱을 신(宸) 공주로 책봉하고 자신궁에 묵도록 한다고 했다.
조서를 본 백성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황제의 여식? 폐하께 여식이 있었다고? 언제? 공주 전하는 어디에 계시는 거지? 왜 함께 오지 않으신 거지? 폐하께서 그동안 목국에 계셨다고 했지. 통혼한 여인도 목국의 호국 공주라고 하고…… 그런데 그 호국 공주는 이미 황제가 되었다던데? 그럼 폐하께서는 목국 황제와 함께 자식을 보신 건가?’
공주가 태어나자마자 봉호를 내리고 궁전을 하사한 경우는 남성국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신 공주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아이 이름이 헌원자롱으로 남성국 황족의 성씨를 따른 건 마음에 드는군. 그런데 황자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사람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공주일 뿐이니 앞으로 남성국의 종묘사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헌원용수가 남성국에 돌아왔을 때, 사청의도 제경으로 돌아왔다.
헌원용수는 헌원창더러 병사들의 훈련을 더욱 틀어쥐라고 했다. 그동안 헌원창은 많은 준비를 했다. 완벽한 무기와 갑옷들, 우량 전쟁용 말, 훈련이 잘된 기예병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육, 칠월은 날씨가 무더웠다. 용수는 병사들의 고생을 알기에 그들더러 낮에는 쉬고 아침저녁으로 훈련을 하라고 했다. 또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팔월이 되어 날씨가 시원해지자 헌원창은 흑의 기예병을 이끌고 남성국 황성에서 떠나 서릉으로 향했다.
헌원용수가 작년에 황위에 등극할 때 제호(帝號)는 홍(鴻)이었다.
때문에 올해는 헌원 홍제 원년이었다. 팔월에 헌원창이 서릉을 공격한 뒤, 구월에 남성국에는 새 황제가 등극한 뒤의 첫 과거시험이 열렸다.
각 지방에서 추위가 시작되면서 이듬해 춘위도 정상적으로 열렸다.
유월, 전시는 황제가 직접 주최했다. 용수는 직접 젊은 인재를 뽑아 조정에 새 기운을 불어넣었다.
매일 미친 듯이 바삐 보내야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잠시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헌원용수가 떠난 뒤, 야홍릉도 조정과 자신궁을 번갈아 다니며 정무를 처리하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는 모습을 보는 그녀는 아주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녀는 아이에 대한 집념이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를 더 낳을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아이들이 황위를 두고 서로 죽이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녀는 궁에서의 권모술수에 아주 지쳐 있었다.
그래서 지금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용수가 궁을 떠난 시간 동안 야홍릉은 매일 아이들의 귀여운 얼굴을 보면서 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아이들의 조금씩 변하는 얼굴을 보자 그녀는 처음처럼 괴롭지 않은 것 같았다.
용수가 떠난 지 한 달 만에 그녀는 남성국에서 보내온 서신을 받았다.
딸 헌원자롱을 신 공주로 책봉했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헌원자롱, 신 공주.
아주 고귀한 이름과 봉호였다.
삼 개월 뒤, 야홍릉은 또 남성국에서 보내온 서신을 받았다. 헌원창이 서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십이월의 서신에는 헌원용수가 그녀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길게 담겨 있었다.
이듬해 이월, 서신은 눈꽃처럼 자주 날아왔다. 야홍릉은 서신으로 그가 상세하게 보고하는 남성국에서의 바쁜 나날을 지켜보았다. 서릉과의 전쟁 상황을 전해듣는 그녀의 마음은 부드럽게 풀어졌다.
삼월, 헌원창이 이끄는 흑의 기예병은 서릉의 열세 개 주를 함락하고 도성으로 떠났다.
사월, 헌원용수는 제사전에서 묵백과 밤새 얘기를 나누었다. 제사전을 떠날 때, 그의 표정은 이상하게 의미심장했다.
유월, 헌원용수는 직접 전시를 주최하여 젊고 능력 있는 인재를 조정에 들였다.
그렇게.
어느새 헌원용수가 떠난 지도 일 년 가까이 되었다.
* * *
야홍릉의 쌍둥이도 돌잔치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돌잔치에 아버지가 오지 못했지만 야홍릉은 실망하지 않았다.
같은 황제인 그녀는 그 누구보다 제왕의 책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헌원용수에게 가장 바쁜 시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두 나라는 거리가 너무 멀어 용수는 시간을 길에 쏟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가장 짧은 시간 안에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얼른 아내와 아이들의 옆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야홍릉의 생각은 달랐다. 헌원용수가 너무 많은 것을 해왔고 항상 헌원용수가 무언가를 나서서 했다. 그녀는 그저 제자리에서 그가 주는 것을 받기만 했을 뿐이었다. 둘 사이에서 베푸는 쪽은 항상 용수였다.
그래서 야홍릉은 이번에 자신이 먼저 나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