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이별이 다가오다
야홍릉이 남녀 쌍둥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곧 궁에서 빠르게 퍼졌다.
대신들은 기쁜 한편 안심도 되었다.
남녀 쌍둥이가 태어났으니 황자가 태자가 되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용수는 한경백을 불러서 어서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각 대신들과 정무를 논의했다. 그는 태자에 대한 일은 이야기하지 않고 야홍릉이 무사하다고만 말했다.
나머지는 그들이 알아서 생각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한 시진 동안 정무를 처리한 뒤, 사람들이 물러가자 용수는 어서방 밖으로 나가 홀로 널따란 궁에 서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이 떠오르자 가 보아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궁을 나가 공주부로 향했다.
이미 궁에서 육 개월 넘게 산 야홍릉과 용수였다. 막 이사 들어왔을 때에는 이삼 일에 한 번씩 공주부로 갔지만 배가 불러오면서 발길이 점점 뜸해졌다.
공주부는 둘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었다.
용수와 야홍릉이 사랑을 싹 틔우고 키운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추억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는 야홍릉은 궁에 있기에 추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공주부로 갈 리는 없었다.
오늘 그는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길고 좁은 통로는 벽 위쪽에서 비추는 어두운 등불 말고는 빛이 전혀 들지 않았다. 지하 감옥은 습하고 음침했다.
용수는 감옥 문 앞에 섰다. 코를 찌르는 냄새에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조용히 서서 쇠창살 사이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원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는 옷과 헝클어진 머리는 길가의 거지보다 더 지저분했다.
그는 꼭 마치 생기 없는 나무 인형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감방 안은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했다.
벽 모서리에는 쥐도 몇 마리 드나드는 것 같았다.
“요즘 어떻게 지냈냐? 귀찮게 구는 사람이 없으니까 조용히 잘 지냈겠지?”
용수는 뒷짐을 지고 날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네 지난 죄를 떠올린 적이 있느냐? 악몽에 시달리지는 않았느냐?”
웅크리고 있는 남자는 죽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용수의 마지막 말을 듣자 큰 자극이라도 받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나 곧 조용해졌다.
“호국 공주는 이미 황제가 되셨다. 그리고 어젯밤에 남녀 쌍둥이를 낳으셨지. 난 옛정을 생각하여 너한테 말해주러 온 것이다.”
용수는 입꼬리를 올리고 말을 이었다.
“한씨 가문은 멸문했고 3황자와 황후는 죽었다. 태후와 야자릉도 평생 감금된 채로 살다 가겠지. 이 모든 건 다 너희들의 업보다.”
한옥금은 그동안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그가 비수로 야홍릉의 가슴을 찌르던 장면이 아니면 그가 능지처참 형을 당해 죽는 장면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깼다.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편히 잠자지 못했는지 떠오르지 않았고 매일 어떻게 먹고 사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겨울인지, 여름인지도 몰랐다.
그는 날씨와 온도에 대한 감각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종일 머리가 흐리멍덩해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늘 두 글자만 맴돌고 있었다.
‘업보.’
처음에 이성을 완전히 놓기 전까지는 다른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머릿속에 이 두 글자밖에 없었다.
용수는 조용히 서 있다가 감옥을 떠났다.
“오늘 저자의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거라.”
역졸은 다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네.”
마지막 식사라는 것은 이번 끼니를 먹이고 죽일 거라는 말이었다.
감옥 문을 나선 용수는 빚을 마주하고 섰다.
야홍릉과 자식까지 보았으니 한옥금을 깔끔하게 보내는 게 아이들을 위해 덕을 쌓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는 불안 요소를 없애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봉염.”
용수가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여기서 저자가 죽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봉염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주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용수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공주부 밖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은 배불리 먹었을까? 홍릉이는 홀로 침전에서 심심하지는 않을까? 산모는 바람을 맞으면 안 된다던데 침전에만 있는 홍릉은 답답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그의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더욱 빨라졌다.
기분이 더없이 뿌듯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금빛으로 물든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었다.
봄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고 딱 좋았다.
야홍릉은 남편이 매일 옆에서 보살펴주고, 어멈들과 영리한 궁녀들이 번갈아 시중을 드니 더없이 편한 나날을 보냈다.
아이가 크는 것을 보고 용수와 아이들의 이름에 대해 토론하다 보니 산후조리의 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황제가 산후조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대신들은 기쁜 마음을 억누르고 태자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자 야홍릉은 더 미루라는 어멈의 제안을 거절하고 목욕을 했다.
용수의 시중을 받으며 깨끗하게 씻고 나자 온몸이 개운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금욕한 용수를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용수는 야홍릉이 임신한 기간에도 몸을 사리며 제대로 정사를 벌이지 못했다.
“할까?”
야홍릉은 용수가 기뻐하며 덮칠 줄 알았는데 그는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며칠 더 기다려야 합니다.”
야홍릉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어멈들이 이런 일은 늦게 할수록 폐하의 몸에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몸이 상하면 어떡합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멈들은 경험이 많아서 용수는 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었다. 잠자리를 가지는 것도 여태까지 참았는데 며칠 더 못 참을 것도 없었다.
산후조리가 끝나고 조례에 나간 첫날.
대신들은 먼저 그녀에게 황자와 공주를 낳아서 축하한다는 말을 한 뒤, 태자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그들은 당연히 황자가 태자가 되기를 바랐다.
야홍릉은 아이를 낳은 뒤,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예전에 풍기던 차가운 냉기도 많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녀는 대신들의 제안에 화를 내지 않고 진원을 불러 조서에 대황자의 이름을 적었다.
야신근(夜辰瑾).
그제야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야홍릉이 기어코 공주를 태자로 세우려 할까 걱정했었다.
그래서 목숨을 무릅쓰고 반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쉬울 줄이야!
태자의 일이 정해지자 황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해결된 셈이었다.
대신들은 자신이 할 일을 열심히 하며 야홍릉에게 약점이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야홍릉의 성격이 아무리 유순해졌다 하더라도 절대 누군가 그녀의 발치에서 나쁜 짓을 하는 것은 봐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평화로운 사월도 지나갔다.
사월 말, 용수는 드디어 고대하던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야홍릉과 욕지에서 정사를 벌이고 또 그녀를 내전으로 안고 가 정사를 벌였다.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듯 그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앞으로 떨어져 있을 몇 달 동안의 것까지 한꺼번에 해야 했다. 오랫동안 남성국을 떠나 있었더니 그더러 돌아오라는 재촉 서신이 끊임없이 날아오는 데다 야홍릉도 계속 그더러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용수는 오월 초에 돌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사월 말에 연속 사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거운 정사를 벌였다. 둘에게서는 전혀 황제의 위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소요아(小嬈兒)는 먼저 궁에 남겨두겠습니다.”
용수는 야홍릉의 목을 끌어안으며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아기와 애비와 떨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허전합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속상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목국의 황궁에 처자식이 모두 있는데 그 혼자 쓸쓸하게 떠나려니 아쉬운 듯했다.
“나도 같이 갈까?”
야홍릉이 제안했다.
“가서 황후 책봉 대전도 하고 소요아가 공주가 되는 것도 볼 수 있고…….”
“안됩니다.”
용수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애비와 같이 돌아가고 싶으나 애들이 어려서 애들만 궁에 남겨두기 걱정됩니다. 나쁜 마음이라도 먹는 사람이 나타나면 어떡합니까?”
맞는 말이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자신궁에는 믿을 만한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야홍릉이 없다면 두 아이만 남겨두기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궁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궁인들을 까다롭게 뽑은 거라고 하지만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들어오지 못할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리고 정말 누군가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사용할 수 있는 수법은 많고도 많았다.
그들은 이런 모험을 할 수 없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그럼 네가 먼저 돌아가. 가서 남성국 대신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게 중요하지. 다른 것은 애들이 큰 뒤 보자꾸나.”
당분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황위를 일찍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해도 아직 말도 못하는 아기에게 황위를 물려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래 기다리기에는 용수에게 힘든 일이었다.
야홍릉 한 명만 그리워했던 예전도 힘들었는데 두 아이까지 생긴 지금 그에게는 목국이 집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집을 떠난 그리움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별의 날이 다가오고 말았다.
* * *
오월 초사흘 날, 남성국의 장군 헌원창이 직접 황제를 모시러 왔다.
선무문(宣武門) 밖에는 문무 백관들이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흑의 기예병들이 호성하교(護城河橋)의 다른 한쪽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숙연한 분위기를 풍겼다.
야홍릉이 직접 황부를 성문 밖까지 배웅했다. 목국 대신들이 예를 올릴 때, 호성하교 다른 편에 있는 흑의 기예병들도 마차에서 내려왔다.
헌원창을 선두로 한 기예병들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목국 황제 폐하 만세!”
헌원창이 시작을 떼자 뒤에 있던 기예병들도 따라서 외쳤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목국 황제 폐하 만세!”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기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말이었다.
목국 황제가 남성국 황후이기에 ‘황후마마를 뵙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황제 폐하 만세! 목국 황제 폐하 만세!’라고 한 것은 두 나라의 황제를 평등한 지위에 놓았다는 말이었다.
규정대로 하면 ‘황후마마 천세’가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황제이기에 ‘만세’로 부른 것이었다.
용수는 이렇게 시끌벅적한 영접 방식을 좋아하지 않으나 헌원창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한 것을 보아 뭐라고 탓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흑의 기예병은 목국 황제 야홍릉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을 몸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