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드러내다
야홍릉의 아기 아버지인 용수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
‘간택?’
그의 시선은 야홍릉의 부푼 배로 향했다.
그는 대신들에게 눈이 멀었냐고 묻고 싶었다.
‘배가 부른 황제더러 황부를 간택하라 한다고? 어느 가문의 귀공자가 궁에 들어와 여 황제 아기의 양부가 되려고 하겠어?’
남존여비의 사상이 오랫동안 지속된 나라이니 용수는 대신들이 황제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여인들은 입궁하여 황제의 비빈이 되는 것을 아주 기대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남자가 첩실을 들이는 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여인과 함께 한 남자를 섬기는 것에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어려서부터 여인들을 지시하는 데 익숙해졌고 아내와 첩실이 자신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데 익숙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더러 똑같은 한 여인을 섬기라고 한다면?
용수는 후궁 간택을 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말하는 대신들을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가문에서 적자를 황제의 황부로 보내겠어? 어느 집의 공자가 자신의 화상을 보내 황제가 하나하나 고르도록 하겠냐고?’
용수는 적극적으로 간택을 제안하는 대신들의 이름을 속으로 몰래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을 조정 밖으로 쫓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야홍릉은 용수의 질투를 눈치챘는지 단호하게 간택 제안을 거절했다.
“짐이 황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정력을 나라를 다스리는 데 쏟고 싶네. 목국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게 된 뒤에나 다시 짐의 개인적인 일을 논의하는 게 좋겠네.”
그녀의 말에 간택을 청하던 사람들도 입을 다물었다.
야홍릉이 침궁으로 돌아오자 새끼늑대 같은 용수는 야홍릉을 끌어안고 탑에 눕힌 뒤, 정사를 벌이려고 했다. 삼 개월이 지났기에 위험한 시기가 아니어서 정사를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태의는 너무 격렬하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용수는 부드럽게 세 번 했다. 그의 움직임도 전보다 훨씬 작아졌다. 그는 야홍릉 배 속의 아기가 다칠까 두려워 위험할 것 같은 동작은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
정사를 마치자 용수는 질투심이 좀 가라앉았는지 야홍릉을 끌어안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대신들이 너무 얄밉습니다. 매일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간택 타령이나 하고 말입니다. 폐하의 후궁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게 참 싱거운 사람들입니다.”
싱거운 사람들인 건 맞았다.
야홍릉은 침대에 조용히 누워 부푼 배를 만졌다.
새로운 생명이 몸에 잉태된 느낌이 신기했다.
야홍릉이 후궁의 일에 대해 말을 꺼냈다.
“난 다른 사람들을 후궁에 들이지 않을 것이다.”
용수는 그녀가 다른 사람을 후궁에 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야홍릉은 예전에 후궁을 잔뜩 들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건 그저 해보는 소리였다. 야홍릉이 만약 용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하는 일을 다 할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는 용수만 사랑하고 있어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을 수 없었다.
헌원용수 역시 후궁을 포기한 황제 아닌가?
“그러나 전 이걸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용수는 돌아누워 야홍릉을 품에 안았다.
“전 그들이 다시는 황부 간택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용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데?”
“최후의 신분을 아직 밝히지 않았지요? 저는 지금이 그들을 놀라게 할 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맞았다.
근래 용수의 신분이 어느 정도 밝혀진 것도 모두 그가 스스로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남첩이라는 신분에 거부감이 없었지만 ‘황제가 남첩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말은 야홍릉에게나 아기에게나 좋은 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슬슬 신분을 밝히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다만 바로 자신이 남성국 황제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좋지 않은 소문이 돌까 걱정되어서였다.
예전에 3황자가 죽임을 당한 것도 동제의 황제와 내통했기 때문이었다.
용수는 야홍릉이 괜한 약점을 잡히는 게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았다. 남성국과 목국은 통혼 관계를 맺고 영원히 전쟁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둘은 이미 부부가 되어 아이까지 가지지 않았나.
목국의 대신들은 죽고 싶지 않은 이상, 남성국에 미움을 살 모험을 하면서까지 야홍릉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또 며칠이 지났다.
대신들이 파견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두 돌아와서는 파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여 황제 옆에 있는 남첩이 바로 남성국의 정체 불명의 신비한 황제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럴 리가?”
그런데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승상은 작년부터 일어났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그러자 여태까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하나하나씩 이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호국 공주가 목국을 떠난 뒤로 누구도 그녀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야홍릉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첩자들도 바보가 아닌데 어찌 아무 소식도 알아내지 못했겠는가?
차라리 강한 세력이 야홍릉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게 더 말이 되었다.
3황자의 내통 증거도 그랬다.
야소숙은 그때 변방에 있었고 야홍릉은 변방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정확하게 야소숙과 동제 황제가 주고받은 서신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야홍릉은 동제로 갔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동제의 황제가 왔을 때도 호국 공주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했지.’
그때 용수도 동제의 황제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었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둘은 예전부터 아는 사이이고 관계도 나름 좋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야홍릉의 네 장군이 3황자의 내통 사건에 연루되어 황제가 천뢰에 가두라고 지시를 내리자마자 야홍릉이 돌아왔다.
그때 그녀는 어디 있었다는 말인가?
소식을 빨리 받고 바로 오다니. 황제가 두 장군을 잡아 오라고 변방에 파견한 사람들보다 더욱 빨리 돌아왔다. 그 말은 그녀가 계속해서 제경의 동향을 눈여겨보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목국에 그녀의 첩자가 있었다는 말인가?
야홍릉이 돌아오기 전에 남성국으로 초대받고 떠난 야천란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성국이 야천란을 초대한 행동 역시 음모라는 말인가?
남성국 황제는 처음부터 호국 공주의 옆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고 호국 공주 때문에 목국과 손을 잡고 금국을 쳤다.
이렇게 보니 두 나라의 통혼 사실만 해도 이상했다.
전임 황제도 남성국에 기가 눌려 호국 공주를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병권과 조정 대권을 주었다.
‘그래서 남성국 사신이 여러 차례나 폐하와 대신들에게 암시한 것이었군.’
따져보니 이제야 모든 일이 딱딱 들어맞았다.
물론 다른 일도 있었다. 한경백과 감진이 일으킨 작용도 작지 않았다.
장양후 숭준의 죽음 역시 이 남첩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권모술수에 민감한 대신들도 남성국 황제가 야홍릉을 위해 이 정도까지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그의 신분을 알게 된 것도 그가 일부러 흘린 거겠지? 그동안 계속 알아볼 때는 전혀 밝혀지지 않다가 갑자기 이렇게 확 드러나니 말이야.’
“참 무서운 수단이군.”
승상뿐만 아니라 선왕부에 있는 야모침의 심복들도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작년에 이 사실들이 들통났다면 폐하께서 크게 화를 내시며 호국 공주의 병권을 빼앗았겠지요. 그랬다면 호국 공주는 그저 명분뿐인 공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 심복이 말했다.
“아니면 폐하께서 죽였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공주는 지금 제위에 오르셨고, 대권은 물론, 남성국의 보호도 받고 있으니 우리는 약간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아무리 간 큰 대신이라고 해도 야홍릉의 현재 지위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전의 일이 드러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야홍릉을 황위에서 끌어내리려고 남성국과 척을 지겠는가?
지금 살아 있는 황자들의 능력과 지위를 생각해봐도 야홍릉의 상대로가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선왕은 능력이 없고 대황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야경함은 더욱 불가능했다.
9황자는 너무 어려서 목숨마저 야홍릉이 쥐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야홍릉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조정은 전임 황제가 있을 때의 조정이 아니었다.
세가 대신 중 야홍릉의 편으로 돌아선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권력이 분할되었다. 그 자리에는 야홍릉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입 관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젊은 관리들은 포부와 열정이 넘치고 여 황제를 진심으로 섬겼다.
그러니 누가 야홍릉의 지위를 흔들 수 있겠는가?
선왕은 포기하기로 마음먹었고 그의 심복들도 포기하라고 부추겼다.
먼저 직무를 내놓고 왕부에서 조용히 친왕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예전에도 있었지만 다들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야모침은 지금 끝없는 무기력함에 빠졌다.
속을 알 수 없는 야홍릉에, 더 속을 알 수 없는 남성국 황제가 붙었는데 누가 감히 그들과 맞서겠는가?
“앞으로 폐하와 맞설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용수는 야홍릉의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를 문질렀다.
그는 야홍릉의 앞에 산처럼 쌓인 상주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피곤하십니까? 좀 쉬시지 않겠습니까?”
“피곤하구나.”
야홍릉은 붓을 내려놓고 상주서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네가 하여라.”
용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제가 황위를 노릴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얼마든지 노려.”
야홍릉은 일어서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남성국에 병사들을 보내 네 구족을 멸할 테니.”
용수는 혀를 내두르고 야홍릉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폐하, 참 독하십니다.”
‘구족을 멸한다고?’
용수의 구족은 헌원씨의 종친이었다.
그들이 모두 죽는다면 남성국은 야홍릉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원래 죽일 때는 단호해야 하는 거다. 부드러운 여인의 마음으로 다스리면 안 되지.”
“애비 말씀이 맞습니다.”
용수는 웃으며 야홍릉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 목숨도 폐하의 손에 들어 있는데 폐하께서는 백릉이나 사약을 언제든지 내릴 수 있겠지요. 이 천하도 폐하의 것인데요 뭘.”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애완동물을 만지듯 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말을 잘 들으니 좀 오래 살려두어야겠구나. 나한테 새 남첩이 생기거든 다시 죽여도 늦지 않으니까.”
그러자 용수는 불만 어린 눈빛으로 야홍릉을 노려보며 말했다.
“새 남첩을 들일 것입니까?”
야홍릉이 말했다.
“짐은 목국의 황제이니 후궁을 들이는 것은 당연…….”
“애비는 남성국의 황후이기도 합니다. 황후가 바람을 피우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아십니까? 제가 오늘 남편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용수가 말을 자르며 야홍릉의 귀를 깨물었다.
그리고 야홍릉을 번쩍 들어 내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