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후궁을 총괄하다
태화전 안팎에서 신하들이 고개를 조아린 채, 새 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태화전 안에서는 승상과 내각 대신들과 예부 관리들이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헌원용수는 야홍릉과 똑같이 검은색 장포를 입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의 몸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압박감이 풍겼다. 사람들은 남첩 신분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이토록 성대한 대전에 나타나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야홍릉이 등극 대전에 나타난 순간부터 대신들은 이 상황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등극 대전은 끝났다.
등극 대전이 끝난 뒤, 성대한 궁중 연회가 남아 있었다.
황제와 신하, 그리고 다른 나라 사신들도 함께 즐기는 자리였다.
황제로 즉위한 야홍릉은 용의에 앉고 그녀의 양쪽에는 관리들이 품급에 따라 자리에 착석했다.
봉서오는 귀중한 축하선물을 올렸다. 남성국과 목국이 영원히 좋은 사이를 유지한다는 문서 외에도 남성국 새 황제의 옥쇄가 찍힌 혼서(婚書)도 있었다.
새로이 목국 황제가 된 야홍릉도 똑같이 위에 옥쇄로 도장을 찍는다면 두 나라의 황제는 목국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정식 부부가 될 수 있었다.
이 혼서는 둘이 황위에 있는 한, 영원히 효력을 가질 수 있었다.
혼서를 본 순간, 대신들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황제의 옆에 서 있는 청년에게 향했다. 그들은 남성국 사신이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봉서오는 눈이 먼 듯, 축하의 말만 한 뒤,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우아하게 말했다.
“폐하, 등극 대전이 끝난 뒤, 앞으로 저희 남성국과는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언제라도 좋으니 남성국으로 오십시오.”
황제의 옆에 무릎을 꿇은 청년은 야홍릉에게 차를 따라준 뒤, 또 과자를 집어 입가에 가져갔다.
“배고프시지요? 이걸로 요기하시지요.”
야홍릉은 입을 벌려 한 입 먹고는 천천히 음미했다.
용수는 하루 종일 바삐 보낸 야홍릉이 배고플까 걱정되어 음식을 권한 것이었지만 대신들의 눈에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으로 보였다.
나이 든 신하들은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시시각각 황족의 존엄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니 야홍릉이 공주 시절 얼마나 황당한 짓을 했던지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공주부에 남첩을 들이더니 지금은 등극 대전에 남첩과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남성국 사신이 화를 내면 어떡하지?’
그들은 야홍릉이 황제인 이상 후궁을 들일 수는 있다고 생각하나 남성국과 혼인을 맺자마자 남첩을 내보이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는 일반적인 부부가 혼인을 마치자마자 첩실을 들이는 것과 달랐다.
남존여비의 세상인데다 남성국은 목국보다 강했다. 그래서 두 나라가 아무리 사이좋게 지낸다고 해도 대신들은 목국이 수세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하늘인 세상이 아닌가?
아무리 황제라도 명의상 남편을 신경 써야 할 게 아닌가?
게다가 이곳에는 남성국의 사신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혼서를 가져온 남성국 사신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황제의 옆에 있는 남첩을 보고서도 놀라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폐하, 이것도 좀 드셔보세요.”
용수는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들고 야홍릉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
대신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배 속에 아기님도 있는데 굶으면 안 되지요.”
야홍릉은 그더러 조용히 하라고 하려다가 이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대신들은 분명 저를 여우라고 욕하고 있겠지요.”
헌원용수는 입을 삐죽이며 고기 완자를 야홍릉의 입속에 넣어 주었다.
“연회의 음식은 예쁘고 맛도 좋지만 먹어도 배가 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애비도 간단히 요기나 하십시오. 연회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서 많이 드시고요.”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대전 중앙에서 춤을 추는 무희들의 우아한 춤동작을 바라보았다.
분위기도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양옆의 대신들은 시선을 모두 야홍릉의 옆에 있는 청년에게 고정했다. 그리고 남성국 사신이 왜 여 황제와 남첩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는지 의아했다.
용수의 얼굴에 경멸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야홍릉은 탑에 기댄 채, 긴장을 풀고 있었다.
이 장엄한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참 재미가 없었다.
황제가 되었는데도 그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기 바쁜 능구렁이 같은 대신들뿐이었다.
황제가 현명하여 나라를 아무리 잘 다스린다고 해도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차를 홀짝였다.
성미가 차가운 사람은 떠들썩한 환경을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
야홍릉은 앞으로 불필요한 연회는 취소하고 이 돈으로 인재를 육성하고 군대의 양식에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폐하,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용수가 가까이 오더니 포도를 그녀의 입안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돌아가서 쉬시지 않겠습니까?”
야홍릉은 시선을 들더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모나게 굴 것은 없지.”
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모침은 홀로 조용히 앉아서 술을 마셨다.
그러다 한참 뒤, 옆자리의 봉서오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봉 공자는 언제 돌아가십니까?”
봉서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곧 돌아갑니다. 남성국 조정에 할 일이 많아 너무 오래 머무르지는 못할 듯합니다. 내일이면 돌아갈 예정입니다.”
야모침은 그에게 술잔을 들었다.
“봉 공자에게 한잔 권하겠습니다.”
봉서오는 우아한 자세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남성국 폐하께서는 언제 오시는지 압니까?”
봉서오는 멈칫하더니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제가 어찌 감히 지시를…….”
선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홍릉이는 성격이 괴팍하고 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도 봉 공자가 많이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봉서오는 침묵을 지키다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하의 뜻은…….”
봉서오는 시선을 들어 야홍릉 옆에 서 있는 용수를 힐끗 보고 다시 선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분 말씀이십니까?”
선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이게 뭐 큰일이라고.”
봉서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도리어 선왕을 위로했다.
“목국은 항상 남존여비의 사상을 고수하긴 했지만 지금은 여성이 황제가 된 시대지 않습니까? 한 나라의 황제가 후궁을 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전임 황제도 후궁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야모침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
‘후궁을 들인다고?’
“선왕은 여제도 후궁을 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못 받아들이시는 건 아니시죠?”
야모침은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내가 그걸 못 받아들인다는 게 아니잖아.’
그는 지금 봉서오에게 남성국 황제와 갓 부부의 연을 맺은 야홍릉이 남첩을 데리고 공공장소에 나온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러면 남성국 황제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 그런데 왜 이 남성국 승상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야?’
야모침은 안색이 퍼레졌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봉 공자는 참 너그러우십니다. 제가 시야가 좁아서 봉 공자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요.”
‘내 경지?’
봉서오는 입을 삐죽거렸다.
‘목국 황제가 우리 폐하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잖아? 비꼬기는…… 남성국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나?’
물론 야홍릉 옆에 있는 남첩이 바로 남성국 황제가 아니었다면 봉서오는 병사들을 발동해 목국의 조정을 발칵 뒤집었을 것이다.
봉서오는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연회는 자시가 넘어서야 겨우 끝맺을 수 있었다.
오늘부터 야홍릉은 더 이상 공주부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전에 머무르게 되었다.
정려, 정란, 첨향은 궁으로 들어와 야홍릉의 측근 시녀로 임명되었다.
진원은 또 내무반에서 야무지고 영리한 궁녀 수십 명을 뽑아 자신궁에 배치하였다.
야홍릉은 이것에 대해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예로부터 황제는 어디를 가나 항상 수많은 사람이 따라다녔다.
식사를 할 때도 궁인과 궁녀가 한 무더기였는데, 야홍릉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하루 종일 지속된 등극 대전에 지친 야홍릉은 늘어난 궁녀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 낭비가 심한 궁중 습관을 하나하나 고쳐나갈 생각이었다.
화려한 침궁에는 면사로 된 문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온통 용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가구는 엄격한 기준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기존 남자 황제가 사용할 때보다 침궁의 배치가 부드럽다는 점이었다.
제왕의 위엄을 잃지 않는 선에서 여인 특유의 분위기를 더해 덜 딱딱한 느낌을 풍겼다.
용수는 야홍릉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침궁 문을 들어설 때, 용수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폐하, 많이 피곤하시지요? 신이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야홍릉은 아주 피곤했다.
등극 대전 절차가 많은 것도 문제지만 임신부인 그녀는 쉽게 피곤을 느꼈다. 야홍릉은 눈을 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좀 쉬었다 목욕하러 가자.”
용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뒤, 그녀를 안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정려가 앞으로 가서 면사 문발을 젖혀주었다.
진원은 찬합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흰죽 두 그릇을 꺼냈다. 그것 말고도 고기죽, 포자, 교자, 진하게 끓인 어탕 등이 있었다. 종류가 다양하고 기름기도 적어 야식으로 먹기 좋은 음식들이었다.
“정란과 정려가 있으니 너는 요즘 내무반의 일에 신경 쓰거라. 그리고 처리해야 할 일도 처리하거라. 난 더 이상 눈에 거슬리는 일을 보고 싶지 않구나.”
진원은 고개를 숙이고 지시를 받았다.
“네, 폐하.”
“폐하, 이젠 등극도 하셨는데 왜 ‘나’라고 하시는 거예요? 호칭을 바꿔야 하잖아요?”
정려가 웃으며 말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다른 말을 했다.
“성지를 내리거라. 헌원용수를 내 정군인 황부로 임명하고 후궁 대권을 총괄하게 하여라.”
그러자 대전이 정적에 잠겼다.
진원은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폐하의 말씀은…… 남성국 황제 폐하를?”
헌원용수는 남성국 황제의 이름이었다.
“맞아.”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려는 저도 모르게 헌원용수를 힐끗 보았다. 그는 황제가 되었을 때보다 더 기뻐하는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