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강산이 바뀌다
신하들은 심지어 의심이 들었다.
‘오늘 태후가 사람을 보내 소동을 일으킨 것도 다 공주의 계획인가?’
앞으로 궁을 비롯하여 목국 강산에는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릴 것이다.
몇몇 젊은 관리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앞으로 나서며 큰절을 올렸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젊은이들의 활기 넘치는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다른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신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신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그들이 원해서 폐하라고 부르는 것이든, 아니든, 진심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드넓은 대전에서 대신들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폐하’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런 신하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는 기쁜 내색도 없이 그저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황금으로 만든 용의에 앉은 그녀는 소용돌이치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야모침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의 시선은 대전에 널브러진 시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까 이 사람이 죽기 전까지 야모침은 이번 기회에 태후를 도울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야홍릉을 끌어내려 사지로 몬다면 그녀는 영원히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황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핏줄이었다.
대신들이 그녀가 황족 핏줄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된다면 그녀는 그대로 끝장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찰나, 야홍릉은 그 사람을 죽여버렸다.
그는 야홍릉이 이 정도로 제멋대로 굴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대전에서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태후의 사람을!
야홍릉은 악독하고 독재적이며 이치와 예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야모침은 대신들이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는 지금도 야홍릉은 전혀 기쁜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존의 상징인 용의에 앉았는데도 그녀는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강산에 큰 야심이 없어 보이는 것처럼.
‘그런데 왜 그 자리를 빼앗으려고 한 거지? 저럴 거면 황위를 다른 사람에게 주면 좀 좋아? 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째서 황위를 욕심낸 거지?’
야모침은 처음으로 야홍릉에게 불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야홍릉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인이라고 해도 고귀한 공주잖아. 병권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왜 한적한 삶을 살지 않은 거지? 왜 굳이 좋아하지도 않은 황위에 오르려고 한 거야?’
야모침은 눈을 질끈 감고 불만과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대전의 시신은 곧 끌려 나가 자안궁 밖에 놓였다.
야홍릉은 잔인한 방식으로 조악한 수법이 그녀에게 통하지 않음을 입증했다.
설사 야홍릉이 황족의 핏줄이 아니라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명확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바뀔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황위를 빼앗았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목국의 세대가 바뀐다고 해도, 황족의 성씨가 바뀌더라도 야홍릉은 절대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위엄은 허세가 아니라 그럴 만한 것이었다.
구족이 멸문해도 상관없단 마음으로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대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 전체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때문에 야홍릉은 이번 전쟁에서 완승할 수 있었다.
신하들이 새로운 황제를 참배한 뒤로 야홍릉은 목국의 새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황은 태상황(太上皇)이 되었다.
이미 그의 생사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완치될 수 있을지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목국은 지금 야홍릉의 것이고 목국의 천하를 다스릴 사람도 야홍릉이라는 것이었다.
황제가 바뀌면 신하들도 바뀐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었다.
흠천감(欽天監)이 날씨를 보고 좋은 날을 고르면 등극 의식을 치를 것이다.
* * *
자안궁에서 시신을 본 태후는 놀라서 기절했다.
그동안 태후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야자릉도 겁을 먹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무서운 결과는 아니었다.
감금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그녀와 태후 모두 자안궁에서 누구와도 왕래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은 야자릉은 그제야 절망을 느꼈다.
한씨 가문과 야소숙의 일로 육 개월 넘게 감금되어 있다 겨우 풀려나 태후의 옆으로 오게 되었던 야자릉은 곧 원래대로 공주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를 기다리는 게 똑같은 감금이라니.
게다가 이번 감금은 평생 다시 풀려날 수 없는 감금이었다.
용의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은 궁 또한 피갈이를 하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비빈들은 물론 궁녀와 내관들 역시 모두 새롭게 분배될 것이다.
야홍릉은 젊고 영리한 진원(陳遠)을 새로운 대총관으로 임명했다.
진원과 정려는 한묵의 조력을 받아 내무반을 맡게 되었다.
“각 비빈은 당분간 승경궁(承慶宮)으로 이동하고 승경궁 밖에서 금위군들이 지키도록 하여라. 절대 누구도 승경궁을 드나들게 해서는 안 된다. 자안궁의 태후마마는 몸이 좋지 않으니 앞으로 염불을 외우는 데 집중할 것이다. 8공주 야자릉만 곁에 남기고 절대 다른 사람이 자안궁을 드나들지 못하게 하여라.”
“6황자를 감금하라.”
“9황자를 그의 생모에게 보내라.”
진원이 공손히 물었다.
“태상황은 어찌할까요?”
건양궁은 본래 황제의 거처였다.
새 황제가 등극했으니 태상황인 원래 황제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마땅했다.
“건양궁은 그대로 두어라. 짐은 당분간 호국 공주부에서 묵을 테니 사람을 시켜 자신궁(紫宸宮)을 청소하도록 하여라. 앞으로 자신궁에 묵겠다.”
“네, 알겠습니다.”
궁에는 자잘한 일이 많아 지시할 것도 많았다.
그렇게 야홍릉은 한밤이 되어서야 궁에서 나올 수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녀의 뒤에는 훤칠한 남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문발을 드리운 야홍릉은 탑에 앉기도 전에 그 누군가의 아래에 깔렸다.
익숙한 숨결과 내음이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청년은 야홍릉을 풀어준 뒤, 난폭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부터 목까지 물어뜯을 듯이 입을 맞추자 새하얀 야홍릉의 목덜미에는 새빨간 자국이 남았다.
“애비…… 황제 폐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설렘이 묻어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용맹하시고 현명하신 폐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헌원용수에게 물린 목이 따끔거리는 것과 별개로 마차 안의 공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용수를 밀었다.
“왜 이렇게 흥분해? 그럴 일이야?”
“네, 그럴 일입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풀어주고는 고개를 들고 야홍릉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 저는 폐하의 진정한 신부(臣夫)입니다.”
‘신부?’
야홍릉은 처음으로 이런 단어를 들은지라 저도 모르게 헌원용수의 얼굴을 떠밀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구겨진 옷을 정리하며 탑에 앉았다.
“단어를 제멋대로 만들지 말거라.”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용수는 미소를 띠며 억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신첩이라고 지칭할까요?”
야홍릉은 바보를 보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야홍릉은 헌원용수가 점점 애처럼 변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헌원용수는 야홍릉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뿐이었다.
그녀가 소원을 이루는 모습을 보자 용수는 자신이 등극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기뻤다.
“흠천감이 대전 날짜를 골랐습니까?”
“아직.”
“급할 건 없지요.”
용수는 탑에 앉아서 야홍릉을 품에 안고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애비는 지금 몸 상태가 특별하지 않습니까? 등극 대전은 간략하게 진행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등극 대전은 절차가 많고 번거로웠다.
수많은 황족 선조들에게 예를 올려야 하니 체력이 아무리 좋은 사람도 힘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야홍릉은 임신한 몸이기에 너무 지치면 큰일이었다.
용수는 생각해 본 뒤, 말했다.
“지금 임신한 것을 핑계로 절차를 줄이는 것이지요.
아이가 태어난 뒤, 등극 대전을 올린다면 시간이 너무 길게 들 것이 뻔했다.
임신한 지 첫 삼 개월은 유산될 위험이 있고 삼 개월 뒤에는 배가 불러와 절을 하기 불편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난 원래 등극 대전에 크게 관심이 없으니. 너도 내가 이런 형식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잖아?”
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았다. 야홍릉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생에 당한 것을 되갚아주기를 원했지, 등극 대전 같은 형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용수는 문득 무언가 떠올렸다.
“애비.”
용수의 품에 안긴 야홍릉은 평소와 다르게 연약한 소녀 같았다. 그녀는 용수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용수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턱을 잡은 뒤, 입을 맞추었다.
용수는 깜짝 놀라며 야홍릉을 안은 팔에 힘을 가했다.
“애비.”
야홍릉은 가볍게 대답하며 그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야홍릉은 이런 것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동안 용수를 보고 배운 게 있어 곧잘 따라 했다.
둘은 가벼운 입맞춤으로 시작해 점점 몸이 달아올라 서로의 입속을 깊숙이 탐닉했다.
용수는 저도 모르게 야홍릉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뜨거운 입술로 그녀를 공략했다. 그의 손은 허리에서 시작되어 천천히, 천천히 야홍릉의 옷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야홍릉의 옷고름을 풀려고 하는 순간, 다른 한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헌원용수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야홍릉의 평온한 눈빛과 마주친 용수는 그제야 도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임신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헌원용수는 충동을 억누르며 실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와 여인은 이게 다르네요.”
남자는 성적인 충동을 참기 어려우나 여인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야홍릉은 그의 표정을 보더니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도와주랴?”
‘돕는다고?’
용수는 멍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야홍릉은 손을 그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이거로.”
용수는 표정이 굳었다가 실소를 터뜨렸다.
“괜찮습니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다시 야홍릉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애비, 참 다정하십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싫다고 하니 그만이었다.
마차는 곧 호국 공주부 앞에서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헌원용수는 이미 끓어오르던 욕망을 잘 억누른 뒤였다.
그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공주부의 대문으로 들어갔다.
홍릉원에 들어선 용수는 정려더러 도 의원을 불러오게 했다.
“용수.”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잘 가르쳐서 내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