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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75)화 (27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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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화 꽃 한 송이와 정원 전체

사청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용수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자 그는 곧 미간을 펴고 담담하게 말했다.

“살면서 이렇게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데 폐하를 축복해 드려야지요.”

봉서오는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착하게 변했습니까?”

사청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판을 튕기기 시작했다.

“당신도 혼자 산 지 오래되었고 나이도 어리지 않으니 혼인에 대해 생각해 볼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봉서오는 부채를 접어 손에 쥐었다.

“육 낭자가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알아보지 않으실 것입니까?”

“복수를 해야 하는 몸이라서 애먼 낭자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 나이도 한참 많아서 적절하지 않고요.”

사청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관리나 귀족들 중 아내, 첩실 할 것 없이 주렁주렁 두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색골들은 일흔, 여든이 되어서도 첩실을 들이는데 사 공자는 육 낭자보다 열 살 정도 더 많을 뿐이 아닙니까? 지금 여인들은 열예닐곱 살이 되면 시집을 가는데 누가 스무 살 넘도록 처녀랍니까? 공자의 말대로 하면 평생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사청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혼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평생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니 대를 잇지 않아도 상관없을 게 아닌가?

게다가 복수를 하지 못한 지금, 그는 다른 것을 할 생각이 없었다.

봉서오는 사청의의 꽉 막힌 성격에 답답했다.

하지만 사청의의 일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둘의 사이는 못 하는 말이 없을 정도로 가깝지 않은데다 철천지원수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청의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치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사청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말을 잘못 꺼냈다 사청의의 아픈 과거를 건드릴까 두려웠다.

봉서오는 사청의의 비극이 잘못된 사랑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질 테지만 마음에 박힌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이다.

사씨 가문은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고 그가 처음으로 연모하게 된 여인도 사씨 가문을 멸망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없었다.

봉서오는 한참 앉아 있었지만 특별히 나눌 얘기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용수의 사람이었지만 신분과 맡은 분야가 달라서 서로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봉서오는 떠나려고 하다 문득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는 육경경이 떠올랐다.

그래서 넌지시 제안했다.

“당분간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육 낭자는 좋은 사람이니 거절하더라도 부드럽게 하시오. 너무 단호히 하지 말고.”

사청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서오는 눈을 흘겼다.

그는 사청의와 육경경이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잘생긴 미남을 무시할 정도니 말이야.’

봉서오는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

서재의 문이 닫히자 사청의는 주판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망설이던 끝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청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향했다.

그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평생 여인과 가까이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직접 하는 게 맞았다.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 두어야지 두루뭉술하게 말해서 앞날이 창창한 낭자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육경경은 일시적인 호기심으로 이러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 * *

“육 군왕의 여동생이 사청의에게 마음이 있다고요?”

야홍릉은 깜짝 놀란 듯했다.

반 시진 동안 쉬고 나자 봉서오가 이 소식을 들고 공주부로 돌아왔다. 간만에 듣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봉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사 공자는 단호했습니다. 육 낭자와 잘해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을 테지.”

용수가 일어서며 야홍릉의 뒤에 가서 섰다.

그리고 야홍릉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사청의가 어쩌든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어라. 신경 쓰지 말고.”

봉서오가 투덜거렸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할 일이 없어 심심한 걸 어떡합니까?”

용수는 침묵했다.

“신도 지금 괴롭습니다. 얼른 목국의 대신들에게 압력을 가해 공주 전하를 황위에 올린 뒤, 남성국으로 가고 싶습니다.”

봉서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 떠날 때마다 저를 그리워하는 여인들이 얼마나 슬프게 우는지 아십니까?”

용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면박을 주었다.

“실컷 그러고 놀아라. 그러다 나중에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크게 후회할 테니.”

봉서오는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꽃 한 송이 때문에 정원 전체를 포기하는 것은 신의 성격에 맞지 않습니다.”

그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는 정원 가득한 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용수와 야홍릉은 그 말을 듣더니 일제히 그를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 * *

다음날.

조례에서 승상을 선두로 한 대신들은 모두 황제 자리를 비워두면 안 된다고 했다.

태의의 말에 의하면 황제의 병이 심각해 당분간은 나을 것 같지 않고 앞으로도 완치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의 뜻대로 호국 공주를 목국의 황제로 모시기로 했다.

말을 마친 대신들은 호국 공주에게 큰절을 올렸다.

야홍릉은 말없이 대전 위에 서서 담담한 얼굴로 대신들을 내려다보았다.

대신들이 ‘폐하 만세’를 외치고 있을 때, 대전 밖에서 누군가 급히 뛰어오며 큰소리로 외쳤다.

“호국 공주 야홍릉은 폐하의 친딸이 아니다! 호국 공주는 황제가 될 수 없는 신분이다. 황실 공주의 신분을 폐하고 모든 권력과 영예를 빼앗은 뒤, 서민으로 강등해야 한다! 야씨 황족의 핏줄과 존엄을 지켜야 한다!”

그 말에 대전은 발칵 뒤집혔다.

대신들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장포를 입은 그는 서른 살 남짓해 보였는데 늘 태후의 옆을 지킨 고수였다.

사람들은 예전에 그가 장양후처럼 태후의 남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장양후보다 조용하고 겸손해 눈에 잘 띄지 않았는데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것이다.

“태후께서 말씀하셨다. 야홍릉은 황실의 핏줄이 아니기에 황실의 영예나 권력을 누릴 자격이 없다! 황제는 다른 사람이 이어받아야 한다. 안 그러면 대전의 대신들은 모두 목국의 죄인이 될 것이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대전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야홍릉은 뒷짐을 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대전 중심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태후가 이 기회를 오래 기다렸을 텐데 어찌 그냥 내버려 둘 리 있겠는가?

오래도록 숨을 죽이고 참으며 이날만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악한 수법은 야홍릉에게 한없이 우습게 느껴졌다.

“공주 전하,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십니까?”

남자는 시선을 들고 대전 위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주 전하, 혹시 예전부터 자신의 신분을 알고 계신 게 아닙니까? 그래서 야씨 황족의 황자들을 몰살하여 등극하려는 건 아니고요? 태후께서 명하셨다. 지금 바로 야홍릉을 잡아들여 천뢰에 가두거라!”

벼락같은 호통에 멍해 있던 대신들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대신들은 소곤거리며 의심과 경악이 가득한 눈빛으로 야홍릉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조정에 어떻게 남첩 따위가 들어와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냐!”

야홍릉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녀에게서는 매서운 살기가 느껴졌다.

“여봐라!”

그녀의 말과 함께 누군가 대전으로 들어오더니 남자에게 뛰어왔다.

대전의 공기는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남자는 위험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몸을 돌리고 손을 들었으나 밖에서 뛰어온 남자는 놀라운 속도로 대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콰직!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이상한 자세로 목이 비틀린 채 죽었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모습이었다.

대신들은 숨을 헉 들이쉬었다.

“내가 황족의 혈통이 옳은지 아닌지는 태후마마도 그렇고, 부황께서도 잘 아시겠지.”

야홍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육 개월만 지나면 만으로 열여덟 살이 된다. 나는 공주의 신분으로 십팔 년 가까이 살았으며 누구도 나한테 황족의 핏줄이 아니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지. 그런데 태후마마께서 아무런 근거 없이 내뱉은 말로 혼란스러워져서야 되겠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의 생일은 십이월이었다.

몇 개월만 지나면 열여덟 살이 되는데 그동안 누구도 야홍릉의 출신에 의심을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 황제의 친딸이 아니었다면 황제가 그녀를 지금까지 살려뒀을 리도 없고, 그녀에게 권력을 주었을 리도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나는 열두 살 이후 군영에 들어가 열세 살부터 전쟁터로 나갔네. 군공은 다 그 몇 년 사이에 쌓은 것이지.”

야홍릉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군영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누구의 보호도 받지 않았고 그때는 나이가 어려 스스로를 지키지도 못했네. 내가 정말 부황의 친딸이 아니라면 진작 죽임을 당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신하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홍릉의 말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무 근거 없이 황족의 핏줄로 장난을 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공주 전하, 화를 푸십시오.”

대신들은 목이 비틀린 사체를 힐끔힐끔 곁눈질로 보며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야홍릉이 한 말이 더 사실로 느껴졌다.

‘태후마마께서 이런 시국에 공주의 핏줄을 의심하는 말을 하다니. 대신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싶었던 것이지. 그 마음 참 고약……. 아니, 그래도 태후마마인데 고약하다고 할 수는 없지.’

“태후마마께서 연세가 많으신데다 몸이 좋지 않아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드셨겠지. 이런 때일수록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쉽다는 것을 안다네.”

야홍릉은 대신들을 둘러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태후마마께서는 채식 위주로 식사하시고 염불을 외워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하여라. 더는 태후마마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 한묵!”

그러자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젊은 남자가 대전 밖에서 걸어오며 예를 올렸다.

“네, 폐하.”

“자안궁을 잘 지키도록 하고 아무도 태후마마께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여라.”

한묵은 허리를 숙였다.

“네, 폐하.”

말을 마친 그는 공손하게 물러갔다.

대신들은 ‘네, 폐하’라는 말을 들었으나 누구도 나서서 시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야홍릉의 지시가 곧 태후를 궁에 감금하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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