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당당한 여인
용수는 그녀의 앞에서 남성국의 경제와 실력을 과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용수는 남성국에서 누가 황위에 오르든 앞으로 십 년은 그 자리에 흔들림이 없을 것을 알고 있었다.
명군과 혼군과의 차이는 명확하다.
남성국을 줄곧 부강하게 이끌면 명군이고 나라가 점점 혼란스러워지면서 실력이 약화된다면 혼군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국은 짧은 시간 안에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강자였다.
용수는 남성국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상관이 없었지만 야홍릉이 강적과 마주하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제가 목국을 떠나지 않아도 남성국 정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애비는 안심할 수 있겠지요?”
야홍릉은 침묵을 지켰다.
“애비.”
용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남성국의 매를 잊지 않으셨지요? 제가 말을 타고 왕복하는 것보다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해동청도 있지 않습니까? 절대 괜찮을 것입니다.”
‘정 안되면 봉서오더러 왔다 갔다 하라고 하면 되지. 그리고 나에게는 쓸만한 심복도 많잖아.’
누각에서 내려오던 봉서오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그는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람도 없는데 왜 갑자기 추워진 거지?’
봉서오는 풉 웃더니 부채를 흔들었다.
‘추운 게 아니라 속이 시커먼 누군가가 날 괴롭힐 생각을 한 게 아니야?’
그는 원래 공주부로 와서 용수와 나랏일에 대해 의논할 생각이었으나 용수는 그를 내버려 둔 채, 야홍릉과 침전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완전 자기 멋대로라니까. 이참에 나도 다 때려치고 남성국으로 돌아갈까? 가는 길에 동제에 들러 둘러봐도 되고 말이야. 아니면 감진과 함께 떠날까?’
봉서오는 이런 생각을 하며 밖으로 걸어갔다.
그는 먼저 목국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지금 날씨는 아주 무더웠지만 말이다.
하얀색 장삼을 입은 채, 거리를 노니는 봉서오는 단연 눈에 띄었다.
다루나 주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들도 창문으로 그를 보면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발걸음이 빠른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경의 사기전장(謝記錢莊)에 도착했다.
“봉 공자.”
옆에서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 찾으러 오셨어요?”
봉서오는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말을 건 소녀는 열예닐곱 살 되어 보였는데 청순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봉서오는 소녀가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자는?”
여인은 생긋 웃더니 말했다.
“저는 육 군왕의 여동생인 육경경이에요.”
봉서오는 그제야 기억이 났다.
지난번에 목국에 왔다가 감진의 생일날, 호국 공주부에서 육경경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날, 봉서오는 육경경의 얼굴만 보았을 뿐,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그날 공주부에 간 귀족 공자들과 소저들이 하도 많아 봉서오는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봉서오는 남성국에서 온 사신인데다 잘생기기까지 하여 연회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육경경이 봉서오를 아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봉서오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
“낭자,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봉 공자, 돈을 찾으러 오셨어요?”
봉서오는 부채를 흔들며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육경경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면 여기는 왜 오셨어요?”
“돈을 꺼내는 것 말고 전장에 다른 이유로 올 수는 없나요?”
육경경은 말문이 막혔지만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전 그 말이 아니라…… 공자, 혹시 이 전장의 사장을 아세요?”
‘사장?’
봉서오는 놀란 눈으로 육경경을 훑어보았다.
“왜 그럽니까?”
육경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공자는 참 까다로워. 무슨 질문이 이렇게 많아?’
봉서오는 육경경의 얼굴에 드러난 귀찮은 표정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그의 얼굴을 보며 짜증을 내는 여인은 육경경이 처음이었다.
봉서오는 자신의 준수한 얼굴이 세상 여인들 모두에게 먹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여인들의 미움을 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육 낭자도 날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성격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저는 전장 사장을 압니다.”
봉서오는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육경경이 뭘 하려는지 궁금했다.
“무슨 일이시죠?”
육경경은 그 말을 듣더니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절 데리고 그분을 뵈러 갈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봉서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러나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는 바쁜 사람인데 이유 없이 찾아갈 수는 없지요.”
육경경은 미소를 짓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 올해 열여섯 살로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제경에는 마음에 드는 공자가 없었어요. 그런데 사씨 사장을 보니 마음에 들어서 봉 공자가 다리를 좀 놔줄 수 있나 해서요……. 어렵다면 절 데리고 가서 만나게만 해도 돼요.”
봉서오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렇게 수줍음 많은 소녀가 나더러 다리를 놔달라고? 결국에는 그저 나더러 사청의를 만나게 해달라는 거잖아? 참 희한한 일일세. 무장 가문 출신이라 그런지 성격이 시원시원하군.’
봉서오는 흥미가 동했다.
“육 낭자. 사씨 사장을 뵌 적 있습니까?”
봉서오가 물었다.
‘당연한 소리를. 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좋다고 달려들겠어?’
육경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좋아하십니까?”
육경경은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 질문이 이렇게 많아?’
봉서오는 입가를 실룩거렸다.
‘참 인내심이 없는 낭자군.’
사실 그는 자신처럼 멋지고 훤칠한 귀공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사청의를 만나고 싶냐고 묻고 싶었다.
‘개성이 뚜렷한 육씨 가문 낭자야.’
사청의는 최근 몇 개월 동안 아주 바삐 보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그는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씩 공주부로 가서 용수와 공무를 논의하는 게 다였다.
남성국과 멀리 떨어진 지금도 며칠에 한 번씩 매를 보내 남성국에서 소식을 알아보고 지시를 내렸다.
그는 가지고 있는 권력이 커서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았다. 그는 조정에 몸담고 있지 않았지만 남성국의 조정에 다른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어렸을 때 승상부에서 자랐던 그는 큰일을 겪은 뒤, 조심성이 커졌다.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완벽하게 했다.
아무리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어도 그는 절대로 곳곳에서 들리는 동향을 흘려듣지 않았다.
강호와 상업계는 그의 주요 세력이었다. 매일 정보를 받고 장사가 제대로 돌아가게 조작하는 것만으로 그는 아주 바빴다.
사기전장 뒤에는 마당이 있었는데 사청의는 종종 이곳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장부책을 정리했다. 그는 주판을 노련한 솜씨로 튕겼다.
첫눈에 반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는 말에 불과했다.
그러나 육경경이 반한 것은 사청의의 듬직한 분위기와 점잖아 보이지만 뼛속 깊이 박힌 강한 기백이었다.
그녀는 사청의의 진짜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자신이 기다리던 남자임을 알아보았다.
사청의에게서는 남다른 느낌이 풍겼다. 아마도 그가 겪어온 남다른 인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육경경은 기본적인 것부터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청의가 혼인은 했는지, 아내는 있는지 말이다.
설렘이 사랑으로 변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순수하게 시작될 수 있도록 잘 알아보아야 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첩실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을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정실이 되는 것은 그녀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다른 여인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만약 사청의가 혼인했다면 그녀는 깔끔하게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만약 사청의가 아직 혼인하지 않았고 마음에 품은 여인도 없다면 육경경은 평생의 시간을 들여서라도 사청의에게 구애를 펼칠 생각이었다.
봉서오와 육경경은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서재의 밖에 도착했다.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서재의 문이 열렸다.
방안에서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봉서오는 부채를 흔들며 들어갔다. 그는 서재에 얼음 두 접시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혀를 찼다.
“다들 마음이 가라앉으면 더위를 못 느낀다고 하더니 사 공자는 아직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했나 봅니다.”
사청의는 장부책에서 눈을 떼고 평온한 눈길로 그를 힐끗 보았다.
그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순간, 봉서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
“이분은…….”
“사 공자.”
육경경은 미소를 짓더니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저는 육경경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네요.”
봉서오는 심드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육연지의 여동생인데 올해 열여섯 살이라네요. 사 사장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육경경은 입가를 실룩거렸다.
“봉 공자, 무슨 말씀을 그리…….”
‘직설적으로 하냐고? 사 공자가 놀라서 도망이라도 칠까 봐 걱정되는 거야?’
사청의는 자신에게 이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인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복수를 끝마치기 전까지는 혼인에 대해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사청의였다.
하지만 육경경이 어린 소녀인 점을 감안해 직접적으로 거절하여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목국 육 군왕의 여동생이 아닌가?
사청의는 생각을 해본 뒤,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제가 봉 공자와 나눌 얘기가 있으니 정원에서 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육경경은 이 말에서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다. 사청의와 봉서오가 아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둘은 남들이 알 수 없는 사이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 공자는 목국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데. 그런데 목국에 전장을 열었다고?’
흠칫 놀란 육경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일 보세요.”
사청의는 손을 들고 지시를 내렸다.
“육 낭자를 정원의 정자로 모시거라. 다과도 올리고.”
“네.”
육경경은 시녀와 함께 자리를 떴다.
봉서오는 서재로 들어가서 흥미진진한 눈길로 사청의를 바라보았다.
“여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분이 어떻습니까?”
“아무런 생각도 없습니다.”
사청의는 다시 책상 앞으로 가서 앉으며 장부책을 뒤적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는 폐하와 함께 국가 대사를 논의하러 왔으나 폐하께서는 정인과 사랑 타령을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더라고요.”
봉서오는 말을 하며 서재의 귀퉁이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부채질을 했다.
“답답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