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궐황도 (272)화 (273/301)

1667699067974.jpg 

272화 무서운 호국공주

대신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어떠냐고? 우리들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어?’

어서방으로 나온 야홍릉은 바로 공주부로 돌아갈 생각을 접고 건양궁으로 향했다.

건양궁 밖에서 지키고 있던 금위군들은 야홍릉을 보더니 공손하게 예를 올리기 시작했다. 금위군들이 건양궁 안팎을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어 육 개월이 넘도록 누구도 허락 없이 건양궁에 들어서지 못했다.

대전으로 들어간 야홍릉은 여러 개의 문을 지나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진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호접고는 영물이었다. 사람의 피를 마시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독을 토하지는 않았다.

호접고가 인체로 들어간 뒤,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사람을 죽이거나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이 기절한 상태로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니 몸이 망가질 뿐이었다.

야홍릉은 당분간 황제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매달 황제를 한 번씩 깨워 탕약이나 음식을 먹게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몸이 서서히 망가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손 총관.”

야홍릉이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뒤에 서 있던 손평이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네, 전하.”

야홍릉은 고개를 돌렸다.

손평이 비수와 작은 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야홍릉이 말했다.

“가져오시게.”

“네.”

손평이 걸어왔다.

야홍릉은 소매에서 작은 칼을 꺼내 손가락 끝을 살짝 베었다.

그리고 피를 그릇에 떨어뜨렸다.

야홍릉의 손에서 나온 피비린내가 대전을 가득 채웠다.

깊은 잠에 들었던 황제는 갑자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창백하던 얼굴에 실핏줄이 툭툭 튀어나오며 목구멍으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야홍릉은 새하얀 손수건으로 칼날의 핏기를 닦은 뒤, 손가락 끝을 눌러 지혈했다.

이때, 황제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떴다.

“부황, 깨셨습니까?”

야홍릉의 담담한 목소리는 황제의 귀에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너……!”

“부황, 흥분하지 마세요.”

야홍릉은 그릇을 들어 황제의 입가로 가져갔다.

“이걸 마시면 고통이 덜해질 것입니다.”

황제는 발악하지 않았다. 발악할 기운도 없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 피를 조금씩 마셨다. 짙은 피비린내에 역겨운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둘도 없는 영약이었다.

지난 육 개월 동안 매달마다 벌어졌던 일이었다.

처음에 황제는 발악하며 피를 마시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몸속의 벌레가 그를 미친 듯이 물어뜯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야홍릉은 냉혹하고 매정한 악마였다.

“너 이 고얀 것, 도, 도대체 원하는 게 무엇이냐?”

몸속의 벌레가 야홍릉의 피로 잠잠해지자 황제는 심호흡을 했다.

얼굴에 드리웠던 고통스러운 기색이 점차 사라졌지만 증오로 가득한 말투는 여전했다.

“야홍릉, 짐이 짐승 같은 너를 괜히 키웠구나!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야홍릉은 그릇을 쟁반 위에 올려놓으며 손을 저었다.

그러자 손평은 허리를 굽힌 뒤, 물러갔다.

“고얀 것…… 이, 이 후레자식!”

황제는 숨을 헐떡였다.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않은 탓에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야홍릉, 넌…… 넌 짐승이야. 악마 같은 것……!”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의 욕설을 들은 뒤, 담담하게 대꾸했다.

“부황께서 육 개월 넘게 주무실 동안 저는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부황의 아들 중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천뢰로 들어갔지요. 야모침은 아직 조정에 있으나 몸을 사리기 바쁘고…… 참, 오랫동안 갇혀 있는 야경함도 있네요. 그리고 어린 남동생도 있고요…….”

황제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변했다.

“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죽음을 자초한다면 말이 달라지겠죠?”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운이 없어 결국에는 침대에 기댔다.

“너……!”

“부황, 욕할 기운을 아끼시는 게 좋으실 것입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다고 지금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황제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울분을 토했다.

“홍릉아, 너 왜…… 왜 갑자기 이렇게 매정하고 잔인하게 변한 것이냐? 짐이 널 서운하게 했더냐?”

“제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야홍릉이 차갑게 물었다.

황제는 흠칫 놀랐다.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실 정도로 늙지는 않으셨지요. 그래서 제 어머니가 어떻게 궁에 끌려갔고 또 궁에서 얼마나 힘들게 사셨으며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도 아실 것입니다.”

야홍릉의 차가운 목소리가 황제의 가슴을 찔렀다.

“그런데도 저에게 잘해주셨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황제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바로 야홍릉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저한테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씌워 공주부의 사람들을 몰살했습니까? 제 휘하의 네 장군도 내버려 두지 않고요?”

황제는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너 지금 뭐라고 하는 것이냐?”

“부황께서는 당연히 기억하지 못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야홍릉은 황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했다.

“전 당분간 부황이 죽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부황께서 직접 이 강산이 누구의 것이 되는지, 부황의 아들이 어떻게 저한테 지배당하는지 똑똑히 지켜보셔야지요. 참, 그리고 제 어머니를 죽음으로 몬 태후마마는 늙어 죽을 때까지 살려둘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손 총관은 흰죽을 가져와서 옆에 서 있었다.

야홍릉은 손을 들어 지시를 내렸다.

손 총관은 허리를 굽힌 뒤, 침대 옆으로 다가와 황제에게 대접했다.

야홍릉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야, 야홍릉, 너, 거기…… 서!”

“폐하, 식사하십시오.”

손평은 평온하나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다시 기절하시게 되면 체력을 보충하실 수 없습니다.”

황제는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흐릿한 그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으나 전처럼 강한 제왕의 위엄이나 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야홍릉은 건양궁을 나간 뒤, 궁전들을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는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는 차가운 한기가 뿜어 나왔다.

야홍릉은 계단을 내려서 궁을 나서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뒤에서는 두 시위만 따를 뿐이었다. 널따란 청석판이 깔린 길은 조용하고 적막했다. 궁에는 가끔씩 멀리서 야홍릉을 보고 예를 올리는 궁인들만 있을 뿐, 분위기는 갑갑하고 우울했다.

“공주 전하.”

하얀색 장포를 입은 봉서오가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와 야홍릉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저도 궁에 있으니 심심한데 함께 공주부로 가도 되겠습니까?”

야홍릉은 그를 힐끗 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참 대단하시군요.”

“공주 전하, 황공합니다.”

봉서오는 싱긋 웃었다.

“고집스러운 상전을 만났으니 머리를 쓰지 않으면 조정에서 쫓겨날 게 아닙니까? 어디 먼 곳으로 유배될 수도 있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서오는 남들의 시선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야홍릉과 함께 길을 걸었다.

목국의 상황은 이미 정해졌고 대신들도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호국 공주에게 남성국이라는 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수록 그들은 호국 공주를 더 무서워할 것이다.

“동제의 섭정왕 영위가 이미 병사들을 이끌고 남제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봉서오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린 황제는 섭정왕이 없는 지금 대권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위가 남제를 이기고 돌아온다면 군공이 어마어마할 텐데 황제는 대권을 손에 넣어도 영위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야홍릉은 봉서오를 힐끗 돌아보았다.

야홍릉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봉서오는 그녀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봉서오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혹시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궁문을 나섰다.

“아니요. 하지만 영린과 영위는 싸우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죠.”

야홍릉이 말했다.

봉서오는 흠칫 놀랐다.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다고? 나와 연관된 일도 아닌데.’

궁을 나선 그들은 공주부로 되돌아왔다.

공주부에는 감진이 돌아와 있었다.

“공주 전하, 오셨습니까?”

감진은 화청에서 일어나며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저는 이번에 전하께 작별을 고하러 왔습니다.”

‘작별을 고해?’

야홍릉은 화청의 의자에 앉아 있는 헌원용수를 힐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감진에게 돌렸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동제에 다녀올 것입니다.”

감진은 눈을 내리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 줄곧 제 신분을 숨겨왔습니다. 공주 전하께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동제로 가서 가족들을 만날 생각이니 이삼 개월 뒤면 돌아올 것입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돌아온다고?”

“저는 그저 가보는 것이지 동제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습니다. 집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가족들만 보고 곧 돌아올 것입니다.”

감진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전 공주 전하의 측부이지 않습니까?”

봉서오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평온해 보이는 용수를 바라보았다.

진작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측부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그는 야홍릉이 사내로 태어날 운명이라는 것을 느꼈다.

‘공주가 사내였다면 우리 폐하는 단수의 사랑을 했을까? 아니지, 공주가 사내였다면 우리 폐하와 적수가 되었을 수도 있겠네. 적수로 만났어도 지금처럼 서로를 사랑했을까?’

봉서오는 혀를 차며 쓸데없이 풍부한 상상력을 멈췄다.

야홍릉은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동제에 남고 싶다면 널 풀어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언제 떠날 것이냐?”

“오늘 밤에 떠날 것입니다.”

용수는 느긋한 자세로 앉아 차를 든 채, 화청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모습은 그림 속에서 나온 듯, 깨끗하고 고결한 느낌을 풍겼다.

야홍릉은 감진과 두어 마디 한 뒤, 용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넌 할 말 없어?”

용수는 고개를 돌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감진은 전하의 측부이지 제 측부도 아닌데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 말에 화청은 정적에 잠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