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야홍릉을 점점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과 패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점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야홍릉은 여인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다른 쪽으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물론 남성국과 공주의 통혼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동안 대신들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황제가 정정하다면 그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지만 황제가 앓아누운 지금은 큰 문제였다.
누가 공주의 통혼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가 하는 문제였다.
대신들은 고민에 빠졌다.
“고민할 만하지요.”
용수는 야홍릉의 귓가에 속삭이며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애비, 먼저 그들을 안달 나게 할 것입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움직임을 받아주었다.
용수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에게 애정행각을 해왔다.
군자의 품위나 예법 같은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영린이 뭔가를 시작한 건가?”
용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야홍릉의 귀를 깨물었다.
“그는 동제의 일을 완벽하게 끝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껏 감진과 둘 사이의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듯하더군요.”
영린은 이월에 동제로 돌아갔다.
섭정왕에게서 권력을 되찾으려 애썼던 전생과 달리 이번 생의 그는 정무를 보는 데 아주 익숙했다.
강산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권력에 큰 욕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아니어도 나라를 다스릴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제국을 통일시키는 일만큼은 꼭 해야 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물었다.
“요즘 사는 게 너무 평온하지 않나?”
용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평온하다는 말씀입니까?”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기는 합니다. 애비가 대권을 움켜쥔 뒤로 조정에는 반항하는 사람도 없고 야모침도 순순히 말을 잘 듣고요. 변방의 전쟁도 끝났으니 평온하기만 하군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좀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할까요?”
용수가 설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낮에…….”
“임신한 것 같다.”
야홍릉을 끌어안으려던 용수의 손이 멈칫했다.
“애비, 뭐라고 하셨습니까?”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월경이 보름이나 늦어졌어.”
용수는 멍한 얼굴로 서 있다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저, 정려! 도 의원, 도 의원을 불러오너라!”
말을 마친 용수는 야홍릉을 조심스럽게 안아서 침전으로 옮겼다.
곧 도 의원이 정려를 따라 허겁지겁 뛰어왔다.
그는 야홍릉의 맥을 짚더니 말했다.
“공주 전하, 회임하셨습니다.”
야홍릉과 용수는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원님, 안태약(安胎藥, 태아를 안정시키는 약)을 지어야 하나요?”
정려는 둘이 말하지 않자 먼저 물었다.
도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맥을 보면 당분간 안태약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격렬한 운동을 삼가셔야 합니다. 무공을 연마하시면 당연히 아니 되고…… 초기 삼 개월은 태아의 상태가 가장 불안정하니, 흠흠, 그런 일……은 좀 참는 게 좋을 것입니다.”
용수는 도 의원을 힐끗 보았다.
도 의원은 용수와 야홍릉이 모두 기뻐하는 것 같지 않자 내심 의아했다.
그러나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전하, 무리하지 마시고 편히 쉬셔야 합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보아라.”
도 의원이 물러갔다.
정려도 따라서 나갔다. 도 의원은 그녀에게 조심해야 할 것들을 일일이 당부했다.
대전에는 야홍릉과 용수 둘밖에 남지 않았다.
“참 기가 막힌 시간대군요.”
용수는 침대 옆에 앉아 야홍릉의 배를 쓰다듬었다.
“새 생명이 여기서 싹을 틔우고 자라난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무슨 싹을 틔운다고? 아기가 나무인 줄 아느냐?”
야홍릉이 용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용수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저 제 흥분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흥분했다고? 전혀 그래 보이지 않은데?”
야홍릉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흥분한 상태입니다.”
용수는 강조하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이도 생겼는데 등극 대전도 슬슬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야홍릉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의 부친 되는 자가 명분이 없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용수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직 배가 나오기 전이니 미리 할 것을 다 해두는 것입니다. 대신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저는 목국에 데릴사위로 장가들 생각입니다. 황제가 될 애비의 남편으로요.”
야홍릉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애비가 싫으시다면 측부의 자리여도 됩니다. 그래도 전 아주 만족할 것입니다.”
용수는 야홍릉의 얼굴에 입을 맞춘 뒤, 유순하게 말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 정한 것이냐?”
남성국 황제의 존엄은 애들 장난이 아니었다.
“십 년 전에 이미 정했던 일입니다.”
야홍릉은 생각을 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된다.”
“왜 안됩니까?”
용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남성국은 여섯 개의 나라에서 가장 강한 나라다. 그 나라의 황제는 얼마나 고귀한 존재겠느냐? 그런데 네가 목국에 데릴사위로 들어온다면 그 위엄은 다 망가지고 말 것이다. 나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야.”
용수는 그녀의 말을 듣더니 야홍릉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애비가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저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데릴사위로 목국에 들어온다고 해서 남성국 황제의 위엄이 망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야홍릉의 귓가에 속삭였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그녀는 용수의 말이 황당하다고만 생각했다.
“안될 건 뭐가 있겠습니까?”
용수는 가볍게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애비, 세간의 규칙은 강자가 정하는 것입니다.”
강자의 말이 의심스럽다면 그 강자가 충분히 강하지 못한 경우밖에 없었다.
권력, 지위와 능력이 모두 강하다면 그의 말이 곧 힘이 되는 법이다.
이치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가 될 것이다.
“앞으로 며칠간 애비는 푹 쉬십시오. 지금까지 큰 일없이 평온했지만 애비는 매일같이 바쁘게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는 푹 쉬셔도 됩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헌원용수는 일 년간 야홍릉의 정인으로 살았지만 뼈 속 깊이 새겨진 제왕의 패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제 폭풍 같은 행동력으로 그는 결정한 일을 곧 완벽하게 해결할 것이다.
오월이 되자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더니 유월이 되자 무더운 여름으로 들어섰다.
유월 초, 남성국의 헌원창은 흑의 기예병과 함께 변방에 주둔하고 남성국의 젊은 승상을 선두로 한 사신들은 다시 목국에 방문했다.
금국의 땅 분할에 대해 함께 논의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남성국의 승상은 금국의 지도를 대전에서 편 뒤, 얇은 나뭇가지로 지도 위의 성곽을 가리키며 금국을 어떻게 분할할 건지 얘기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분명하고 똑똑한 발음이 더해지자 사람들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가 하는 날카로운 말은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했다. 두 나라의 이익에 연관된 일인 만큼 조금이라도 놓치거나 잘못 듣는 부분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야홍릉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다지 열심히 듣거나 집중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생각에 빠진 듯했다.
봉서오는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 왜 아직도 등극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뭐라고?’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대전은 정적에 잠겼다.
신하들은 고개를 돌리고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봉 공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승상은 미간을 찌푸렸다.
봉서오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오히려 의아한 눈빛으로 대신들을 돌아보았다.
“목국의 황제가 위중한 상태인 것 아닙니까?”
‘위중해?’
대신들은 안색이 변했다.
이제 막 남성국에서 온 사신이 어떻게 황제가 위중하다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
대신들은 문득 육 개월이 넘도록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실이 떠올랐다.
‘폐하께서 위중하긴 하시지.’
그러나 대신들은 황제가 정말로 위중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난번에 제가 목국에 왔을 때만 해도 폐하와 긴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폐하의 옥체는 좋지 못하셨지만 조정에 큰 소란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어 얘기를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
봉서오는 대신들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호국 공주야말로 나라의 기둥이자 목국의 영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황자들보다 호국 공주가 황위에 오르기를 바라셨지요. 그러나 대신들이 반대할까 걱정해 어떻게 입을 뗄지 고민하셨습니다.”
‘뭐라고?’
그의 말을 들은 대신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예전부터 편찮으셨는데도 줄곧 숨기고 계셨다고? 폐하께서 호국 공주를 황위에 앉히고 싶으셨다고? 그럴 리가? 폐하께서는 분명 대황자 야천란을 염두에 두고 계셨는데? 언제부터 호국 공주로 변한 거야? 남성국에서 온 사신의 말만 듣고 판단해도 될까?’
“황자도 좋고 공주도 나쁘지 않으나, 다만 백성들에게 평온한 삶을 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봉서오는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와 어조는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폐하도 같은 생각이셔서 공주 전하께 호부와 사부의 대권을 맡기신 것입니다. 조정에서 세력을 구축하는 것과 동시에 대신들더러 공주의 업무 처리 방식에 적응하라고 말이지요.”
그는 대신들의 이상한 표정을 보는 척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은 뒤,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위중한 상황이 나아지시면 곧 황위를 호국 공주에게 물려주실 것 같던데요. 목국의 황제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분이시고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시는 자애로운 분이시니까요. 그분은 자신의 병으로 목국에 내란이 일어날까 걱정하셨는데…… 그런데 공주 전하께서 여태까지 등극하시지 않았을 줄은 몰랐습니다.”
대전은 잠깐의 정적이 끝난 뒤,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신들은 귀를 맞대고 남성국 사신이 한 말이 사실일지를 논의했다.
봉서오는 해맑은 미소를 띤 채 펴두었던 금국의 지도를 접었다.
사실 그는 금국의 땅을 나누는 일로 온 것이 아니었다.
금국이 멸망한 일로 목국과 땅을 나누는 문제를 의논하긴 해야 했지만, 그 일이 이번 목국에 온 주목적은 아니었다.
남성국 황제가 목국에 데릴사위로 들어오겠다고 하는데 겨우 금국 땅에 신경 쓸 리 있겠는가?
금국을 모두 야홍릉에게 줘도 헌원용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폐하께서 옥체가 편찮으시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그런데 왜 저는 몰랐지요?”
승상은 미간을 찌푸렸다.
봉서오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건 목국의 황제 폐하께 물으셔야지요. 저는 그저 제가 아는 것만 얘기할 뿐입니다. 믿든 말든 제가 알 바는 아니지요.”
승상은 미간을 찌푸렸다.
“봉 공자, 그런데 왜 저희 대황자와 함께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대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