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조정을 장악하다
한경백은 어산서원의 제자들 모두가 인정하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러니 다들 한경백의 가입을 적극 찬성했다.
그가 야홍릉의 측부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한경백은 예전에 여인에게 빌붙는다고 무시당했으나, 뛰어난 학식을 선보이자 누구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삼월에 열린 춘위는 전례 없이 공정하게 진행됐다.
심한의는 작년 추위에 성적 조작으로 탈락했으나, 이번 춘위에 다시 참가하여 예상대로 최고 성적을 따냈다.
그다음은 바로 사월에 열리는 전시(殿試)였다.
야홍릉과 승상, 그리고 문연각(文淵閣)의 학자들이 함께 주최하였다.
심한의는 장원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의 수찬(修撰)이 되었다.
급제한 사람들 중 강정금이라는 젊은이도 있었는데, 말쑥하게 생긴 그는 상위 세 명에 들지 못했지만 야홍릉에게 발탁되어 호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소식은 곧 손평의 귀에 들어갔다.
춘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불안하던 손평은 드디어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건양궁 밖에 서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의 식은땀을 닦은 그는 오랫동안 문이 닫혀 있던 건양궁 내전으로 들어갔다.
관직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호부로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수많은 가능성을 말해주기 때문이었다.
호국 공주는 강정금이 승상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해도 죽을죄를 짓지만 않는다면 마흔이 되기 전에 시랑이 되는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래, 마흔이 되기 전에.
손평은 야심이 크게 없었다. 강정금이 벼슬길에서 평온하게 지낼 수 있고 강씨 가문도 지금의 낮은 출신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예순 살에 시랑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만족할 수 있었다.
새해를 맞이한 뒤로 조정의 업무는 평소와 다름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예민한 대신들은 야홍릉이 조정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눈치채기 시작했다.
그녀는 젊은 관리들을 심복으로 두고 조정의 핵심 자리에 그녀가 믿을 만한 관리를 꽂아 추위와 전시에서 좋은 성적을 따낸 학자들을 중용했다.
그렇게 조정은 점점 야홍릉이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이 든 대신들의 권력도 점차 분할되었다. 대신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야홍릉이 누구를 중용하고 누구를 강직시키든 모두 이유가 있고 증거가 확실했기에 반박할 핑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오월이 되었다.
변방에서 소식이 전해졌다.
육연지와 헌원창이 양쪽에서 금국을 공격하여 파죽지세로 금국의 각 성곽을 점령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사월 말 무렵, 금국의 황성에 쳐들어가 황궁을 포위하고 금국 황제와 황족 종친, 그리고 금국 대신들을 생포했다고 했다.
이렇게 금국과의 기나긴 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오랫동안 우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던 조정에 간만에 전해진 희소식이었다.
오월 중순, 육연지는 오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와서 복명을 마쳤다.
나머지 병사들은 금국에 머물러 있었다.
육연지가 팔 개월 만에 돌아와 보니 조정의 상황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음에도 그는 호국 공주가 조정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았다.
예를 올린 그는 전쟁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공손하게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좀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대전의 대신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면 육 개월 전에 아프다고 드러누운 황제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육연지는 황제의 상태를 처음으로 물은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부황을 뵈러 갔었어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을 뗐다.
그녀에게서는 특별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손 총관이 그러더군요. 좀 괜찮으실 때는 눈을 뜨고 말씀도 한두 마디 하시지만,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의식도 없다고요.”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상황은 호국 공주가 하는 말이 곧 법이었기에 의심이 가도 더 물을 수 없었다.
당장 황제가 정말 잘못된다면 목국이 앞으로 누구의 손에 들어가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누가 이 시기에 호국 공주의 심기를 건드리겠는가?
“신이 올릴 말씀이 있으나 선을 넘을 것 같아 염려됩니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은 깜짝 놀라며 육연지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다.
이런 시기에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육연지 밖에 없었다.
문관들은 무장의 용기를 흉내 낼 수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육연지가 다른 사람들이 감히 꺼내지 못한 말을 하겠거니 생각했다.
“신은 나라에 황제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육연지는 눈을 내리깔고 공손하나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심각한 병에 걸리셨다면 조정의 문무 대신들이 의견을 모아 얼른 능력이 강한 새로운 황제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대신들과 백성들은 편히 살 수 있고 조정의 분위기도 좋아질 것이 아닙니까?”
그 말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육연지가 이런 말을 꺼낼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연지가 황제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걱정하거나 태의를 요청해 황제에게 보낼 거라고 여겼다. 혹은, 황제가 누구를 태자로 생각하는지 궁금해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황제가 아직 붕어하지도 않았는데 새 황제를 세우자니?
‘그것도 우리들이 세워야 한다고? 우리들을 사지로 몰 생각인가?’
당장이야 야홍릉이 조정 대권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는 것과 조정 대신들이 추천하여 황제로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목국은 개국한 이래 공주가 황제로 등극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야홍릉이 스스로 원한다고 해도 그들은 반항하지 못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대신들도 체면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대신들이 뽑는 거라고 한다면…….
대신들은 육연지가 일부러 이 시기에 이런 질문을 하여 야홍릉이 대답하도록 강요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아니면 우리를 압박하여 야홍릉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인가?’
만약 육연지가 야홍릉이 황제가 되는 것을 지지하는 입장이라면 일부러 이 말을 꺼낸 게 맞을 것이다.
‘설마 이번 기회에 우리의 입장을 알아보려는 건가?’
만약 육연지가 야홍릉이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이 질문은 야홍릉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고 말하게 만드는 수일 지도 몰랐다.
대신들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호국 공주가 정말 이 기회에 등극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대해야 하나? 아니면 지지해야 하나?’
대전은 정적에 잠겼다.
이때,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부황께서 아직 정정하신데 당장 새 황제에 대해 논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 같네요.”
그녀는 평온하게 육연지의 제안을 단칼에 끊어냈다.
그녀는 화를 내지도, 대신들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대신들은 더욱 그녀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런 기분은 아주 미묘했고 복잡했다. 누군가 지금의 답답한 상황을 끝내주기를 바라지만 한편 그날이 오는 게 두렵기도 했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육연지는 바로 화제를 전쟁에 돌렸다.
“금국을 멸망시킨 뒤, 신과 남성국의 헌원창 장군은 금국의 땅을 목국과 남성국이 반씩 나누어 가지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판수(汴水)를 경계로 판수의 남쪽에 있는 열세 개의 성은 남성국이 가지고 북쪽 땅은 목국이 소유하기로 말입니다. 이 일은 전하와 남성국 황제가 함께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금국과의 전쟁과 땅을 떠올리자 대신들은 기분이 또 달라졌다.
어깨가 올라가고 의기양양해지는 기분이었다.
변방은 오랫동안 금국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이번에 제대로 설욕한 셈이었다. 화해하라고 부추기던 신하들은 민망하여 입을 열지 못했고 계속해서 전쟁하라고 하던 젊은 관리들은 아주 기뻐했다.
금국의 땅을 나누는 데에서도 남성국이 절반만 가지겠다고 한 것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금국을 멸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남성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성국의 새 황제가 통혼하려고 했던 것을 떠올리자 사람들의 기분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야홍릉이 정말로 남성국 황제와 혼례를 올린다면, 호국 공주가 황제로 등극할 수 없지 않겠는가?
자칫 나라 전체가 남성국에 시집가는 게 되지 않은가?
대신들도 그동안 불안한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힘들었다. 일부 일에는 이미 적응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상황에 대해서 명확한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했다.
그러나 정할 입장이 있는가?
호국 공주가 제위에 오르는 일을 그들이 어찌 선뜻 허락할 수 있겠는가.
젊은 관리들은 그나마 반응이 나쁘지 않았지만 나이 든 종친이나 대신들은 공주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남존여비의 사회 분위기상 누가 여인에게 굴복하려 하겠는가?
누가 여인이 말할 권리를 가지는 사회에 만족하겠는가?
호국 공주가 대권을 움켜쥐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공주가 제위에 오른다면 여인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오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야홍릉이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공주가 황제가 되었다는 것 자체로 사회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은 누구도 막지 못할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렇다고 반대할 수 있겠는가?
호국 공주가 처음부터 황위를 원한다고 말했다면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막았을 것이다. 심지어 목숨도 아끼지 않고 걸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야홍릉은 조정의 정무를 황제가 있을 때보다 깔끔하게 다스렸다.
최근 몇 달간 조정의 분위기는 전과 많이도 달라졌다.
대신들은 야홍릉의 일처리 방식을 옆에서 지켜보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어떤 수도 먹히지 않는 매정한 사람이었다.
3황자가 죽고 한씨 가문이 멸망했고, 4황자도 천뢰에 들어간 것을 다들 보아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누가 감히 다른 짓을 하겠는가?
누가 감히 뇌물을 받고 사욕을 채우겠는가?
야홍릉은 관리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몇 달간 대신들은 열심이 정무를 보는데 익숙해져 기루에 가는 사람들도 많이 줄어들었다. 편을 먹어 4황자를 도우려고 하거나 2황자와 함께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은 더욱 없었다.
그럴 생각이 없다기보다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금국이 멸망하였고 육연지의 대군이 돌아오자 남성국 황제와 야홍릉의 통혼에 관한 일로도 대신들은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야홍릉의 지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야홍릉이 섭정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가 가지고 있는 권력도 점점 더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 연말에도 조정을 휘어잡을 수 있는 권력자였다.
육 개월 가까이 지난 지금 그녀의 지위와 권력은 점점 더 단단해져서 누구도 흔들 수 없었다.
야홍릉은 황위에 등극하지 않았을 뿐, 황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가 조정에서 내린 결정은 다른 사람들도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독단적으로 보이지만 또 아주 합리적이기도 해서 승상도 반대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