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어떤 태도를 취할까
이 말에 야자릉은 눈시울이 대뜸 빨개지더니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궁에 감금 당한 동안 당했던 서러움이 한순간에 폭발한 듯했다.
그녀는 구슬프게 울면서 말했다.
“오라버니도…… 어마마마도…… 다 돌아가셨어요. 전, 전…….”
야모침은 야자릉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고 예전에는 입장차이 때문에 그녀를 멀리했지만 지금은 동병상련인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일어나서 야자릉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동안 힘들었지? 그래, 울어. 울면 좀 편해질 것이다.”
야자릉은 고개를 숙이고 빨개진 눈시울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무기력했으나 증오가 담겨 있었다.
“야홍릉이 미워 죽겠어요.”
야모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째 오라버니, 전 지금 태후마마의 곁에 있어요.”
야자릉은 눈물을 닦고 말을 이었다.
“태후마마께서 비밀을 말씀해 주셨는데 오라버니에게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비밀?’
야모침은 흠칫 놀랐다.
“무슨 비밀말이냐?”
“야홍릉의 출신에 관한 거예요.”
야자릉은 이를 악물고 음산한 얼굴로 말했다.
“야홍릉은 황족의 핏줄이 아니에요. 부황의 친딸이 아니라고요.”
‘뭐라고?’
야모침은 깜짝 놀랐다. 그는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야홍릉이 부황의 딸이 아니야? 야씨 황족의 핏줄이 아니라고?’
“그, 그럴 리가?”
야자릉은 또 눈에 눈물을 담고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데 거짓이겠어요?”
야모침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방금만 해도 야홍릉과 계속해서 대항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걸고 한 번 붙어봐? 그랬다가는 지면 셋째나 넷째 꼴 나겠지. 아니면 그저 납작 엎드려서 제 명까지 살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태후에게서 소식이 올 줄이야.
야모침은 말없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태후마마께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
야자릉은 머뭇거렸다.
“그, 그게…… 태후마마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데 증거가 필요해요?”
야모침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면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건데…… 태후마마가 직접 말한 거라고? 그러나 지금 궁이나 궁 밖이나 모두 야홍릉이 통제하고 있는데 증거도 없이 태후의 말만으로 누가 믿어줄까?’
야모침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상황에 그는 함부로 모험할 수 없었다.
“알겠다. 내가 좀 생각을 해볼게. 궁의 비빈 마마들은 잘 계시냐?”
야모침이 물었다.
그러자 야자릉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비빈 마마들은 각자의 궁에 갇혀 지내세요. 태후마마께 문안 인사를 올릴 자유도 없다니까요. 부황께서 병으로 앓아누우셨으니 후궁 비빈들은 돌아가며 병시중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죠. 그런데 누구도 부황을 뵐 수 없어요. 건양궁 안팎 모두 병사들이 지키고 있고 후궁에도 금위군이 순찰해서 밖으로 나올 수 없어요.”
야자릉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야홍릉의 이런 행위가 반역과 다를 게 뭐예요?”
다를 게 없었다.
만약 황제가 깨어 있었다면 야홍릉을 역모죄로 다스릴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지금 상황을 다른 사람이 알 리 없으니까 누구도 야홍릉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야모침은 마음이 지치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 전 여기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어요.”
야자릉은 눈물을 훔쳤다.
“야홍릉이 먹어서는 안 될 야심을 먹었으니 오라버니도 절대 이렇게 봐주면 안 돼요…… 태후마마도 말씀하셨어요. 야씨 황족은 여인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고요. 오라버니가 대신들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태후마마도 힘이 되어줄 거라고 하셨어요…….”
야모침은 태후의 지금 상황을 알고 있기에 그녀의 조력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래, 알았다. 생각을 좀 해볼 테니 먼저 돌아가거라. 오늘 새해 첫날이지 않더냐? 너와 태후마마 모두 마음 편히 보냈으면 좋겠구나.”
야자릉은 확답을 듣지 못하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자릉아, 얼른 돌아가.”
야모침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 할지 알겠으니 더는 말하지 말아라.”
야자릉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그녀는 너무나 많은 충격을 받았다. 예전의 고귀한 적공주란 위치에서 오라버니를 잃고 어머니를 잃더니 지금은 부황도 뵐 수 없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고아가 된 것이다.
감금 당한 동안 힘든 나날을 보낸 그녀는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도도하기는커녕 당황하고 불안한 마음에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야홍릉에 대한 증오가 옆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깊었다.
그러나 야모침은 그녀의 변화 때문에 이성을 잃지 않았다.
야자릉은 입술을 꼭 깨문 채, 선왕부를 떠났다.
야자릉이 저택을 떠나자마자 누군가 이 소식을 야홍릉에게 전했다.
“8공주가 시녀 분장을 하고 몰래 선왕부로 갔습니다. 선왕부에서 나온 뒤, 경왕부로 가서 경왕비의 마차를 따라 궁에 들어갔습니다.”
경왕비는 태후와 같은 연배였다. 그래서 새해 첫날 태후를 찾아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시녀로 분장한 야자릉은 경왕비의 도움을 받아 궁으로 들어갔다.
“마음대로 하라 하거라.”
야홍릉은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암위가 물러났다.
야홍릉은 내전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걔가 선왕부에 들어간 목적을 알 것 같아.”
“애비, 현명하십니다.”
용수는 야홍릉을 침대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것보다 야모침이 끝까지 발악할지 더 궁금합니다.”
그믐날이든 새해 첫날이든,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다.
새해 휴가는 일반적으로 초엿새에서 초여드레까지 쉬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동안 대신들은 집에서 처자식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야홍릉도 공주부에서 용수와 사랑을 나누며 한적하게 보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나날이었다. 제경에는 얼마 전까지 떠들썩하던 소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무엇이 소문을 잠재웠는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긴장한 마음으로 준비를 했다.
* * *
정월 초여드레의 조례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일은 정왕 장인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야홍릉이 기주로 파견했던 두 장군이 돌아오면서 기주의 포정사와 관리들도 함께 잡아 왔다.
물론 증거로 장부책과 서신도 가득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은을 담은 상자들과 병기, 갑옷을 담은 마차도 밖에 세워져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누가 발뺌할 수 있겠는가?
“너무 많아 마차에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전하와 대인들께 보여드리려고 그저 일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대신들은 대전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장군과 그들 뒤에 있는 정왕의 장인 계한우와 관리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패배자는 할 말이 없는 법이다.
정왕의 행위는 율법을 어겼다고 하지만 야홍릉도 마찬가지 아닌가?
대신들은 모두 호국 공주의 야심을 알고 있었다. 그녀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하는 것은 섭정권을 이용해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섭정 대권은 황제가 직접 위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손 총관이 직접 전한 말인 것은 분명했다.
대신들은 황제의 뜻을 알 수 없으니 지시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야홍릉이 가지고 있는 호부와 사부의 권력과 병권은 모두 황제가 깨어 있을 때, 직접 야홍릉에게 준 것이었다. 이는 조정 대신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섭정권이 없어도 이런 상황에서 야홍릉에게 반기를 들만한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그녀에게는 섭정권까지 있지 않은가? 그런데 누가 감히 그녀와 맞서 싸우겠는가?
정왕과 그의 장인은 율법을 어겼기에 야홍릉이 그들을 잡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사심으로 이러는 것인지는 둘째치더라도 지금 그녀가 하는 행동 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야홍릉은 그들이 죄를 지은 증거를 찾아냈고 법대로 그들을 천뢰에 넣었을 뿐이었다.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야홍릉도 황제가 깨어난 뒤에 다시 보자고 얘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황제가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두 천뢰에 넣어라.”
짧은 한마디였지만 역모를 꾀한 자들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승상도 할 말이 없었다.
정왕은 완벽하게 무너진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야모침을 바라보았다. 남성국에 가서 여태껏 돌아오지 않는 야천란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은 야홍릉의 다음 목표가 야모침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야모침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흘러도 야홍릉은 야모침을 어찌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매일 같은 시각에 조례에 참석하고 평온하게 조정 대사를 논할 뿐, 신하들에게 겁을 주거나 다른 일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렇게 평화롭게 일월이 지났다.
대신들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호국 공주가 이 기세를 몰아붙여 황위를 따낼 줄 알았는데?
너무 몰아붙이면 대신들의 반발을 살까 두려운 건가?’
물론 야홍릉이 대신들을 두려워할 리 없었다.
야홍릉은 조정에서 옴니암니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전쟁터에서 병사를 거느리고 싸움하는 데는 능했다. 그녀는 마음을 공략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도둑은 뒤쫓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금 야모침은 궁지에 몰린 도둑이었다. 야모침이 속으로 포기할까, 아니면 최후의 발악을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야홍릉도 묵묵히 야모침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피를 묻히는 게 싫었다.
경쟁자를 모두 제거한다고 해서 꼭 이기는 게 아니었다. 야모침을 조정에 남겨두는 게 오히려 그의 편인 관리들에게 경고도 되고 더 좋았다.
적들이 그녀의 속을 몰라야 더욱 조심스럽게 지낼 게 아니겠는가?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면에서 야홍릉은 이미 황제 못지않았다.
대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야홍릉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매일 조례에 참석하고 승상과 정무에 대해 의논할 뿐이었다. 그리고 조례가 끝난 뒤, 호부와 사부에 가서 살펴보고 가끔 군영에 가서 현갑군의 훈련 상황을 보는 게 다였다.
일월 동안 야홍릉은 두 명의 젊은 관리를 사부에 영입했고 병부에서 한 명을 빼내 호부 시랑으로 임명했으며 군영의 장군 중 한 명을 병부에 상서로 보냈다.
원래의 병부 상서 한 대인은 바로 내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 * *
이월부터 조정은 춘위(春闈, 봄에 열리는 과거시험) 준비로 바빴다.
춘위는 삼월에 열리는데 이월부터 감독관의 후보를 야홍릉과 승상이 직접 정했다.
야홍릉은 고민을 해본 뒤, 승상과 함께 의논하여 네 명의 감독관을 발탁했다.
조정에서 유명한 신하 세 명이 뽑혔다.
마지막 한자리는 한경백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