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궐황도 (267)화 (268/301)

16676990495207.jpg 

267화 포기해야 할까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초 각로의 손녀 초하도 왔고 매씨 가문의 사람도 왔더구나. 그리고 친왕들도 손녀나 며느리를 보냈더군. 다들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같아.”

“다들 목숨이 아까울 것입니다. 예전의 입장이 어쨌든, 다들 이익을 좇은 게 아니겠습니까?”

용수는 평온한 말투로 날카롭게 지지했다.

“가문의 부귀영화는 사람들의 입지를 쉽게 바꿀 수 있지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은 그렇다고 해도 후손이 위험에 처하는 것은 다들 바라지 않지요.”

황제가 바뀌면서 신하들도 물을 싹 갈게 될 것이다.

벼슬자리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은 귀족과 관리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권력 다툼에 사용했겠는데 어찌 지금 상황을 눈치 못 챌 리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의 죽음과 가문의 멸망을 볼수록, 제왕의 무정함을 느낄수록 눈치가 더 빨라지고 상황 판단이 정확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일찌감치 안전한 선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용수는 옅게 웃으며 제왕의 위엄을 드러냈다.

“그들이 순순하게 나온다면 애비도 피를 덜 묻힐 수 있을 게 아닙니까? 덕을 쌓는다 치자고요.”

야홍릉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구나.”

용수는 멍하니 있다가 미안한 얼굴로 목을 가다듬었다.

“어젯밤에 잘 쉬지 못했으니…… 애비, 지금 좀 주무시겠습니까?”

“교자를 아직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정려가 들어오며 예를 올렸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니 교자를 드셔야지요. 주방 어멈들은 날이 밝기 전부터 교자를 쌌습니다. 맛도 여러 가지에요. 야채속도 있고 새우살도 있고 배추 돼지고기, 소고기 속도…….”

“잠깐.”

용수는 손을 들고 야홍릉을 돌아보았다.

“애비는 어떤 맛을 좋아하십니까?”

“다 조금씩 맛보면 되지.”

야홍릉은 또 말을 덧붙였다.

“오늘 점심과 저녁에 저택 사람들에게 음식을 추가하거라. 그리고 새해 용돈도 나누어 주고. 다들 오늘만큼은 편히 즐기도록. 정려, 너는 고 집사와 함께 창고로 가서 돈을 가져가거라. 사람들에게 두 달 치 녹봉을 주면 된다.”

정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들 좋아 죽을 거예요.”

용수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주 전하, 참으로 화통하십니다.”

“이걸 두고 인심을 매수한다고 말하는 거다. 너도 좀 배워두렴.”

야홍릉은 용수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용수는 씩 웃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야홍릉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공주가 새해 용돈을 나누어 준다는 말에 저택의 분위기는 더욱 후끈 달아올랐다.

야홍릉은 대전 밖으로 걸어가 계단 위에 섰다.

평소와 달리 온화한 표정이었다.

“영영.”

“네, 전하.”

영영이 휙 하고 날아와 무릎을 꿇었다.

“저택에서 당직을 서는 영위들도 하루쯤 휴가를 가지도록. 반은 오늘 쉬고 반은 내일 쉬거라. 저택에 나가 돌아다녀도 되고. 너희들도 두 달 치 녹봉을 받아 가거라. 더 원하는 게 있다면 얘기해도 된다.”

야홍릉이 말했다.

그믐날과 새해 첫날은 떠들썩해야 했다.

호국 공주부는 평소보다 떠들썩했으나 선왕부는 다른 분위기였다.

야모침은 새해를 맞이할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전하.”

선왕부의 서재에서 중년 심복이 입을 열었다.

“호국 공주의 기세가 너무 강해 우리는 당분간 몸을 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야모침은 의자에 기댄 채,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반전이 일어날 가망은 있느냐?”

녹색 비단 장포를 입은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대답했다.

“오늘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으나 그래도 전하께 말씀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야모침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냐?”

“고우안이 전해온 소식인데 사공신이 사고를 쳐서 성주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제경과 기천은 멀리 떨어져 있어 무슨 일이 생겨도 저희가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이 제경에 전해졌을 때, 기천 쪽 상황은 이미 정해진 뒤였습니다…… 사공신은 이용 가치를 잃었고 지금 기천 쪽의 세력은 무너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야모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짙은 피로감만 몰려왔다.

세상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며 말했다.

“내가 이대로 태자 자리를 포기한다면 야홍릉이 날 제 명까지 살도록 내버려 둘까?”

서재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지라 당황한 얼굴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중년 심복이 말했다.

“호국 공주의 성격을 저희도 알고 있는데…… 호국 공주가 왜 갑자기 황위를 노리는지 알 수 없지만 능력과 수완은 저희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분은 성미가 차가우니 전하께서 정말 포기하시려고 한다면 성의를 보여주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7공주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무릎을 꿇는 사람을 죽일 것 같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으라고?’

야모침은 눈을 질끈 감고 고민에 잠겼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를 지지하던 심복들은 더 이상 그가 태자 자리를 두고 다투지 않았으면 했다. 게다가 3황자와 4황자가 어떤 꼴이 났는지 다 알고 있었기에 그 마음은 더욱 강했다.

야모침은 출신으로 따지만 야소숙보다 못했고 계략이나 머리로 따지만 야정연보다 못했다.

가장 강력하던 후보 두 명이 모두 야홍릉의 손에 당한 것이다.

야모침이 계속 태자 자리를 노려도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았다.

그러다 실패라도 한다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럴 경우, 그를 지지하던 심복들도 줄줄이 엮일 것이다.

물론, 부하인 그들은 상전인 야모침이 뭐라고 하기 전까지 포기하라고 부추길 수 없었다. 이건 야정연 스스로의 체면이 걸린 문제였다.

그가 먼저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해야 심복들도 뭐라고 할 수 있었다.

야모침은 손을 저었다.

“혼자 있고 싶구나. 다 나가 보아라.”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야모침은 홀로 의자에 앉은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은 초점 없이 멍하기만 했다.

야홍릉.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그는 목국의 상황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부황은 아들을 적지 않게 두었고 황자들도 세력이 작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공주가 대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스운 얘기인 듯하지만 야모침은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일 년 전, 야홍릉은 전쟁터에서 항상 승리를 따내는 호국 공주였다.

조정 문무 대신과 황자들은 모두 그녀를 자신의 무리로 영입하고 싶었다.

강한 실력과 십만 명의 현갑군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지지를 얻는다면 황위는 떼어 놓은 당상일 것이다.

다들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옥금에 대한 야홍릉의 마음 때문에 그녀는 야소숙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도울 리 없었다. 심지어 대신들은 야소숙이 태자가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야홍릉과 한옥금이 하룻밤 사이에 원수로 돌아설 줄이야?

한씨 가문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야모침과 야정연에게는 가뭄의 단비처럼 좋은 소식이었다.

그들은 넝쿨째로 굴러온 호박에 손을 뻗기 바빴다.

그러나……

목국의 황제부터 황자, 대신, 백성들까지 누가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공주인 야홍릉이 진작부터 큰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진작 알았다면……

진작 알았다면 그들은 절대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눈치챘을 때는 너무 늦었다.

야모침은 냉소를 하였다.

자신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부황과 목국의 대신들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다들 멍청이야. 바보 멍청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인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하다니.’

한씨 가문이 무너지고 장양후가 살해되더니 이윽고 야소숙과 한씨 가문이 동시에 죽었다. 그리고 지금은 야정연도 천뢰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이 얼마나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것인가?

그믐날인 어젯밤에도 야홍릉은 대신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해가 바뀌기 전날 밤, 직접 친 오라비를 천뢰에 보낸 것이다.

야모침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야홍릉을 무슨 수로 맞설 수 있을까?’

병권은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지만 그에게는 없었다.

야홍릉이 목국 최고 정예 부대인 현갑군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무슨 수로 야홍릉과 맞선다는 말인가?

심지어 금위군 통령도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궁 전체의 수비가 모두 그녀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었다.

조정 대권도 그랬다.

야홍릉은 혼자서 사부와 호부를 책임지고 있었고 병부 상서도 그녀의 사람인 듯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섭정 대권까지 움켜쥐었고 조정의 신입 관리들도 모두 그녀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품급은 낮으나 실권을 가진 직위에 있었다.

오래된 신하들도 그녀에게 반항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승상은 아직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야홍릉과 함께 섭정 대권을 가지고 있으나 조정에서의 위엄은 물론 박력도 야홍릉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어산서원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매씨 가문의 도움으로 어산서원은 야모침의 세력 중 일부분이었다.

그러나 한경백이 어산서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젊은 학생들과 편을 먹었다.

어산서원은 학생들은 모두 제경 관리와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은 아버지나 집안 어르신의 결정에 얼마간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들이 나중에 벼슬길에 들어선다면 조정의 새로운 힘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한경백을 따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무슨 수로 야홍릉과 대항하지? 내세울 게 하나도 없네.

이렇게 포기해? 이렇게 다 포기할까?’

그러나 야모침은 그러기 싫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전하!”

이때,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8공주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자릉이?’

야모침은 흠칫 놀랐다.

“들여보내거라.”

문이 열리며 시녀 옷차림을 한 야자릉이 들어왔다. 곧 집사는 문을 닫았다.

야모침은 못 본 사이 많이 마른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궁의 수비가 엄격할 텐데 어떻게 나왔느냐?”

“오늘 새해 첫날이잖아요? 고명 부인 몇 명이 태후마마께 문안 인사를 하러 가는 틈을 타 시녀 차림을 하고 따라 나왔죠.”

야자릉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도하던 예전과 달리 핼쑥한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궁 문을 지키던 사람들도 오랫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데다 시녀 옷에 시녀 머리를 한 야자릉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고명 부인의 뒤를 따라 나온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야모침도 그걸 캐묻지 않았다.

“잘 지냈느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