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이제 곧 때가 되는 구나
대다수 손님은 서로 축하 인사를 주고받으며 한담을 나누었다.
다들 암묵적으로 조정의 얘기나 입장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늘 많은 사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공주부에 몰려온 것 자체가 입장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야홍릉의 권력과 지위는 누구도 흔들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언제 정식으로 등극하실 것입니까?”
야홍릉은 홍릉원에서 여자 손님들을 맞이하고 한경백과 고 집사는 전청에서 남자 손님들을 접대했다.
용수는 할 일이 없어 공주부를 순찰한 뒤, 사청의를 불러 정원 뒤편을 거닐었다.
새해 첫날이라 곳곳에서 명절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라 정원의 꽃들은 이미 다 졌다. 오직 매화만 활짝 피어 있었다.
용수는 암홍색 장포에 허리선을 강조하는 허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걸으며 사청의의 질문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급하지 않아.”
사청의는 청색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보다 더 싸늘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용수의 대답을 들은 그는 놀라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공주부의 정원은 아주 컸다.
담장으로 나누어진 정원에는 각각 다른 꽃이 심겨 있었다.
사시장철 이곳에서는 계절에 걸맞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용수는 간만의 여유를 즐겼지만 사청의는 꽃구경할 기분이 없는 듯했다.
“나라는 황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
오솔길을 지날 때, 사청의는 결국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남성국을 떠나신 지 꽤 되었습니다. 십 년 전에는 큰 계획을 꾸미기 위해서라고 둘러댈 수 있었으나 지금은 단순히 사랑 때문에 떠나신 게 아닙니까? 시간이 길어지면 대신들도 불만을 품을 것입니다.”
사실 오래 떠나 있는 게 문제인 것이 아니라 용수가 황위에 있은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게 문제였다. 아직 대신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 못했는데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면 어찌한다는 말인가?
그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제사전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해도 황자들은 몰래 편을 먹고 손을 잡아 황권을 분할하려고 하겠지요…….”
“승상은 봉서오고 병권은 9황숙이 맡고 있으며 제사전에는 묵백이 있지 않느냐?”
용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셋이 동시에 짐을 배신하지 않는 한, 짐의 황권은 무사할 것이다.”
사청의는 침묵했다.
“그리고 강호의 세력과 전쟁용 말을 움켜쥐고 있는 너도 있지 않느냐?”
용수는 그를 힐끗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사청의는 입을 꾹 닫았다.
“그러나 그래도…….”
“여러 번 말하지 않았느냐?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왜 기억을 못 하는 것이냐?”
그에게는 제왕의 위엄이 풍겼다.
사청의는 무릎을 꿇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용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돌아서서 말했다.
“서릉을 떠난 지도 십 년이 되었구나. 금국의 전쟁이 끝나면 서릉으로 보낼 테니 복수를 하거라.”
“감사합니다.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하지만 종묘사직은 애들 장난이 아니니 폐하께서 이성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폐하의 능력은 의심할 바가 못 되나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망치면 안 되지요. 호국 공주에 대한 폐하의 마음이 너무 깊습니다. 폐하께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저를 벌하신다면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그러자 정원은 정적에 잠겼다.
“무슨 벌을 받는다는 말이냐?”
용수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 하지만 홍릉이는…….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나만의 사정이지 다른 사람이 꾸민 일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이용해 목적에 이루려는 사람도 없어.”
사청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청의, 난 세상은 없어도 되지만 애비는 없으면 안 된다.”
용수는 고개를 들고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녀의 야심이 더 크다면 짐은 얼마든지 세상을 정복해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게 만들겠어. 짐도 포함해서 말이야.”
사청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애비는 야심이 크지 않아. 그래서 짐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러나 이것도 나쁘지 않아. 그럼 우리는 사랑을 나눌 시간이 더 많아지니까. 전쟁 같은 것을 멀리하고 편하고 조용하게 사는 거지.”
용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청의는 말없이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여기에 남도 없으니 하고 싶었던 말을 더 할 수 있겠군.”
용수는 벽에 기댄 채, 매화 한 송이를 꺾었다.
“짐도 큰 포부를 품은 적이 있었단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정말 그 포부를 사라지게 만들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지 못해서거나 강렬한 충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강렬한 충격?’
사청의는 의아했다.
“야홍릉이 목국의 황위에 앉아 신하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황제가 된다면 짐도 남성국으로 돌아가 정무를 볼 것이다. 최선을 다해 현명한 황제가 되어 남성국과 목국의 백성들에게 전례 없는 호황을 만들어 줄 것이다.”
용수의 말투는 평온하고 담담했으나 굳은 결심이 담겨 있었다.
“만약 애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목국과 남성국 모두에게 재앙이겠지.”
용수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것이 바로 짐의 태도다.”
황제가 사랑을 대하는 태도는 일반인들과 달랐다.
쉽게 말해서 야홍릉이 무사하다면 다들 무사한 것이고 야홍릉이 불행하면 천하가 불행할 거라는 말이었다.
사청의는 그의 뜻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침묵을 지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호국 공주와 나중에 어떻게 혼인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누가 누구를 맞이한다는 말입니까? 공주가 등극하면 여 황제이고 폐하는 남성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떨어져 지낼 것이 아닙니까? 더 좋은 해결 방법이 있습니까?”
그것이 문제였다.
남자가 여인을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야홍릉이 황제가 되면 평범한 여인처럼 시집갈 수 없었다.
게다가 남성국과 목국은 멀리 떨어져 있어 오가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둘 다 황제일 테니, 황위를 오랜 시간 비워둘 수 없었다.
그러나 혼인하고 부부가 된 이상, 오랫동안 만나지 않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용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방법은 생각해 보면 되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야홍릉이 황위에 오르게 하는 거야. 나머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당분간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사청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이런 질문을 할 생각이 없었다.
용수는 계속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심한의를 만나 보았느냐?”
“네, 만났습니다.”
사청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더냐?”
사청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저는 제 출신을 알아보거나 가족을 찾을 생각이 없습니다. 심한의가 저와 연관된 사람이라도 좋고,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건 그도 같은 생각이고요.”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청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출신에 대해 알아보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씨 가문에서 자란 그는 사씨 가문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겼다. 그리고 사씨 가문의 멸망도 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청의는 황후가 버린 자식이 아니었다면 사씨 가문도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씨 가문의 사건은 그의 마음속에 박힌 비수가 되고 말았다.
복수를 하기 전까지 그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니 나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복수는 지금부터 네가 계획하거라. 어떻게 복수할 생각이냐? 병사를 이용하든지 강호 세력을 이용하든지 네 마음대로 하거라.”
사청의는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제가 서릉의 황조를 뒤엎을 수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십 할이다.”
용수는 망설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서릉은 흑의 기예병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그건 일도 아니지.”
사청의는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서 말입니다.”
“너 혼자서?”
용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완성된 병사들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군대를 만들 거라는 말이냐?”
사청의는 말끝을 흐렸다.
“저는 그저…….”
“네가 필요하다면 병사들을 빌려줄 것이다. 너 때문만은 아니지. 난 처음부터 서릉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용수는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전생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용수는 화가 치밀었다. 서릉의 황제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지만 그런 계획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용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누구도 감히 야홍릉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게 그저 생각에 그친 것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었다.
“명절이 지나면 계획을 슬슬 행동에 옮겨야 할 것이다.”
용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복숭아꽃이 피는 삼월이 등극하기 딱 좋은 시기지.”
사청의는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 * *
홍릉원으로 돌아가니 여인들은 인사를 마치고 돌아간 뒤였다.
정란과 정려는 시녀들을 데리고 대전에서 탁자와 의자를 치우고 있었고 야홍릉은 창가에 서 있었다.
“애비,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용수는 걸어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 시녀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그였다.
야홍릉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어디에 갔던 것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청의와 함께 정원에서 좀 걸었습니다.”
용수가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야홍릉은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너처럼 고집스러운 황제를 만났으니 부하도 고생이 많겠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지요. 제가 무슨 고집을 부렸다는 말입니까? 저는 하늘에 부끄러운 짓을 하거나 애비에게 미안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늘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다고요…”
야홍릉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용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씩 웃으며 야홍릉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인정했다.
“제가 제왕으로서 좀 자격 미달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인생 대사를 결정하고 나라를 다스려야지요. 혼인한 다음에는 최선을 다해 나라를 다스릴 것입니다.”
야홍릉은 그의 화려한 언변을 당해낼 수 없었다. 또 사람이 변한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차갑고 과묵한 헌원용수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용수는 애교덩어리에 말 잘하는 수다쟁이였다.
“오늘 명절 인사를 하러 찾아온 사람들 중에서 뭔가 알아낸 게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