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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62)화 (26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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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화 후회가 남아 있다

전생에 용수는 말을 타고 목국으로 쳐들어와 야씨 황족을 멸문시켰다.

그는 목국에서 혼인식을 올리는 한옥금과 야자릉을 능지처참해 죽이기도 했다.

이런 수단과 용기는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용수는 웃기만 할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전생에 여섯 나라를 정복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는데 목국은 당연히 그에게 쉬운 상대였다.

그러나 전생에 그는 수년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이번 생에는 그 시간을 목국의 신은전에서 허비했다. 비록 그 십 년 동안에도 그는 최고 등급의 어영위가 되었으나 전생처럼 천하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그는 예전의 야심을 잊고 말았다.

“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애비가 등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용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다른 것은 애비가 목적을 이룬 뒤에 다시 얘기하시죠.”

야홍릉은 말을 하지 않았다.

둘은 궁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과 마주친 궁녀와 내관, 시위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다들 전보다 더 공손한 자세로 예를 올리며 불안한 눈빛으로 둘의 눈치를 살폈다.

조정의 상황이 어떤지 이들의 태도를 보아서라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제가 선왕이라면 지금은 공주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지, 다른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왕은 큰일로 따지면 야정연보다 못하지요. 계획을 세우거나 생각하는 깊이 모두 야정연보다 못합니다. 그가 계속해서 지금처럼 애비에게 적대적으로 군다면 곧 죽게 될 것입니다.”

야홍릉은 여전히 침묵했다.

야모침이 생각 없고 단순하기에 그녀는 그를 급히 제거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가장 위험한 야소숙과 생각이 깊은 정왕을 먼저 제거했다.

야모침은 멍청하나 지금까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없었다.

야정연과 야소숙은 약점을 남긴 것이 큰 실수였다. 그들이 먼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으니 들킨 후의 결과 역시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황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그들은 남들이 누릴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반드시 그에 걸맞는 위험도 감당해야 했다. 이건 당연한 이치였다.

이번 그믐날 밤은 참으로 소름끼치는 밤이었다.

공주부로 돌아온 야홍릉은 사람을 보내 나우(羅羽)와 봉양을 불렀다.

“너희 둘은 직접 병사 삼천 명을 이끌고 기주성으로 가서 포정사 계한우와 다른 대신들을 제경으로 압송해 오너라. 절대 문제가 생기면 아니 된다!”

나우와 봉양은 무릎을 꿇고 지시를 받았다.

“알겠습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둘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섣달그믐날이 평온하기는 글렀으니 속전속결로 끝을 볼 생각이었다.

자시 삼각이 되자 감진이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자 익숙한 고통이 찾아왔다. 정왕부에서 고문을 당한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매일 깨어나면 몸이 아픈 데 적응이 되었다.

그래서 신기할 것도 없었다.

다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좀 달랐다.

정왕부에서 그를 감금한 별실이 아니었다. 감진은 손발이 가벼워진 것 같아 움직여 보았다. 그제야 무겁게 짓누르던 족쇄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감진은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은 깊은 호수처럼 맑고 고요했다.

“감…….”

귓가에 소년의 앳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깨셨습니까?”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감진은 흠칫 놀랐으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누워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소년은 다급히 일어나 그를 부축했다.

“천천히…….”

감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시선을 돌려 익숙한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소년의 얼굴에 마음이 흔들렸으나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덤덤하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거리를 두는 듯한 말투였다. 낯선 시선에 영린은 심장이 철렁했다.

검은 눈동자에 서글픈 빛이 스쳐 지났으나 영린은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호국 공주께서 보낸…… 시종입니다.”

시종?

“음…… 공주부에 있을 때 널 보지 못한 것 같은데?”

감진이 차분하게 물었다.

영린은 당황한 얼굴로 둘러대기 시작했다.

“저는 공주 전하의 암위라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래?”

감진은 미소를 지을 뿐, 다른 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차 좀 따라다오.”

영린은 흠칫 놀라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 차를 따르러 갔다.

그제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감진이 깨어나면 그더러 꺼지라고 난리를 치거나 물건을 깨부수며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감진은 그러지 않았다.

감진은 화를 내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평온하게 그를 대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감진은 원래도 고요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귀공자의 품위를 지키며 쉽게 화를 내는 경우가 없었다.

이번 생에도 많은 일을 겪은 그였기에 진작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깨우쳤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어찌 영린을 봤다고 쉽게 화를 내겠는가?

영린은 차를 따르고 가져왔다.

그는 감진에게 직접 먹여줄 생각이었으나 감진은 손을 내밀었다.

널따란 소매가 움직이며 그의 퉁퉁 부은 손목이 드러났다.

껍질이 까지고 피가 말라붙은 손목은 보기만 해도 아주 아플 것 같았다.

영린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감진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으나 바로 거두어들이고 말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도 잠시, 그의 눈에는 야정연에 대한 분노와 살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자신이 전생에 그에게 준 상처를 떠올리자 이런 외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대신 화를 내주겠어?’

빈 찻잔이 앞으로 내밀어지자 영린은 시선을 들고 찻잔을 잡은 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공주 전하의 옆에 이렇게 젊은 암위가 있을 줄 몰랐네.”

감진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영린은 무릎을 꿇고 그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다.

“저는 나이가 어리나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감진은 고개를 숙이고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머리를 폭포처럼 드리운 소년은 무릎을 꿇고 있어도 온몸에서 풍기는 고풍스러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감진은 시선을 돌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옆에 쓸데없는 사람을 두지 않는다. 아무리 네가 공주 전하의 사람이라고 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쫓아낼 것이다.”

영린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공주 전하께서 저더러 요즘 여기서 공자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혼내주십시오. 부디 저를 내쫓지만 말아주십시오.”

감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춤을 출 줄 아느냐?”

‘뭐라고?’

영린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춤 말씀입니까?”

감진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정왕부에 있는 동안, 매일 이어지는 고문에 상처가 낫기도 전에 늘어나기만 했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그리고 족쇄를 찬 채, 오랫동안 있었으니 손목, 발목이 너무 아팠다.

그는 침대에 누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춤이나 좀 춰 보아라.”

영린은 우물쭈물하며 일어났다.

“저는…… 춤을 출 줄 모릅니다.”

“춤출 줄 모른다고?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느냐?”

이곳은 빙란각이었다.

방금 전, 그는 깨어나자마자 이곳이 빙란각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린은 바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빙란각은 몸을 파는 곳인데 춤도 추지 않는다면 널 왜 남겨두겠느냐?’

영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감진이 잠을 자고 있을 때, 그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이런 상황에 닥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황자에서 황제로 된 사람더러 소관이나 하는 짓을 하라고 했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영린은 조용히 서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는…… 금을 탈 줄 압니다. 공자께 한 곡 올려도 되겠습니까?”

감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영린은 그의 시선에 당황했으나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줄 몰라 감진이 내쫓을까 걱정되는 한편,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감진이 나라를 내버려 두고 온 자신에게 실망할까 불안했다.

‘애써 가르쳤는데 이런 곳에 와서 소관이나 기녀가 하는 짓을 한다고 탓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영린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감진을 ‘천한 남첩’이라고 빗대지 않았던가? 영옥에게 일부러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결국 감진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말이 그의 입에서 나갔다는 것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비열한 행위로 받은 벌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영린은 자존심 따위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비수가 심장에 박힌 것처럼 숨쉬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영린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유회(有悔)입니다.”

‘유회라고?’

감진은 씩 웃었다.

“특별한 이름이구나.”

영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얼른 돌아가 보아라. 빙란각은 일손이 부족하지 않다. 그리고 난 신분이 비천하여 공주 전하가 이렇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된다.”

그러자 영린은 안색이 변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다시피 말했다.

“공자는 비천한 분이 아니십니다!”

감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영린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성을 잃은 자신을 깨닫고 침묵을 지킨 뒤, 다시 말했다.

“공자께서는 비천한 분이 아닙니다. 게다가 하실 일이 있어서 빙란각에 계신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말을 멈춘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지 마십시오.”

감진은 말이 없었다.

영린은 조용히 서 있다가 불쑥 말했다.

“공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발 씻을 물을 떠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감진이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다.

감진은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영린은 물을 떠 왔다.

김이 나는 물에서는 약초 냄새가 났다.

침대 앞으로 걸어간 영린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감진의 신발을 벗겼다.

“이것은 호국 공주부의 도 의원이 준비한 약재입니다. 공자께서 발목이 다치셨으니 이 약초 물로 발을 담그면 빨리 나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먼저 손을 넣어 온도를 잰 뒤, 조심스럽게 감진의 발을 잡고 물에 넣었다.

“뜨겁지 않습니까?”

감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이곳에는 하인이 많으니 너는 돌아가 보아라.”

영린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공주 전하께서 저더러 공자의 옆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공주 전하의 지시 없이는 함부로 공자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감진은 발을 담그며 물었다.

“그래서 나더러 직접 공주 전하께 말하라는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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