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대세가 기울다
초 각로는 어두운 얼굴로 야정연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께서 암위를 기주에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야정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가득 따른 뒤, 단숨에 마셨다.
상황이 기울었다.
기주로 보냈던 그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야정연은 자신의 결말을 예상했었다.
그는 야홍릉의 수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증거를 손에 넣었을 때는 그것을 뒤엎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지금 황제는 건양궁에 갇혀 지냈다.
정말 몸이 좋지 않은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통제된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야정연은 야홍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까지 매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만약 한옥금이 그녀를 죽이려고 한 사건이 도화선이라면 그녀가 한씨 가문과 황후의 모자에게 앙심을 품고 제경을 떠나 기분전환을 한다는 핑계로 야소숙의 내통 증거를 수집했다는 것도 말이 되었다.
그렇게 황후와 적자를 사지에 몰고 한씨 가문을 멸문시킨 것 역시 조금은 과하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보여준 그녀의 행동은 명백히 제위에 대한 야심이었다.
야정연은 문득 그녀가 제경을 떠나기 전, 도화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잠자리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할 뿐입니다.”]
황당하게 들리는 말이나 남자 못지 않은 야심을 드러낸 말이기도 했다.
‘만약 그때 내가 말 속에 담긴 다른 뜻을 알아차렸다면 지금쯤 다른 결과를 보았을까?’
그는 술잔을 들고 단숨에 비웠다. 그는 대전의 얼어붙은 분위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모든 일이 그와 상관이 없는 듯,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이나 결말에 대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발악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패배를 깔끔하게 인정할 생각이었다.
‘죽기보다 더 하겠어?’
도화산의 곡수유상에서 야자릉이 했던 말도 그렇고 야홍릉이 했던 말고 행동도 그렇고…….
곳곳에 야홍릉의 야심이 드러나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경계했다면, 그래서 병권이라도 손에 넣었다면 지금처럼 몰리지 않았을 텐데. 동제의 황제도 너무 기막힌 시간에 나타났어.
감진이 정말 동제의 세가 공자가 맞다고 한다면 공주부에서 그렇게 오래 있을 동안에는 그의 신분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가 왜 하필 내 저택에 들어온 뒤에 바로 소식이 퍼진 것일까?’
동제의 십만 대군이 변방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야홍릉에게도 충분한 증거가 있었다.
야정연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지금의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야홍릉이 정말 그를 사지로 몬다면 어찌 살아나갈 구멍을 주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신들은 모두 반박할 수 없이 확실한 증거를 보고 말았다. 정왕을 지지하는 대신들의 안색은 더없이 어두워졌고 선왕을 지지하는 대신들의 표정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황자들만의 전쟁이라면 선왕 쪽 신하들은 정왕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당연히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조정이 이미 호국 공주의 천하로 되었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정왕 장인을 수사하라는 지시는 황제가 내렸지만, 시작은 역시 호국 공주였다.
기주로 사람을 보낸 것도 호국 공주였다.
역모죄에 연루된 것도 모자라 동제 황제의 협박까지 받고 있는 정왕은 처지가 가련했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들은 걱정하는 게 따로 있었다.
‘정왕 다음은 선왕이지 않을까? 대황자 야천란은 언제 돌아올까? 남성국으로 간 지 사 개월이나 되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니. 우연인가, 아니면 음모인가?’
“다들 증거에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해결할지 논하는 게 어떻겠나?”
대신들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다.
“부황께서 요양 중이시나 이 일은 그래도 부황의 결정에 따르는 게 맞지. 다른 사람들은 부황을 대신해 넷째를 벌할 권리가 없어.”
선왕이 입을 열었다.
초 각로는 정왕의 편을 드는 선왕의 발언에 의아했으나 맞장구를 쳤다.
“같은 생각입니다.”
승상은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전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네.”
야홍릉은 대신들이 예상하던 것과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증거가 확실하니 당분간 넷째 오라버니를 천뢰에 가두는 게 어떻나? 그러다 부황께서 회복하시면 다시 결정을 기다리자는 말이지. 내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더 좋은 해결 방법을 내놓아도 좋네. 하지만 동제의 황제가 내건 조건에 어떻게 대답하겠는지도 함께 말해주게나.”
야홍릉의 말을 반박하려고 했던 대신들은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듣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동제의 황제가 내건 조건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가 더 어려운 문제였다.
영린의 태도가 이렇게 강경한데 누가 양국의 전쟁으로 모험을 할 것이란 말인가?
문관들은 더욱 깊게 생각했다. 만약 정말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어찌하겠는가?
목국이 이긴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목국이 패배한다면 영린과 담판하러 갔던 사람이 목국의 죄인이 될 게 아닌가?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홍릉이 너도 대신들을 난처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야정연은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죄를 지었으면 시인해야지. 난 비겁한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하든 마음대로 해. 난 군말 없이 따를 테니.”
사내다운 발언이었다.
용수는 박수를 쳐 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박수갈채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야정연이 아닌 우리 애비지. 저것 봐, 조용하게 판을 압도하잖아. 야정연은 변명의 말도 못 하고.’
새해가 몇 시진이 남지 않은 지금, 그녀는 이번에도 장애물을 손쉽게 제거하고 자신의 목표에 성큼 다가갔다.
그러나 연회에 참석하러 들어왔던 대신들은 용수처럼 느긋한 마음을 먹은 자가 없었다. 야천란과 야홍릉을 지지하는 대신들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호국 공주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인 관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야홍릉의 단호한 성격과 뛰어난 능력, 분위기를 압도하는 눈빛에 감탄하면서도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이는 연기가 없는 전쟁터였다. 날카로운 말과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가 없었고 또 황제의 분노도 없었으며 대신들도 황공해서 무릎을 꿇고 사죄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은 조정의 하늘이 바뀌게 될 것을 직감했다.
소름끼치는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그믐날 밤의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눈부신 빛이 밤하늘을 가르며 아름다운 모양으로 터졌다.
제경의 밤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대신들은 이런 방식으로 황제가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랐다.
또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고도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아무리 좋고 떠들썩해도 위기에 놓인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연회는 자시까지 진행되었다. 불안하던 신하들은 야홍릉이 연회를 마친다는 소리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드디어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야모침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잡았다. 무언가를 잡지 않고는 설 수 없었다.
식은땀이 옷을 적셔 축축했다.
신하들은 하나둘씩 궁을 떠났다. 사람들은 동제의 황제와 정왕 사이의 일이나 정왕과 그의 장인 사이의 일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들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다.
정왕의 상황은 좋지 않고 호국 공주가 홀로 대권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은 오늘 다들 보아서 알고 있었다.
정왕을 지지하던 대신들은 정왕의 상황이 반전을 가져올 수 있을지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연루될까 두려워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현재까지 야홍릉의 지위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늘 궁에 묵으실 건가요?”
야홍릉은 편전으로 들어서며 탑 앞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제 저택으로 가셔도 되고요.”
영린은 감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감진을 데리고 빙란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빙란각으로 돌아간다고?’
야홍릉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기루에 가서 묵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궁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빙란각은 감진의 영역이지 않습니까?”
영린이 대답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인 뒤, 더 간섭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계실 생각입니까?”
용수가 뒷짐을 지고 들어오더니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새해가 시작되면 곧 직접 정무를 보실 분이니 되지도 않는 고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전생에 그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맞았다. 감진을 이용해 섭정왕을 패배시켰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섭정왕이 이번 생에도 위험하지 않은 존재라는 말은 아니었다.
영린은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짐이 강산 따위는 다 싫다고 한다면요?”
용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동제의 황위를 내놓겠다는 말입니다.”
영린은 누워 있는 감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동제로 돌아가 섭정왕더러 남제를 공격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국의 땅으로 감진과 바꾸려고 한다면 공주 전하는 허락하시겠지요?”
감진은 야홍릉의 측부였다.
감진의 자유를 되찾으려면 야홍릉의 허락을 받는 게 순서였다.
야홍릉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용수를 바라보았다.
‘제국 전체로 감진의 자유를 바꾸겠다고? 정말 감진은 영린에게 그저 학업을 가르친 스승일 뿐인가?’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깊이 생각해 본 뒤, 내린 결정입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제국의 강산에 관심이 없습니다.”
영린은 이런 얘기들을 할 기분이 아닌 듯했다.
그는 야홍릉의 말을 듣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 얘기는 나중에 하시죠.”
야홍릉은 사람을 시켜 가마를 준비하게 했다. 영린이 감진을 안고 가마에 앉아 궁을 나선 뒤, 야홍릉과 용수도 걸어서 궁을 나갔다.
궁은 등불로 환했고 연회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숨을 조일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도 남아 있었다.
“두 나라의 황제가 도와주고 있으니 내가 가는 길이 예상보다 많이 수월하구나.”
“사실 목국의 가장 큰 문제는 목국 자체에 있습니다. 애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야씨 황족의 황자들은 실력이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와 영린이 도와도 이처럼 순조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용수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용수를 바라보았다.
“네가 직접 나선다면 목국은 네 손아귀에 들어갔겠지?”
용수는 학식과 무예 모두 뛰어난 인재였다.
강한 남성국의 조력이 없더라도 용수에게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