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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58)화 (25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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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화 들끓는 분노

야정연은 줄곧 침착하고 점잖았기 때문에 대신들은 그를 좋게 보고 있었다.

올해 정왕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꽤 많이 일어났지만 대신들이 그에 대한 인상은 아직 나쁘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일은 다들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만약 장양후가 죽은 일이 누군가 일부러 그를 음해한 것이라면 그가 공주부의 측부를 잡아들이고 고문을 가한 이유는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가 감금한 사람은 왜 하필 동제 세가의 공자이자 동제 황제의 형이라는 말인가?

이 일로 동제와 갈등이 생겨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대전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야정연은 표정이 굳어진 채, 가만히 있었다. 지금에 와서 부인하고 변명해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오늘의 일도 야홍릉이 엮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쩐지 야홍릉이 내가 감진을 잡아두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움직임이 없다 했어. 이걸 노린 것이었군.’

“호국 공주께서는 이번 일을 어떻게 하는 게 맞다고 보십니까?”

승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편찮으시니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황자까지 엮인 일이니 그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동제의 황제 뜻을 먼저 물어봐야겠군요.”

“짐의 뜻 말입니까? 짐은 형님이 무사한지 걱정입니다. 그래서 지금 급선무는 공주 전하가 정왕부에 사람을 보내 짐의 형님을 모셔오는 것입니다.”

영린이 말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 높여 불렀다.

“여봐라!”

그믐날 연회인데다 동제의 황제까지 왕림하자 금위군은 더욱 바짝 경계하며 밖을 지키고 있었다. 직접 광양궁 밖을 순찰하던 한묵은 호국 공주의 부름을 듣고 바로 대전 안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전하!”

“사람을 데리고 정왕부로 가서 감 공자를 모셔오너라.”

야홍릉은 야정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감 공자는 정왕부의 어느 곳에 계시나요?”

야정연은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힐끗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왕 전하.”

승상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협조해 주십시오.”

야정연은 눈을 내리깔고 감진을 감금한 곳을 말했다.

초 각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상황이 이미 야홍릉 쪽으로 기울었으니 속이 탔던 것이다. 정왕을 지지하던 다른 대신들도 한숨을 내쉬었다.

곧 한묵은 사람을 데리고 궁을 나섰다.

용수는 태연한 얼굴로 술을 즐겼다.

‘올해의 추석 연회는 살인 연회와 다를 게 없군. 목국의 황자들은 대단한 계획도 없이 쉽게 사지로 몰리는군. 하나같이 바보 멍청이들이야. 그래서 전생에 애비를 죽이려고 애를 썼겠지.’

권력을 원하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경쟁자를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더욱 비겁하고 악랄한 수단도 서슴지 않았다.

전생에 야홍릉은 야심이 없었지만 그들은 속으로 아주 경계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은 이미 죽은 야소숙이나, 지금 자리에 있는 야정연, 야모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황제의 아들들이 아닌가?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용수는 또 다른 생각에 잠겼다.

‘애비는 목국 황제의 친딸이 맞을까? 야씨 황족은 모두 무능하고 나약한데 어찌 애비처럼 현명하고 용감한 딸이 태어났을까? 아니지, 핏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애비의 능력이라면 황족이 아니어도 황위에 오를 거니까. 정 안되면 사람 몇 명 더 죽이고 목국의 황족을 아예 갈아치우면 되지. 개국 황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용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대전에 있던 대신들은 불안하여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왕이 제발 감진을 심하게 고문한 게 아니길…… 정말 동제의 황제를 화나게 한다면 변방에서 동제의 병사들이 무슨 짓을 할까?’

목국이 아무리 부유하고 강하다고 해도 동시에 두 나라와 전쟁을 치를 수는 없었다.

연회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고 싶은 생각마저 사라졌다.

승상은 분위기를 띄우느라 무희더러 춤을 추라고 했다.

악기 소리가 들리자 무희의 아리따운 자태에 사람들은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살짝 풀어진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묵이 감진을 대전으로 데려오자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은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피투성이가 된 남자에 쏠렸다.

감진은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대신들은 그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빙란각은 제경에서 가장 큰 기루였다. 이곳에 있는 대신들도 반수 이상이 빙란각에 들어가 보았기에 감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감진이 춤 하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홀렸던가?

감진은 수많은 남자의 마음속 정인이었다.

남색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감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빛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하지만 한묵의 부축을 받으면서 대전에 들어온 감진은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는 머리가 흩어졌고 얼굴은 창백했다. 얼굴과 목에는 핏자국이 여러 곳 있어 얼핏 보기에도 심한 고문을 당한 듯했다.

그러나 양옆으로 축 드리운 두 팔이 연약한 매력을 부각시켰다.

대신들은 동제의 황제를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감진이 대전으로 들어오는 순간, 영린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생기를 잃은 감진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로 핏자국에 영린은 핏속의 분노가 들끓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꾹 참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서슬 푸른 살기뿐이었다.

“여봐라! 얼른 태의를 불러오거라! 한 통령, 어서 감 공자를 편전에 눕히고 태의더러 진찰하라고 하게.”

승상의 초조한 목소리가 대전의 정적을 깼다.

궁인들은 재빨리 밖으로 뛰어갔다.

한묵은 감진을 안고 옆의 편전으로 갔다.

영린은 여전히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나 그의 아름다운 눈매에는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살기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분노했을 때 생기는 살기였다.

야정연도 이를 눈치채고 불안한 얼굴로 눈치를 보았다.

무력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그는 문득 운명이 야속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아주 평범한 일을 했고 아주 당연한 수단을 사용했다.

그런데 하늘은 왜 항상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

‘빙란락의 감진이 정말 동제의 세가 공자라고?’

태의는 감진의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상처가 겹친 부분도 있지만 모두 외상일 뿐, 뼈나 내장이 다친 것은 아니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영린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국은 이 일에 대해 해명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는 나이가 어렸지만 온몸으로 제왕의 위엄을 내뿜고 있어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짧은 한마디에 대신들은 목국 황제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압박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한기가 대전을 뒤덮었다.

“폐하.”

승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저희가 잘못한 것입니다. 저와 정왕 전하는 먼저 폐하께 사죄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정왕 전하는 감 공자가 동제의…….”

“몰랐으니 죄가 없다?”

영린은 고개를 들고 승상을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에는 꾹꾹 눌러 담은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승상 대인의 말씀은 짐더러 너그럽게 양해해 달라는 것입니까?”

승상은 말문이 막혔다.

“저는 그 뜻이 아니라…….”

“호국 공주 전하.”

영린은 야홍릉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하실 것입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술을 마신 뒤, 담담하게 물었다.

“동제의 황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목숨으로 갚아야지요.”

영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목국의 정왕이 목숨으로 사죄한다면 짐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입니다. 안 그러면 변방의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릴 거고요.”

그러자 신하들은 깜짝 놀랐다.

“폐하.”

승상은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감 공자가 다치긴 했지만 모두 외상일 뿐입니다. 정왕 전하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나 감 공자는 목숨에 지장이 없는데 정왕 전하더러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은 좀 억지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영린이 코웃음 쳤다.

“그래서 짐의 형님은 그저 헛고생만 한 것이다? 이 말씀인가요?”

“그게 아니라…….”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겠지요. 짐의 형님은 가벼운 외상일 뿐인데 정왕은 왜 목숨을 내놓아야 하나? 이 말 아닙니까?”

그 말이 맞았다.

감진이 동제의 세가 공자라고 해도 외상을 입은 거로 어떻게 정왕의 목숨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감진은 정왕에게 잘못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영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정왕은 아무 잘못도 없는 감진을 저택에 가두고 고문을 가하며 괴롭혔습니다. 그때는 누구도 정왕의 행동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승상은 말문이 막혔다.

“감진이 동제 세가 공자가 아니라 그저 기루의 소관일 뿐이라면, 짐이 찾아와 감진을 찾지 않았다면, 형님은 이 모든 고생을 허투루 한 게 아니게 됩니까?”

승상의 안색은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결국에는 공평하고 말고를 따질 일이 아닙니다. 황족이나 귀족이 제멋대로 굴어도 되냐 하는 문제지요. 그래서 짐도 한 번 제멋대로 굴어보려 합니다.”

영린이 냉소하며 말했다.

그는 느긋하게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왕이 목숨으로 갚든, 동제의 병사들이 목국을 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편전으로 갔다.

더 이상 야정연의 역성을 드는 대신들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용수는 앉아서 술을 마셨다.

‘목국 궁에서 빚은 술맛이 좋군. 향긋하고 끝맛도 풍부해. 영린의 기세도 좋아. 분위기를 압도하는군. 좋아, 좋아…….’

한편, 야정연은 목석처럼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승상과 영린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말없이 술만 마셨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무관심한 태도였다.

영린은 편전으로 들어가 탑에 누워 기절한 감진을 바라보았다.

태의가 준 약을 바른 뒤, 감진은 깊은 잠에 빠졌다.

잠든 감진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영린은 고요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 야홍릉이 들어와서 병풍에 기대서더니 물었다.

“예전에 감진과 어떤 사이였습니까?”

감진은 어렸을 때부터 빙란각에서 자랐다. 누구도 그가 동제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야홍릉이 말한 ‘예전’은 전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전에 꾼 꿈에서 그들 네 명은 모두 각자의 사연을 가진 주인공이었다.

다만 전생에는 인연이 닿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시 태어난 지금 그들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야홍릉 또한 헌원용수가 치른 대가로 다시 과거로 되돌아오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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