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자미성이 선택한 황제
야홍릉은 싸늘하게 말하고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승상 대인, 이 얘기를 그들에게 전해주게. 벼슬자리에 있기 싫어졌다면 얼마든지 난리를 치라고 해주게나.”
그러자 서재 안의 관리는 모두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호국 공주의 성격은 여전하군. 사람을 영입해야 하는 시기인데도 꿈쩍하지 않는다니…….’
대신들은 곧 야홍릉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 문이 닫히자 야홍릉은 옆에 서 있는 용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신분은…….”
“괜찮습니다. 제 신분을 밝힐 때가 되었지요.”
용수는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저녁 무렵, 말발굽 소리가 제경의 길에서 울려 퍼졌다.
사청의는 사씨 가문 사장이라는 신분으로 목국에 도착했다.
목국의 제경에는 그가 예전에 벌여놓은 사업이 있었다. 모두 앞날을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동안 그는 이 사업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었다. 이번은 사청의가 두 번째로 목국에 오는 것이었다.
그는 신분이 확실하기에 목국에 나타나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비싼 말을 타고 제경에 들어와 바로 공주부로 간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그의 뒤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모두 사청의의 심복들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공주부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용수는 사청의가 왔다는 말을 듣고 지시를 내렸다.
“바깥에서 반 시진 무릎을 꿇으라고 하거라.”
무릎을 꿇기 전에 먼저 할 얘기를 해야 했다.
사청의는 열여덟 명의 시위를 데리고 용수 앞에 섰다.
예를 올리고 난 뒤, 그는 시위들더러 물러나라고 했다.
사청의는 일어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보고했다.
“9황자께서 금국 서쪽 위(衛), 양(陽), 곤(昆) 세 성곽을 점령했습니다. 보름 전에 서신을 보내 저더러 말 만 필을 준비해 달라고 했습니다. 남성국의 제경에 돌아간 뒤, 흑의 기예병을 무장시킬 거라면서요.”
용수는 침묵했다.
그는 전쟁에 남성국의 황제가 되어 남성국의 모든 것에 대해 빤히 알지만 헌원창은 달랐다. 헌원창은 그처럼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용수가 남성국에 돌아가기 전에 헌원창은 군영에서 가장 강한 흑의 기예병을 배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는 권력이 없었다.
병사의 장비는 모두 조정의 손에 있었다.
무장이 뭔가를 요구한다면 호부와 병부의 심사를 거쳐야 했다.
무장이 종종 호부나 병부의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1품 무장이라고 해도 6품 시랑에게 미움을 사면 많은 일에서 제한을 받을 수 있었다. 과묵한 헌원창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전쟁용 말을 삼만 필 준비해서 주거라. 금국과의 전쟁에 끝나면 그더러 돌아가서 기예병 훈련에 전념하라고 하고. 만약 병기나 갑옷을 바꿔야 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나에게 말하거라. 그리고 앞으로 흑의 기예병에게 필요한 물자나 장비는 네가 맡도록.”
사청의는 고개를 숙이고 지시를 받았다.
“네.”
용수는 먼 길을 오느라 지쳤으면서도 점잖은 모습을 잃지 않은 사청의를 바라보았다. 우아한 선비 같은 그는 십 년 전, 증오에 치를 떨던 소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십 년 사이 그는 많이 성숙해졌다.
용수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물었다.
“그동안 네 생부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느냐?”
사청의는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저었다.
용수가 그더러 사적으로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한 뒤, 그는 마음속 깊이 원한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그 뒤로 그는 서릉에 간 적도 없었다.
그러니 기억에 없는 생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는 사청의였다. 사씨 가문의 양자인 그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직 사씨 가문의 복수만 그의 목표였다.
“공주부에 심한의라는 자가 있는데 그는 기주 상인 심씨 가문의 양자다. 그자가 너와 아주 닮은 것 같으니 관심이 있으면 만나 보아라.”
용수는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사청의는 깜짝 놀랐다.
‘나와 닮았다고? 심한의…… 청의, 한의…….’
사청의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동안 그는 감정을 억누르는 데 익숙해졌고 출생의 비밀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장사와 복수에 비교하면 출생의 비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 제 핏줄이 살아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저는 가족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평온하게 말했다.
정원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야홍릉도 용수와 사청의가 말하기 편하라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헌원용수는 괜찮다고 했지만 야홍릉은 멀리서 온 사청의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정원에는 그들 둘밖에 없었다.
사청의의 말을 들은 용수는 예상했던 일이라 놀라지 않았다.
둘이 함께 보낸 시간은 적어도 그는 사청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뭔가를 한 것은 아니다. 우연하게 심한의를 만나게 된 것이지.”
그는 기주의 포정사 사건과 추위의 성적 조작 사건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지금 공주부에 있다.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싫으면 말아라. 네 사적인 일이니 나도 관여하고 싶지 않구나.”
사청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목국의 대황자는 지금 상황이 어떠냐?”
“얼마 전에 난리를 한 번 쳤습니다. 영린이 남성국을 떠나자 자신도 따라서 남성국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봉 승상이 막았지요. 그러자 야천란은 자신이 범죄자가 아니고 남성국에 온 손님이니 자신을 잡아둘 권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봉 승상에게 도대체 목적이 뭐냐고 따져 물었지요.”
그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남성국을 떠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봉서오는 지금 남성국에 있느냐?”
“폐하의 지시를 받고 지금 병사들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청의가 말했다.
용수는 대답한 뒤, 생각에 잠겼다.
사청의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폐하께서는 언제 남성국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왜 그걸 물어보지?”
용수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어떤 나라든 황제가 없으면 안 됩니다. 폐하께서는 등극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는데 긴 시간 동안 조정을 떠나 있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용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청의, 네가 할 일은 마장의 정보를 전하는 것이다. 네 일만 제대로 하면 되지, 다른 것은 상관하지 말아라.”
“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청의는 고개를 숙였다.
용수는 차를 다 마시고 밖으로 나갔다.
“먼 길을 왔으니 네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마. 저녁 식사가 마련되어 있으니 시위들의 숙소와 끼니를 알아서 챙기거라. 다른 얘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사청의는 고개를 숙이고 용수의 지시를 받았다.
용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미간은 저도 모르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를 입양한 아버지는 서릉에서 지위가 높은 승상이었다. 사청의는 어렸을 때부터 귀족 가문의 공자로 대우받으며 귀족과 황족의 흥망성쇠를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이것은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황족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피해를 보는 것은 백성이었다. 황제가 조정에 소홀히 한다면 다른 마음을 먹은 사람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내란이 일어나면 심각한 일이 생길 것이 아닌가?
사청의는 용수가 일을 하지 않아서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용수의 능력이 부족할까 불안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만약 야홍릉이 목국의 황제가 된다면 남성국 황제인 용수와 야홍릉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겠는가?
만약 용수가 야홍릉을 따라 목국에 머문다고 하면, 남성국은 어찌한다는 말인가?
남성국과 목국은 거리가 멀어 서신을 보내는 데만 열흘이 넘게 걸리고 말이나 마차를 타고 오가는 데는 시간이 더욱 걸렸다.
‘폐하께서 자주 먼 길을 오가실 생각인가?’
목국에 오기 전에 묵백은 점을 본 적이 있었다.
묵백은 천하 패자의 운이 열리기 시작했고 자미성(紫微星)이 점차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을 했었다.
‘점에서 말한 천하 패자의 기운을 담은 자미성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헌원용수일까? 아니면, 야홍릉?’
* * *
십이월 이십구 일, 기주로 갔던 두 사부 참정이 돌아왔다.
십이월 이십육일이 되던 날.
두 참정은 돌아오는 길에 기주 교외에서 매복한 자객들에게 기습받았다. 자객이 서른 명 가까이 출동했으나 봉염(鳳魘)을 선두로 한 영위들은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을 모두 죽이는 데 성공했다.
사건을 수사하는 일도 원래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황자가 연루된 사건은 더더욱 위기의 연속이었다. 두 명의 참정은 처음에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연속된 두 번의 습격에 밤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 뒤로 자객이 찾아오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야홍릉이 그들에게 보내준 호위무사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라 낮이든, 밤이든 두 참정을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그들을 죽이러 온 자객들이 바로 시체로 되는 것을 보며 두 참정은 차차 마음을 진정하게 되었다.
무엇이나 익숙해지면 놀라지 않기 마련이다. 그들도 야홍릉이 이번 사건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기에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오는 날에 자객에게 습격당할 때도 놀라지 않았다.
자객의 수가 평소보다 좀 많을 뿐, 특별한 점은 없었다.
십이월 이십칠 일.
두 참정은 성에 가까운 객잔에 묵었다. 밤이 깊었을 때, 창호지에 구멍이 생기더니 기다란 대나무가 들어왔다. 두 참정은 대나무 관에서 나오는 연기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만약 이때 살수가 방안에 잠입했다면 두 참정은 꼼짝하지 못하고 목이 베였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깨어난 그들은 자신들이 흔들거리는 마차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젯밤 그들이 정신을 잃을 때,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살기를 느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을 노리던 사람들이 또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잦은 습격과 갖은 고난을 겪은 끝에 둘은 십이월 이십구 일 점심 무렵, 비로소 제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은 지친 몸을 이끌고 야홍릉을 찾아가 조사한 증거를 모두 야홍릉에게 바쳤다.
“기주 포정사 계 대인의 저택에는 아주 큰 지하 병기 창고가 있었습니다. 병기와 갑옷은 모두 그곳에 있었지요. 전하께서 파견하신 관병들은 이미 그 창고를 지키고 있습니다. 계 대인도 감금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