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더 좋은 선택
아홍릉의 말을 들은 용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애비, 지금 저를 기루에 보내시는 것입니까? 애비는 질투도 안 나십니까?”
용수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질투는 무슨.”
용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애비는 말로만 저를 좋아한다고 하시는 거지 사실은 진심이 아니지요?”
야홍릉은 흠칫 놀란 얼굴로 화나서 씩씩거리는 용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화가 난 것이냐?”
“제가 화나든 말든 신경이 쓰이십니까?”
야홍릉은 그 말에 침묵했다. 그리고 그의 앞으로 걸어가 조용히 용수의 안색을 살폈다.
귀티 나는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꿈에서나 보았던 고귀한 제왕의 모습이었다.
야홍릉 앞에서 굽신거리는 것은 그가 흔쾌히 원해서 그런 것이기에 뼛속 깊이 박힌 제왕의 위엄은 사라지지 않았다.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용수는 이 손짓의 의미를 알고 바로 허리를 숙여 야홍릉과 눈을 맞췄다.
“농을 한 것이다. 하지만 네가 화를 내도록 허하지.”
야홍릉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저를 달래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용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떻게?”
“애비 생각에는요?”
예상과 다르게 야홍릉은 흔쾌히 대답했다.
“잠자리를 제외하고 다른 것은 얼마든지 들어주마.”
하지만 용수가 가장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럼 저는 목국의 강산을 원합니다.”
야홍릉은 표정이 어두워져서 용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인지 살피는 듯했다.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다른 것은 얼마든지 들어준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정말 원한다면 안되는 것도 아니지. 아무튼 언젠가 다 네 세상이 될 게 아니냐? 천하의 패자가 될 테니 말이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용수는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저는 천하의 패자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뭐라고?’
야홍릉이 물었다.
“왜?”
“너무 지치니까요.”
용수는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숙이고 입을 맞추었다.
“전 다 내려놓았습니다. 전생에는 천하의 유일한 황제가 되고 싶었지만 이번 생에는 애비와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남성국과 목국만 잘 다스리고 다른 것은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난 이미 너와 함께 영역을 넓힐 계획을 해두었는데.”
“애비는 천하의 패자가 되고 싶으신 것입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난 야심이 그리 크지 않아.”
“세상은 언젠가 통일될 수도 있고 통일된 상태에서 분할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 서적에도 나라를 넓힌 황제에 대해서는 크게 칭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백성들한테는 전쟁과 고통일 뿐이지요.”
용수는 야홍릉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홍릉원으로 걸어갔다.
“이번 생에 제가 세상을 통일시킨다고 해도 나중에 제 후손이 또 세상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세상이 평화로운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수많은 병사가 전쟁터에서 죽을 일도 없을 것이고 백성들도 편히 살 게 아닌가?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비.”
용수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이건 포기하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평화로운 게 좋고 애비와 함께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게 좋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시간을 전쟁터에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생은 짧은 몇십 년일 뿐인데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면 그리하여라.”
‘후회한다고?’
용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후회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의 인생에 야홍릉이 들어온 것만으로 그는 이미 후회할 일이 없었다.
* * *
점심시간이 지나자 조정에서 대신들이 공주부로 찾아왔다.
승상과 일고여덟 명의 중년 대신이었다. 그중 야정연도 있었다.
기주 포정사의 사건이 아직 수사 중이라고 하지만 죄명이 확실해지기 전까지 황자인 그는 조정의 업무에 참여할 권리가 있었다.
모두 조정에서 실권을 가진 대신들이었다. 야홍릉은 그들 중 예부 상서를 보고 그들이 찾아온 목적에 대해 짐작했다.
정사를 논하기에는 서재만 한 곳이 없었다.
야홍릉이 책상에 마주 앉자 다른 관리들도 야정연과 함께 앉았다.
야홍릉이 입을 열기 전에 승상이 먼저 입을 뗐다.
“오늘 급보를 받은 것을 알고 계십니까?”
다른 관리들도 모두 표정이 어두웠다. 변방에 동제의 십만 대군이 나타난 게 불안한 눈치였다.
“급보라고?”
야홍릉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야정연을 힐끗 스쳐보았다.
야정연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지만 초조한 마음을 억지로 숨기는 것 같았다.
“동제의 변방에 정예병이 십만 명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동제의 황제가 이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목국 제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승상이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공주 전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동제가 지금 시국에 목국과 전쟁을 발동한다면 이미 금국과 전쟁 중인 목국은 상황이 더욱 악화 될 것이다.
“동제의 황제가 하필 이때 제경으로 오다니…”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우리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려는 건가?”
“…….”
“…….”
승상을 포함한 대신들은 야홍릉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공주 전하, 농담하실 때가 아닌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영린이 하필 이때, 연말에 오는 것은 목국의 사람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용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애…… 전하 참 현명하십니다.”
야정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그는 야홍릉의 옆에 서 있는 준수한 청년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는 누구냐?”
동제의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한 나라 황제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야정연은 예전부터 용수의 신분이 궁금했지만 줄곧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 그는 더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용수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야홍릉도 못 들은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동제의 황제는 일이 있어서 오는 것이겠지. 그의 목적이 뭔지 파악하고 다시 얘기하는 게 좋겠네. 난 현갑군에게 언제든지 전쟁에 나갈 준비를 하라고 하겠네.”
야정연은 용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묻고 있지 않느냐? 넌 도대체 누구냐?”
이 말에 서재는 쥐 죽은 듯한 정적에 잠겼다.
용수는 뒷짐을 지고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누구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서재에는 여러 쌍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헌원용수의 말에 야정연의 안색이 변했다.
“넷째 오라버니, 누가 오라버니더러 제 저택에서 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라고 했습니까? 위엄을 부리고 싶으면 오라버니 댁으로 가서 하세요.”
야홍릉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야정연이 차갑게 대꾸했다.
“네 뜻은 네 옆에 의심스러운 사람이 나타나도 난 묻지 말라는 것이냐?”
“그럼 오라버니 옆에 의심스러운 사람이 나타난다면 저도 그 사람의 출신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까?”
야정연이 말했다.
“그럼, 얼마든지.”
그러자 야홍릉이 말했다.
“그렇군요. 저는 기주 포정사가 아주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네요. 오라버니, 차분히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곧 다 밝혀낼 테니까.”
그러자 서재 안은 또 정적에 잠겼다.
야정연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둡게 변했다.
요즘 며칠간 그는 매일같이 사람을 파견해 기주로 보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의 사람들이 크게 죽거나 다쳤다. 그는 화가 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이미 그의 속마음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는 심지어 사람을 파견해 야홍릉을 암살할 생각도 품었었다.
하지만 호국 공주부의 완벽한 수비를 뚫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야홍릉은 경계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어서 밖의 음식을 함부로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래서 독을 탈 기회도 찾지 못했다.
야정연은 기주의 사건 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홍릉이 기주로 파견한 두 관리가 무사하게 돌아온다면 자신은 야소숙의 뒤를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지 않아! 절대!’
“예부에서는 방문하는 객의 접대를 잘하게.”
야홍릉은 야정연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연말에 더 이상 불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네.”
승상은 의아한 얼굴로 자꾸만 야홍릉의 옆에 서 있는 용수에게 시선을 던졌다.
용수는 외모로 흠잡을 데 없었다.
완벽한 얼굴과 몸매는 남첩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절대 남첩답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전에 야홍릉을 따라 궁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림자처럼 있어 얼핏 보면 시위 같았다.
하지만 방금 말할 때 풍긴 압박감은 황자인 야정연의 기를 누르기에도 충분했다.
야정연 뿐만 아니라 승상도 용수의 신분에 의심을 품었다.
‘동제의 황제 이름을 직접 부르다니. 그것도 잘 아는 사람을 부르는 듯했어. 이 시위가 동제의 사람이라면 황제의 이름을 부르지는 못하겠지. 그런데 동제 사람이 아니고 다른 나라의 사람이라면 동제의 황제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것이지?’
생각에 잠겼던 승상이 물었다.
“공자는 어디에서 오셨나?”
‘공자’라는 말 한마디에 용수는 남첩보다 더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승상의 말에서 존중과 예의를 느꼈다.
만약 예의를 갖춘 질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도 예의 없는 사람이 될 게 뻔했다.
문관의 우두머리 위치까지 오른 승상은 사람을 대하는 방면에서는 흠잡을 데 없었다.
그가 예의 바르게 말하자 용수도 예의를 갖추었다.
“저는 공주 전하의 남첩이자 호위무사입니다. 승상 대인, 저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예의를 갖춘다고 해서 솔직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승상은 용수에게서 가치 있는 것을 알아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동제의 황제가 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동제와 전쟁이 일어난다면 호국 공주가 병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갈 가능성이 컸다. 그런 야홍릉이 아끼는 사람이니 승상은 이 시점에 야홍릉에게 밉보이는 행동을 할 리 없었다.
야홍릉은 예부에게 어떻게 할 것을 당부하고 동제의 일에 대해 의논했다.
이때, 선왕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선왕께서 오늘 곤장을 맞아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조정의 대신들은 불만이 많은데 공주 전하께서 위로를 전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위로?’
“난 바빠서 그들의 기분까지 달래줄 시간이 없네. 화를 내든, 불만을 품든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인데 그 일로 자신의 직무에 소홀하거나 조정에서 나에게 대든다면 퇴직을 권할 수도 있으니 그리 알라고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