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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52)화 (25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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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화 고생했어

“선왕은 어젯밤 정왕과 함께 승상부로 갔습니다. 둘은 승상의 서재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있었습니다.”

영일이 보고했다.

홍릉원의 서재에 앉아 있던 야홍릉은 승상이 보내온 상주서를 읽어보고 있었다. 중요한 상주서가 없기에 그녀도 자세히 읽어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상주서를 옆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

“이 상주서들을 모두 승상부로 가져가거라.”

정려는 책상 위의 상주서를 정리해 안고 나갔다.

그리고 서재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호원에게 넘겨주었다.

“전하께서 이 상주서들을 모두 승상에게 전해주라고 하셨네.”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상주서가 그대로 돌아온 것을 보고 승상이 무슨 생각을 할지 야홍릉은 관심이 없었다.

호원은 지시대로 움직였다.

“선왕의 지금 행동은 죽기 전 마지막 발악에 불과합니다.”

능묵은 책상 앞에 서서 익숙한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걸 아직도 남겨두고 계셨습니까?”

야홍릉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침묵에 잠겼다.

능묵은 한숨을 내쉬고 계척으로 손바닥을 내리쳐 보았다.

묵직한 아픔에 예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는 시선을 들고 야홍릉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애비는 엄격한 스승님이 어울립니다.”

야홍릉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능묵은 자연스럽게 계척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손 내밀어라.”

야홍릉이 말했다.

능묵도 순순히 받아쳤다.

“오른손을 내밀까요? 왼손을 내밀까요?”

“네 생각에는?”

능묵은 왼손을 내밀었다. 야홍릉은 계척으로 그의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프냐?”

능묵은 손바닥에 빨간 자국이 난 것을 보며 말했다.

“애비가 많이 봐줬나 봅니다. 지난번보다 아프지 않습니다.”

‘당연한 소리.’

야홍릉은 계척을 내려놓았다. 전에는 그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벌로 때린 것이었다. 지금은 아무 이유도 없이 왜 아프게 때리겠는가?

하지만 야홍릉도 추억에 잠겼다.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며 턱을 문질렀다.

“이중 약물로 기억을 뒤덮는다……. 특별한 방법이긴 했지. 어떻게 생각한 거야?”

능묵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묵백이 말해줬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덧붙였다.

“다른 신분으로 사는 것이니 과거를 깨끗하게 지우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허점이 드러날 게 아닙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은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그녀의 다리에 댔다.

“저는 애비가 대단한 여인이기에 출신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을 곁에 두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기에 경계심이 강해 저에게 의심스러운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저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기억을 지웠을 뿐만 아니라 신분을 노출할 수 있는 학식과 무공까지도 싹 지운 것이다.

그에게는 신은전에서 익힌 것과 충성심밖에 없어야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야홍릉의 믿음을 얻을 수 있었다.

야홍릉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헌원용수는 그녀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비굴한 방식으로 그녀의 옆에 왔다. 그가 겪은 수많은 고통과 고생 역시 그녀만을 위한 것이었다.

야홍릉은 이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감동을 받았다.

지금 그에게 흠뻑 빠진 야홍릉은 예전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야홍릉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치고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용수.”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생했어.”

능묵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원래 ‘뭐가 고생입니까? 저는 달갑기만 했습니다’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말을 바꾸었다.

“고생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힘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애비, 앞으로 저를 많이 많이 아껴주시고 보상해 주십시오.”

야홍릉은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다 가볍게 ‘응’하고 대답했다.

둘은 서재에서 달콤한 사랑을 속삭였다.

이때, 밖에서 하인이 보고했다.

“전하, 초 각로와 무왕, 장왕과 영왕이 찾아왔습니다.”

야홍릉이 대답했다.

“말발이 꽤 서는 사람들이 다 왔군.”

친왕들이 초 각로와 함께 찾아온 것을 보면 작정을 하고 온 듯했다.

그들이 공주부에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만약 야홍릉이 설교 몇 마디에 넘어갈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었다.

야홍릉은 능묵과 함께 서재를 나서서 전청으로 향했다.

시녀는 이미 그들에게 차를 따르고 있었다.

온 자들이 모두 종친 대인이니 전청의 분위기는 숙연했다.

야홍릉이 오기 전까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야홍릉이 빨리 도착하여 어색한 공기도 잠시 흩어졌다.

전청에 들어선 야홍릉은 양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상석에 앉았다.

정려가 조용히 차를 올렸다.

장 대인은 고리타분한 노인이었다. 야홍릉이 전청에 들어선 뒤로 그는 언짢은 얼굴로 야홍릉의 뒤에 서 있는 준수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며칠간 떠들썩하던 공주부의 남첩이라는 것을 눈치챈 그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곳은 전청입니다. 나는 곧 공주와 국가대사를 논할 건데 이런 추잡한 것이 들어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전청의 분위기는 정적에 잠겼다.

차를 따르던 정려는 표정이 어두워지며 욕을 하려고 했다.

이때, 야홍릉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부님들께서 오늘 저한테 중요하게 하실 얘기가 있어서 오신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생각했나 보군요. 공주부에 오신 건 트집을 잡기 위해서라면 죄송하지만 전 바쁘니 먼저 자리를 뜨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일어서서 나가려고 했다.

장왕은 멍하니 있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홍릉!”

야홍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능묵의 손을 잡고서 밖으로 향했다.

“말이 아니군! 말이 아니야!”

장왕은 화가 나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정려는 코웃음을 친 뒤, 야홍릉의 뒤를 따랐다.

다른 친왕들과 초 각로는 아직 말도 하지 못했는데 야홍릉이 이런 자세로 나오는 것을 보자 아까까지 품고 있었던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들을 탓할 것도 못 되었다.

공주부에 찾아온 친왕들 중 초 각로를 제외하고 다들 정무를 보지 않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었다.

야홍릉과 두 세대 떨어진 그들은 야홍릉과 접점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야홍릉은 예전에 변방에서 상주했기에 그녀와 왕래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젊은 사람들이었다.

궁의 태후, 황후와 황제를 제외하고 야홍릉과 얘기를 많이 해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이 든 친왕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야홍릉이 적어도 겉으로나마 공손하게 예의를 갖출 줄 알았다. 어른들이 체면을 내려놓고 어린 공주를 보러 왔는데 이렇게 홀대를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순간 노인들의 안색이 모두 어둡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이제는 어떻게 합니까?”

장왕은 화가 나 수염까지 떨리고 있었다.

“목국은 예로부터 효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야홍릉처럼 어른을 무시하고 기고만장한 공주에게 어찌 조정 대권을 맡기겠습니까? 난 절대 허락하지 못합니다!”

그는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허락하고 말고는 야홍릉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야홍릉이 그들을 만나러 온 것은 나이 많은 친왕들이 특별히 찾아왔으니 그래도 어른에게 예의를 갖추자는 마음 때문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제는 그들도 어른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장왕의 입에서 ‘추잡한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야홍릉은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화내지 마십시오. 저도 화를 내지 않는데 애비가 왜 화를 내십니까?”

능묵이 그녀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홍릉은 그를 돌아보더니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좋은 날을 골라서 명분을 주마.”

능묵은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 촉감을 느끼다 다음 단계로 들어가려던 순간, 야홍릉에게서 이 말을 듣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명분이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능묵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행복한 감정이 살랑살랑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걸 전화위복이라고 하나?’

사실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능묵은 그들의 말을 전혀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그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욕을 먹은 대가로 명분을 가지게 되어 기쁘기만 했다.

능묵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부마입니까?”

크게 놀라울 건 없었다. 그는 평소에 총애를 다투겠느니, 명분을 원하느니 말을 많이 했지만 사실 그런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야홍릉이 자신만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조정이 어지러운 상황이기에 혼인 얘기가 오가기도 뭣했다.

야홍릉은 생각을 해보고 말했다.

“다 된다. 네가 목국에 데릴사위로 들어오든, 내가 너에게 시집가든 다 같은 것이니 말이야.”

예전에 남성국에 있을 때, 야홍릉은 이미 그에게 시집가겠다고 말을 했지만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야홍릉은 평소 예의나 명분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혼인도 하기 전에 능묵과 잠자리를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능묵은 손을 내밀고 야홍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의젓하게 말했다.

“급하지 않습니다. 애비가 목표를 이루고 목국이 안정적으로 변하면 다시 혼인에 대해 얘기하시죠.”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이 그녀의 앞에서 듬직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적었기에 그녀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게 진짜 그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귀한 남성국 제왕은 그녀의 옆에는 항상 비굴하고 굽신거리며 최대한 물러서 주었다. 그가 괜찮다고 해도 그것은 진짜 헌원용수가 아니었다.

“용수.”

야홍릉이 평온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그냥 이렇게 해라. 남첩으로 돌아가지 말고.”

그는 비굴과 거리가 먼 남자였다.

그녀도 그가 그렇게 지내는 게 싫었다.

그들은 평등한 사이여야 했다.

“앞으로 이름도 바꾸는 게 좋겠어. 난 용수라는 이름이 네 신분에 더욱 어울리는 것 같아.”

그는 공주부로 들어온 뒤, 줄곧 ‘능묵’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녀는 그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능묵은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이 영원히 그녀의 능묵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독립적인 인격이지 누가 누구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처럼 다정하게 굴어도 되지만 그 다정함은 헌원용수의 신분에 걸맞는 것이어야 했다. 마치 전생에 야홍릉을 처음 보고 한눈에 반한 남성국 태자 헌원용수처럼 말이다. ‘능묵’이라는 신분은 그가 자신의 사랑을 이루려고 사용한 수단에 불과했다.

야홍릉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널 연모한다, 헌원용수.”

‘널 연모한다, 헌원용수.’

청년의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이 드리웠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행복과 기쁨이 가득했다.

그는 옅게 미소를 지은 뒤, 결국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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